[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2% 부족한 ‘삶의 갈증’ 케이프타운에서 꽉 채웠어요”
지역내일
2013-08-19
(수정 2013-08-19 오후 2:24:16)
남아공 미용사 이미정 - 관광가이드 송익현 부부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레드오션에는 오직 패자만 존재할 뿐 승자는 없다. 경쟁에서의 승리는 한시적일 뿐이다. 잠깐이라도 경계를 늦추거나 긴장을 풀면 그날로 끝장이다. 레드오션은 포식자들로 가득한 죽음의 바다다. 미용실은 레드오션 분야에서 수위 다툼을 벌이는 업종이다. 골목마다 한두 개씩 들어서 있는 저 많은 미용실엔 손님이 하루 몇 명이나 찾아들까. 밥벌이는 제대로 되는 걸까.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두발미용업계 종사자수는 2011년 기준으로 모두 12만6358명이다. 2012년 기준 남한인구는 모두 5094만 8272명. 이를 미용업계종사자수로 나누면 1인당 인구는 고작 403.2명이다. 이들 중 미장원이나 이발소에 가지 않는 영유아와 대머리, 스님 등의 숫자를 감안할 경우 그 수치는 훨씬 낮아진다. 대표적인 과밀업종이라는 이야기. 빠글빠글 레드오션에서 피 터지는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블루오션을 찾아 드넓은 대양으로 나가는 게 현명한 선택 아닌가.
아프리카 대륙의 끝단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앞바다는 문자 그대로 블루오션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의 푸른 물결이 한 데 어우러지면서 그림 같은 풍광을 만들어 낸다. 바다에는 펭귄이 노닐고, 해안의 구릉에는 싱그러운 포도가 익어간다. 지중해성 기후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분 좋은 날씨를 만들었다.
서울 강남의 내놓으라하는 헤어숍에서 근무하던 미용사 이미정(36)씨. 그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청담동, 삼성동 등지의 프리미엄급 미용실에서 연예인들과 강남 부유층 손님들을 주로 상대하던 레드오션의 승자였다. 2005년 3월 미정씨는 서울의 삶을 훌훌 정리하고는 케이프타운으로 둥지를 옮겼다. 레드오션에서 '이기는 삶'보다는 블루오션에서의 '누리는 삶'을 택한 것이다.
굴삭기 자영업자로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남편 송익현(41)씨도 아내의 결정에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다. 익현씨는 굴삭기 핸들을 놓고 남아공의 아름다움을 안내하는 관광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미정씨와 익현씨는 어린 두 딸 인서(9)와 인이(6)와 함께 케이프타운에서 9년째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삶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임을 입증하는 사람들이다.
정녕 신들의 식탁이었을까. 해발 1086m의 산 정상에 어쩌면 이처럼 넓고 평평한 지형이 들어 앉아 있을까.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아프리카공화국 테이블마운틴 정상에 올랐다. 목측으로 어림해도 축구장 두 개쯤은 넉넉하게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평원이었다.
키 작은 관목 사이로 예쁜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펼쳐진 에메랄드 빛 해안선과 해변 마을들이 동화 속 세계인 듯 아련하게 펼쳐진다. 한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대서양일 것이요, 또 다른 한쪽 바다는 인도양일터이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오랜 세월 수감됐던 로빈 아일랜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테이블마운틴을 내려오면 곧바로 케이프타운 중심가다. 우드스톡 거리에 위치한 힐튼호텔 계열의 더블트리호텔 1층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Leemijey'란 미용실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미정씨가 운영하고 있는 미용실이다.
<사진:경쟁에서 '이기는 삶' 보다는 함께 '누리는 삶'을 더 좋아한다는 이미정씨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우드스톡 거리에 있는 자신의 미용실에서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다.>
호텔 로비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들고 미정씨의 가게를 찾았다. 미용실 안은 조용하면서도 분주했다. 미정씨는 두 명의 보조 미용사와 함께 손님의 머리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편안하고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다. 손님 세 명이 대기 테이블에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예약 없이 불쑥 들어온 손님들이 2~3일 후로 예약시간을 잡고는 발길을 돌리는 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사들고 간 커피가 차갑게 식었을 즈음에야 미정씨와 첫 인사를 나눈 뒤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어릴 시절부터 미용사가 꿈이었어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머리를 땋아주고, 묶어주고, 드라이해주는 일을 도맡아 하고는 했습니다. 철이 들면서 꿈도 바뀌는 데 저는 이상하게도 바뀌지를 않더라고요. 오히려 갈수록 내 인생의 모든 걸 미용 쪽으로 걸게 되더군요."
미정씨의 아버지는 덤프트럭과 굴삭기 등 중장비를 여러 대 소유한 건축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작은 섬유공장을 운영하던 분이었다. 아주 대단한 부자는 아니더라도 1남 4녀에 대한 공부 뒷바라지는 충분히 할 만큼 유복한 형편이었다.
그러니 미정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실업계 진학을 희망했다. 미용사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물론 선생님마저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모두들 인문계를 진학하더라도 취업반 제도가 있으니 일단 인문계로 가는 게 어떠냐고 설득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미용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철부지 소녀가 잠시 품을 수 있는,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철이 들면 바뀌겠지 하셨던 거지요. 저도 한 발 물러서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고3으로 올라가면서 취업반을 선택한다고 했더니 또 한 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도 제 고집을 꺾지 못했어요. 아현직업학교로 원서 넣으러 가던 날 아빠가 저를 데려다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잊혀 지지를 않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하시면서 제 손을 꼭 붙들고 들어가셨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만큼 미용사로서의 커리어는 순탄하게 쌓여갔다. 고3때 미용사 면허증을 취득했고, 취업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화여대 입구에 있는 미용실에서 첫 취업을 해 6개월 정도 근무한 뒤 곧바로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헤어숍으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엔 유명 연예인들을 전속으로 상대하는 청담동의 이경민 헤어&메이크업으로 옮겼다.
"인기스타들의 머리를 전속으로 만지는 그 미용실에서 4년 정도 근무를 했습니다. 처음엔 이제 나도 최고가 되었구나 하고 우쭐했지요. 그렇지만 그런 성취감과 만족감이 오래 가지를 않더라고요. 오히려 연예인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이번엔 삼성동 코엑스 빌딩에 있는 '사틴 미용실'이란 곳으로 옮겼습니다. 미용사만 40명 정도를 둔 큰 업소였습니다. 거기서 5년 정도 있었는데 직업인으로서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료 미용사들 중에서 가장 단골손님을 많이 둘 정도로 잘 나갔지요. 고객들로부터 감사편지도 자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디 감사편지 뿐이랴. 미정씨에게 반한 한 단골손님이 그에게 신랑감까지 안겨 주었다. 자신의 조카를 미정씨에게 소개를 해 준 것이었다. 당시 굴삭기 기사였던 송익현씨를 그렇게 만난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씨름선수처럼 듬직한 체구를 한 남자 하나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선다. 미정씨가 웃으면서 자기 신랑 익현씨라고 소개를 해 준다. 익현씨는 주말 한글학교에 다니는 두 딸 인서와 인이가 수업을 마칠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다소 과묵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익현씨는 의외로 달변이었다. 아하, 직업이 여행사 가이드라고 했던가!
익현씨는 경기도 마석에서 나고, 자라고, 초중고까지 쭉 졸업을 했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는지 대학시험에 계속 낙방을 했다.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하고는 기술 쪽으로 방향을 돌려 굴삭기 조종 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덕에 산업체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마친 뒤 은행 대출을 받아 굴삭기를 하나 샀다. 케이프타운으로 오기 전까지 경기도 일원을 돌며 공사를 했다.
<익현> "그때만 해도 건설경기가 괜찮았어요. 성수기 땐 월700만 원 정도를 벌었으니까요. 비수기를 감안하면 연평균 6000만 원 정도 수입을 올렸습니다. 신혼 초 시절 미정씨 수입을 합치면 매달 1000만 원 이상은 벌었지요."
관광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남편 송익현씨가 가족들과 함께 케이프타운 세실 로즈 기념관을 찾아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세실 로즈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미정> "월수입 1000만 원 이상이면 작은 돈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제 삶에 채워지지 않는 '2%의 갈증' 같은 게 있었어요. 더군다나 큰 딸 인서를 낳은 뒤 저에게 우울증이 왔어요. 저는 대학을 포기하고 미용사의 길을 택할 정도로 미용에 인생을 건 사람입니다. 갑자기 아이 때문에 일을 놓게 되니까 극심한 허탈감에 빠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러다가 미용 일을 영영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심마저 들더군요. 갑자기 안 하던 기도를 시작할 정도로 암담했습니다. 그런 즈음에 케이프타운에서 어학원을 하고 있던 언니로부터 이곳으로 건너오라는 연락이 온 거에요. 여기는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 있으니까 미용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익현>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진 한 바가지 시원한 물 같은 제안이었습니다. 내 삶, 내 가정을 잃어버리고 억만금을 벌어들인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래서 케이프타운 행 결단을 내렸습니다."
<미정>"마치 짜놓은 각본대로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어요. 전세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도 집주인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데 발 벗고 나서주었습니다. 급하게 내놓은 방이었지만 출국 날짜 전에 빠져주었고, 집주인은 전세 계약금 뿐 아니라 잔금까지 미리 변통해 주면서 저희들의 새 출발을 도와주더군요. 전세금 5000만원에다가 적금을 해약하니까 9000만 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었어요. 미용실 개업을 위한 물품과 이삿짐들을 사서 컨테이너에 실었습니다. 비상금으로 2000만 원은 한국의 통장에 남겨놓고, 나머지 3000만 원을 들고 케이프타운으로 왔습니다. 2005년 3월 23일 케이프타운 땅을 밟았습니다. 언니 집은 케이프타운 시내 중심가에서 차를 타고 동북쪽 공항 쪽으로 15분 쯤 거리에 위치한 파인랜드라는 곳에 있었어요. 언니 집 정원에 10여 평 정도 되는 별채가 있었습니다.
언니가 그곳에 미용실을 차리라고 하더군요. 익현씨가 직접 카펫을 뜯어 낸 뒤 타일을 깔고, 보일러 공사를 하고, 샴퓨대 등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개업 간판을 내 걸었었지요. 실망스럽게도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손님이 한 명도 찾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그 때 남자커트 65랜드(당시 환율로 약 만 원) 여자 커트 120랜드(약 1만 8000원) 정도였는데 월수입이 5000여 랜드(약 80만 원) 정도 밖에 안 됐습니다. 들고 온 돈 3000만원이 금방 바닥나더라고요."
<익현> "첫 술에 배부른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6개월 정도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어느 순간 우리 동포들과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하나 둘 단골들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한국인 특유의 손기술을 알게 된 백인과 흑인들도 미정씨를 찾기 시작했어요. 개업한 지 1년 만에 월수입도 1만 랜드를 넘어섰어요. 손님들이 늘다보니 언니 집 별채 공간이 너무 비좁게 돼 버렸습니다. 시내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는 단점도 있었고요. 2007년 봄, 다운타운 북동쪽의 클레어먼트 지역으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제가 또 직접 미용실을 꾸미는 공사를 했습니다. 클레어먼트는 백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깨끗한 지역입니다. 가게를 옮겼는데도 기존 단골들이 계속 찾아주었고, 클레어먼트에 거주하는 현지인 중산층들까지 찾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미용실 운영은 탄탄한 기반을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정> "미용실은 안정이 됐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 때 처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우선 미용실 규모가 지금 이곳보다 3배나 넓었어요. 손님들이 갑자기 느는 건 좋았지만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거지요. 그 때 마침 이곳 호텔 미용실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현지인이 하던 미용실인데 망해서 가게를 접는다고 하더라고요. 망해서 나가는 거니까 권리금도 요구하지 않았고, 임대료도 클레어먼트보다 30% 이상 저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게 규모가 아담한 게 제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3년 만에 클레어먼트 가게를 정리하고 이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여기로 온 이후 가게 규모가 줄었는데도 매출은 20% 이상 늘었어요. 우리 돈으로 월 1000만 원 정도 매출은 거뜬합니다. 15% 정도이던 현지인 고객 비중도 40%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물론 거기서 임대료 나가고 직원들 월급주고 하면 큰돈을 버는 건 아닙니다. 한국에서 보다 못 벌지요. 그래도 한국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돈에도, 일에도, 시간에도, 어느 것에도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살고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시계를 들여다보던 익현씨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글학교로 인서와 인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다. 아이들도 보고 싶고, 익현씨 이야기도 더 듣고 싶은 욕심에 그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아이들을 마중하러 학교까지 갈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아빠가 세상에는 몇 명이나 될까. 인서와 인이가 다니는 한글학교는 미장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막 수업이 끝난 듯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나온다. 두 딸이 달려 나오면서 아빠의 커다란 품에 폭 안긴다. 익현씨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세상사는 행복이란 바로 저런 것 아닐까.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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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레드오션에는 오직 패자만 존재할 뿐 승자는 없다. 경쟁에서의 승리는 한시적일 뿐이다. 잠깐이라도 경계를 늦추거나 긴장을 풀면 그날로 끝장이다. 레드오션은 포식자들로 가득한 죽음의 바다다. 미용실은 레드오션 분야에서 수위 다툼을 벌이는 업종이다. 골목마다 한두 개씩 들어서 있는 저 많은 미용실엔 손님이 하루 몇 명이나 찾아들까. 밥벌이는 제대로 되는 걸까.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두발미용업계 종사자수는 2011년 기준으로 모두 12만6358명이다. 2012년 기준 남한인구는 모두 5094만 8272명. 이를 미용업계종사자수로 나누면 1인당 인구는 고작 403.2명이다. 이들 중 미장원이나 이발소에 가지 않는 영유아와 대머리, 스님 등의 숫자를 감안할 경우 그 수치는 훨씬 낮아진다. 대표적인 과밀업종이라는 이야기. 빠글빠글 레드오션에서 피 터지는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블루오션을 찾아 드넓은 대양으로 나가는 게 현명한 선택 아닌가.
아프리카 대륙의 끝단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앞바다는 문자 그대로 블루오션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의 푸른 물결이 한 데 어우러지면서 그림 같은 풍광을 만들어 낸다. 바다에는 펭귄이 노닐고, 해안의 구릉에는 싱그러운 포도가 익어간다. 지중해성 기후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분 좋은 날씨를 만들었다.
서울 강남의 내놓으라하는 헤어숍에서 근무하던 미용사 이미정(36)씨. 그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청담동, 삼성동 등지의 프리미엄급 미용실에서 연예인들과 강남 부유층 손님들을 주로 상대하던 레드오션의 승자였다. 2005년 3월 미정씨는 서울의 삶을 훌훌 정리하고는 케이프타운으로 둥지를 옮겼다. 레드오션에서 '이기는 삶'보다는 블루오션에서의 '누리는 삶'을 택한 것이다.
굴삭기 자영업자로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남편 송익현(41)씨도 아내의 결정에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다. 익현씨는 굴삭기 핸들을 놓고 남아공의 아름다움을 안내하는 관광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미정씨와 익현씨는 어린 두 딸 인서(9)와 인이(6)와 함께 케이프타운에서 9년째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삶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임을 입증하는 사람들이다.
정녕 신들의 식탁이었을까. 해발 1086m의 산 정상에 어쩌면 이처럼 넓고 평평한 지형이 들어 앉아 있을까.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아프리카공화국 테이블마운틴 정상에 올랐다. 목측으로 어림해도 축구장 두 개쯤은 넉넉하게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평원이었다.
키 작은 관목 사이로 예쁜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펼쳐진 에메랄드 빛 해안선과 해변 마을들이 동화 속 세계인 듯 아련하게 펼쳐진다. 한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대서양일 것이요, 또 다른 한쪽 바다는 인도양일터이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오랜 세월 수감됐던 로빈 아일랜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테이블마운틴을 내려오면 곧바로 케이프타운 중심가다. 우드스톡 거리에 위치한 힐튼호텔 계열의 더블트리호텔 1층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Leemijey'란 미용실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미정씨가 운영하고 있는 미용실이다.
호텔 로비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들고 미정씨의 가게를 찾았다. 미용실 안은 조용하면서도 분주했다. 미정씨는 두 명의 보조 미용사와 함께 손님의 머리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편안하고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다. 손님 세 명이 대기 테이블에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예약 없이 불쑥 들어온 손님들이 2~3일 후로 예약시간을 잡고는 발길을 돌리는 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사들고 간 커피가 차갑게 식었을 즈음에야 미정씨와 첫 인사를 나눈 뒤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어릴 시절부터 미용사가 꿈이었어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머리를 땋아주고, 묶어주고, 드라이해주는 일을 도맡아 하고는 했습니다. 철이 들면서 꿈도 바뀌는 데 저는 이상하게도 바뀌지를 않더라고요. 오히려 갈수록 내 인생의 모든 걸 미용 쪽으로 걸게 되더군요."
미정씨의 아버지는 덤프트럭과 굴삭기 등 중장비를 여러 대 소유한 건축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작은 섬유공장을 운영하던 분이었다. 아주 대단한 부자는 아니더라도 1남 4녀에 대한 공부 뒷바라지는 충분히 할 만큼 유복한 형편이었다.
그러니 미정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실업계 진학을 희망했다. 미용사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물론 선생님마저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모두들 인문계를 진학하더라도 취업반 제도가 있으니 일단 인문계로 가는 게 어떠냐고 설득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미용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철부지 소녀가 잠시 품을 수 있는,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철이 들면 바뀌겠지 하셨던 거지요. 저도 한 발 물러서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고3으로 올라가면서 취업반을 선택한다고 했더니 또 한 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도 제 고집을 꺾지 못했어요. 아현직업학교로 원서 넣으러 가던 날 아빠가 저를 데려다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잊혀 지지를 않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하시면서 제 손을 꼭 붙들고 들어가셨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만큼 미용사로서의 커리어는 순탄하게 쌓여갔다. 고3때 미용사 면허증을 취득했고, 취업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화여대 입구에 있는 미용실에서 첫 취업을 해 6개월 정도 근무한 뒤 곧바로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헤어숍으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엔 유명 연예인들을 전속으로 상대하는 청담동의 이경민 헤어&메이크업으로 옮겼다.
"인기스타들의 머리를 전속으로 만지는 그 미용실에서 4년 정도 근무를 했습니다. 처음엔 이제 나도 최고가 되었구나 하고 우쭐했지요. 그렇지만 그런 성취감과 만족감이 오래 가지를 않더라고요. 오히려 연예인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이번엔 삼성동 코엑스 빌딩에 있는 '사틴 미용실'이란 곳으로 옮겼습니다. 미용사만 40명 정도를 둔 큰 업소였습니다. 거기서 5년 정도 있었는데 직업인으로서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료 미용사들 중에서 가장 단골손님을 많이 둘 정도로 잘 나갔지요. 고객들로부터 감사편지도 자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디 감사편지 뿐이랴. 미정씨에게 반한 한 단골손님이 그에게 신랑감까지 안겨 주었다. 자신의 조카를 미정씨에게 소개를 해 준 것이었다. 당시 굴삭기 기사였던 송익현씨를 그렇게 만난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씨름선수처럼 듬직한 체구를 한 남자 하나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선다. 미정씨가 웃으면서 자기 신랑 익현씨라고 소개를 해 준다. 익현씨는 주말 한글학교에 다니는 두 딸 인서와 인이가 수업을 마칠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다소 과묵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익현씨는 의외로 달변이었다. 아하, 직업이 여행사 가이드라고 했던가!
익현씨는 경기도 마석에서 나고, 자라고, 초중고까지 쭉 졸업을 했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는지 대학시험에 계속 낙방을 했다.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하고는 기술 쪽으로 방향을 돌려 굴삭기 조종 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덕에 산업체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마친 뒤 은행 대출을 받아 굴삭기를 하나 샀다. 케이프타운으로 오기 전까지 경기도 일원을 돌며 공사를 했다.
<익현> "그때만 해도 건설경기가 괜찮았어요. 성수기 땐 월700만 원 정도를 벌었으니까요. 비수기를 감안하면 연평균 6000만 원 정도 수입을 올렸습니다. 신혼 초 시절 미정씨 수입을 합치면 매달 1000만 원 이상은 벌었지요."
관광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남편 송익현씨가 가족들과 함께 케이프타운 세실 로즈 기념관을 찾아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세실 로즈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미정> "월수입 1000만 원 이상이면 작은 돈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제 삶에 채워지지 않는 '2%의 갈증' 같은 게 있었어요. 더군다나 큰 딸 인서를 낳은 뒤 저에게 우울증이 왔어요. 저는 대학을 포기하고 미용사의 길을 택할 정도로 미용에 인생을 건 사람입니다. 갑자기 아이 때문에 일을 놓게 되니까 극심한 허탈감에 빠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러다가 미용 일을 영영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심마저 들더군요. 갑자기 안 하던 기도를 시작할 정도로 암담했습니다. 그런 즈음에 케이프타운에서 어학원을 하고 있던 언니로부터 이곳으로 건너오라는 연락이 온 거에요. 여기는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 있으니까 미용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익현>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진 한 바가지 시원한 물 같은 제안이었습니다. 내 삶, 내 가정을 잃어버리고 억만금을 벌어들인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래서 케이프타운 행 결단을 내렸습니다."
<미정>"마치 짜놓은 각본대로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어요. 전세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도 집주인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데 발 벗고 나서주었습니다. 급하게 내놓은 방이었지만 출국 날짜 전에 빠져주었고, 집주인은 전세 계약금 뿐 아니라 잔금까지 미리 변통해 주면서 저희들의 새 출발을 도와주더군요. 전세금 5000만원에다가 적금을 해약하니까 9000만 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었어요. 미용실 개업을 위한 물품과 이삿짐들을 사서 컨테이너에 실었습니다. 비상금으로 2000만 원은 한국의 통장에 남겨놓고, 나머지 3000만 원을 들고 케이프타운으로 왔습니다. 2005년 3월 23일 케이프타운 땅을 밟았습니다. 언니 집은 케이프타운 시내 중심가에서 차를 타고 동북쪽 공항 쪽으로 15분 쯤 거리에 위치한 파인랜드라는 곳에 있었어요. 언니 집 정원에 10여 평 정도 되는 별채가 있었습니다.
언니가 그곳에 미용실을 차리라고 하더군요. 익현씨가 직접 카펫을 뜯어 낸 뒤 타일을 깔고, 보일러 공사를 하고, 샴퓨대 등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개업 간판을 내 걸었었지요. 실망스럽게도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손님이 한 명도 찾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그 때 남자커트 65랜드(당시 환율로 약 만 원) 여자 커트 120랜드(약 1만 8000원) 정도였는데 월수입이 5000여 랜드(약 80만 원) 정도 밖에 안 됐습니다. 들고 온 돈 3000만원이 금방 바닥나더라고요."
<익현> "첫 술에 배부른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6개월 정도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어느 순간 우리 동포들과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하나 둘 단골들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한국인 특유의 손기술을 알게 된 백인과 흑인들도 미정씨를 찾기 시작했어요. 개업한 지 1년 만에 월수입도 1만 랜드를 넘어섰어요. 손님들이 늘다보니 언니 집 별채 공간이 너무 비좁게 돼 버렸습니다. 시내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는 단점도 있었고요. 2007년 봄, 다운타운 북동쪽의 클레어먼트 지역으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제가 또 직접 미용실을 꾸미는 공사를 했습니다. 클레어먼트는 백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깨끗한 지역입니다. 가게를 옮겼는데도 기존 단골들이 계속 찾아주었고, 클레어먼트에 거주하는 현지인 중산층들까지 찾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미용실 운영은 탄탄한 기반을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정> "미용실은 안정이 됐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 때 처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우선 미용실 규모가 지금 이곳보다 3배나 넓었어요. 손님들이 갑자기 느는 건 좋았지만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거지요. 그 때 마침 이곳 호텔 미용실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현지인이 하던 미용실인데 망해서 가게를 접는다고 하더라고요. 망해서 나가는 거니까 권리금도 요구하지 않았고, 임대료도 클레어먼트보다 30% 이상 저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게 규모가 아담한 게 제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3년 만에 클레어먼트 가게를 정리하고 이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여기로 온 이후 가게 규모가 줄었는데도 매출은 20% 이상 늘었어요. 우리 돈으로 월 1000만 원 정도 매출은 거뜬합니다. 15% 정도이던 현지인 고객 비중도 40%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물론 거기서 임대료 나가고 직원들 월급주고 하면 큰돈을 버는 건 아닙니다. 한국에서 보다 못 벌지요. 그래도 한국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돈에도, 일에도, 시간에도, 어느 것에도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살고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시계를 들여다보던 익현씨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글학교로 인서와 인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다. 아이들도 보고 싶고, 익현씨 이야기도 더 듣고 싶은 욕심에 그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아이들을 마중하러 학교까지 갈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아빠가 세상에는 몇 명이나 될까. 인서와 인이가 다니는 한글학교는 미장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막 수업이 끝난 듯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나온다. 두 딸이 달려 나오면서 아빠의 커다란 품에 폭 안긴다. 익현씨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세상사는 행복이란 바로 저런 것 아닐까.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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