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악’에 묻혀버린 ‘축’의 역사적 의미(임현진 2002.03.05)

지역내일 2002-03-08
‘악’에 묻혀버린 ‘축’의 역사적 의미
임현진 서울대학교 교수 사회학 현 듀크대학교 초빙교수



다시금 반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가뜩이나 노근리와 매향리 문제로 한반도에서 미국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감도는 가운데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미국의 텃세에 따른 불공정판정 시비도 반미감정을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지난달 부시대통령의 연두교서 ‘악의 축’ 발언이 우리의 심사를 꼬이게 한 화근이 아닌가 싶다. 국제사회의 반전(反戰)론 류의 비판과 달리 우리는 바로 ‘악의 축’ 당사자의 동족이자 통일의 파트너로서 자존심이 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실은 부시대통령의 연두교서 작성자로 알려진 데이비드 프럼이 최근 백악관의 공보팀을 떠난 배경이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자신의 사직이 이번 ‘악의 축’ 언사에 대한 국내외 비판과 무관하다고 애써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이유는 ‘증오’(hate)를 ‘악’으로 바꾼 당사자가 부시라는 사실이 그로 인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스트라이터’의 금기사항을 어긴 셈이다.
원래 선과 악은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현실의 수사다. 부시가 이런 선악구도를 쓴 것은 작게는 공화당 강경보수파를 달래면서 크게는 국방예산증대를 이루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 그러나 국민단합을 통한 리더십 확보가 2004년 재선에 결정적이라는 그의 계산이 깔려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결국 자신의 이해로 인해 세계가 전쟁에 빠져도 개의치 않겠다는 얘기다. 사실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끌어가고 있는 워싱턴 요직의 매파들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강렬히 원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워싱턴 매파, 전쟁을 강렬히 원한다
우리로서는 이점을 결코 간과해서 안 된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남북한 공멸이다. 당장의 통일보다 미래의 통합을 위한 신뢰구축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기에 우리로서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일관성이 필요하다. 미국에 끌려 다니는 외교를 넘어서려면 남북관계에서 원칙을 보여주면서 미국과 대화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국익이 중요하듯 미국에게도 국익이 중요하다. 미국의 이해는 세계중심국으로서의 패권주의적이라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미국의 국익은 자유와 인권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국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안보에 있다. 과거 미국의 유럽재건이나 한국이나 대만 복구를 위해 막대한 경제원조를 한 이유도 안보에 있었다.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도 희생될 수 있다는 과거와 테러를 막기 위해 독재체제도 옹호할 수 있다는 현재 사이에는 미국의 안보우위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논객 윌리암 사파이어는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후, “극작가가 연극 서두에 권총을 책상 위에 놓는 장면을 연출하면, 그 연극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총소리가 들릴 것을 예상한다”고 전쟁설을 뒷받침했다. 기실 ‘악의 축’의 수사는 전쟁논리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악의 축’ 수사에서 ‘악’이 주는 혐오감으로 인해 ‘축’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는데 소홀했다. 미국 리드대학 동양학 교수 유형규는 미국 현대사에서 ‘축’이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함의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일깨워주었다. 미국이 주장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축’이라는 언어로 강조한 것은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높여준다는 설명이다.
돌이켜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동서를 잇는 ‘베를린-로마-동경’의 세 축을 형성하여 세계지배의 야욕을 나타냈다. 바로 그들이 인류평화를 해친 장본인이며, 그로 인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와 비극을 낳았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후 참전을 결정하고 이들을 ‘추축국’(axis of power)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이유로 부시대통령의 의회연설이후 백악관대변인은 이런 ‘악의 축’ 표현이 미국의 이란 이라크 북한에 대한 무력사용으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사족을 달았던 것이다.

힘 과신한 미국 오만 버리고 관용 가져야
미국의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 참전에 관해서는 그 동기에 관해서 논란이 많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계중심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미국의 대외정책적 입지의 발현으로 보는 데 이견이 거의 없다. 사실 ‘팍스 아메리카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후의 현상이다.
카터 전대통령은 ‘악의 축’ 발언이 지나치게 우방과 적대국 사이를 단순화시킨다고 비판하면서, 북미관계가 민주당정권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악의 축’ 발언은 국제사회에서 불신의 악순환을 넘어 갈등을 전쟁으로 확대재생산한다.
미국은 걸프전 승리이후 너무 자신의 군사적 힘을 과신하고 있다. 오만을 버리고 관용을 가져야 한다. 강대국은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한 과도한 군사비지출로 인해 결국 몰락을 재촉한다는 역사학자 케네디의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임현진 서울대학교 교수 사회학 현 듀크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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