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사람들 - (사)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권이종 부회장

“막장 광부 시절만 기억하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지역내일 2013-01-28

1940년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는 한 오지마을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사)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권이종 부회장.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탈출구로 파독광부의 길을 택했던 그는 한국인 최초로 독일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해 교수가 됐다. 지하 막장에서조차 책을 놓지 않았을 정도의 열정과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올해 광부?간호사 파독 50주년, 한독수교 130주년을 맞아 연합회 일로 바쁘게 뛰고 있는 권 부회장을 만나 실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사에 대해 들어보았다.


장독까지 팔아서 공부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어머니
어릴 적 그의 초가집은 제대로 된 문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고 하루에 한 끼 먹기도 어려웠을 만큼 너무 가난했다. 그러니 2남 2녀 가운데 막내였던 그도 초등학생 때부터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팔고 농사일을 돕느라 초등학교를 8년 만에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 후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돼 애만 태우던 그는 무작정 전주로 가서 중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너는 장차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라는 담임교사의 말씀에 교육자의 꿈을 갖게 됐는데 그대로 농사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합격은 했어도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늘 책을 가까이 하던 아들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베틀과 장독까지 모두 내다 파셨다. 그래도 등록금을 내기에 부족하자 “쌀 한 가마니를 빌려줄 때까지 꼼짝하지 않겠다”며 동네 부잣집 대문 앞에 하루 종일 서 계셨다. 결국 해질 무렵에야 쌀 한 가마니를 얻어오셨고 그는 중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혼자 전주에서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신문 배달을 하는 고달픈 생활이 계속됐다. 한창 먹어야할 나이에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아무리 애를 써도 갈수록 생활은 어려워져 학업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쌀 한 가마니를 얻어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고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어 파독광부 지원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를 한 후에도 농사일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에 대해 고민하며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1963년 봄, 오촌 여조카의 권유로 서울에서 공사장 막노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그때 같이 일하던 한 대학생이 파독광부 모집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에게 독일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기회의 땅으로 느껴졌다.
매월 5급 공무원 월급의 열 배 정도를 벌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지원을 했다. 그가 지원했던 2진 모집에만 수천 명이 몰렸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지만 결국 합격을 했다. 하지만 경비 문제가 남아있었다. 공부 뒷바라지를 했던 어머니에 이어 이번에는 형님이 나섰다. 어렵게 농사를 짓고 있던 형님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소를 팔아서 도와준 것이다. 또 다른 준비물 중의 하나였던 양복까지 형님의 도움을 받은 후 지인들에게 넥타이와 뒤창이 거의 닳아 없어진 구두까지 얻어 신고 독일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지하 막장에서도 멈추지 않은 공부
저마다 신세계에 대한 동경을 안고 독일에 도착했지만 광산 현장에 배치된 후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광부 경력자가 아니었기에 4주간의 독일어 교육과 3개월간의 현장실습을 받았어도 작업은 서툴기만 했다. 결국 일을 시작한지 몇 주 만에 막장 천정이 무너져 한 동료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후로도 30~36도 고온의 지하 막장에서 석탄가루가 묻은 빵을 삼켜가며 매일 생사의 갈림길을 헤쳐 나갔다. 그 역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가장 깊고 위험한 곳인 막장에 지원하고 연장근무까지 하다가 무너진 바위더미에 왼쪽 손바닥이 깔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보낸 돈으로 고향의 식구들이 소도 다시 사고 논도 마련할 수 있었기에 광산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니던 그는 지하 수백 미터 어두운 막장에서도 안전모에 달린 램프에 의지해 책도 보고 독일어 공부도 했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다른 동료들보다 빨리 독일어를 익혀 독일인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 출신인 로즈마리 부인은 그를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3년간의 광산 근무 기간을 끝내고 귀국하려고 했을 때 공항까지 따라와서 “이왕 고생했으니 힘들더라도 공부를 하고 가라”며 붙잡은 것도 로즈마리 부인이었다. 그녀의 간곡한 권유로 제2의 독일 생활이 시작됐지만 막장 광부 시절 못지않은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 국립사범대에 외국인 최초로 입학
국립사범대학인 아헨교원대학 푀겔러 학장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그의 집념에 반해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었다. 그가 개교 이래 최초의 외국인 학생이었다. 1968년 4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8년 만에 대학생이 된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쳤다. 비록 광부 생활 틈틈이 공부를 한 덕분에 독일어 실력이 많이 늘었지만 대학 강의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암기식 공부 방식도 문제였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수업은 들리지 않고 시험 점수는 항상 영점이었다. 그는 “학교에 외국인 학생이 나밖에 없는데다가 옷차림까지 남루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향수병까지 겹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뻔도 했다”고 회상했다.


독일 교육학 박사학위 1호 한국인
3년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수업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스터디 그룹에 참여해 독일식 공부 방법도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게 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초등학교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1971년 독일에서 만난 간호사 출신 백정신씨와 결혼도 했다.
학사학위를 받은 후 마치 부모처럼 그를 이끌어주었던 푀겔러 학장은 석사과정까지 밟으라고 권유했다. 아내 역시 그가 공부를 계속하도록 격려해 결국 대학에 입학한지 13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파독광부였던 그가 한국인 최초로 독일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1979년에 귀국한 그는 전북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교육부 상임자문위원을 거쳐 한국교원대학교 교수(현 명예교수), 한국청소년개발원장 등을 역임했다. 푀겔러 학장의 영향을 받아 ‘평생교육학’과 ‘청소년학’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국내 평생교육과 청소년학 분야 발전에 헌신하기도 했다.


파독 근로자들의 명예 회복 위해 뛴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항상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사람과의 만남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해 지난해 ‘막장광부 교수가 되다’에 이어 최근 ‘청소년을 위한 삶의 지혜’를 출간하는 등 지금까지 60여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독일의 교육환경을 경험한 그는 특히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독일에서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 아이들 대부분은 아무런 꿈이나 목표가 없다는 게 안타깝다. 우리 세대들이 파독 근로자로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일했던 것을 기억하며 보다 적극적인 삶을 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요즘 양재동 파독 근로자 기념관 개관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 전시관에 전시할 광산구조물을 독일 정부에 요청했으며 그밖에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쓴 일기, 편지, 손때 묻은 작업 도구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파독 광부,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의 우리나라 경제발전 기여에 대한 연구와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 김태헌 작가(스튜디오 세가)
장은진 리포터 jkume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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