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말해도 괜찮겠지요”

월북자 가족이란 이유로 죄인 취급받은 50년

지역내일 2000-08-18

대구 수성구 파동에 사는 박노숙(75) 할머니.
1950년 10월 남편이 퇴각하던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 뒤 1남1녀를 키우며 혼자 살아왔다.
“그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남편을 지금 만난다 해도 원망밖에 할 게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50년이나 지난 일이라 이젠 남편 얼굴도 잘 안 떠오른다”던 박씨는 54년 전 흑백 결혼사진을 보여주며 끝내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50년간 남편과 생이별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지난 반세기 동안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것이 단 한가지 이유였다.

남편과 함께 4년, 생과부 50년

박 할머니가 결혼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당시 경북 영주 평원국민학교 교사이던 정학진(75)씨와 신혼살림을 차렸다.
정씨는 이듬해 경북 구미 해평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전쟁이 터진 50년에는 아들 해문(54·당시 4세)과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신혼’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10여일 피난을 갔다. 아무래도 집이 걱정이 돼 돌아와 보니 이미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박씨에 따르면 평범한 교사였던 남편은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면 서기와 농지개량조합 직원을 지냈던 정씨의 형을 따라 10여일 ‘교육’을 받았던 것.
그해 9월 28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퇴각명령이 내려진 인민군을 따라 남편이 월북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0월 초순이었나. 저녁밥을 짓고 나니 뒷산을 통해 시숙과 남편이 인민군들을 따라갔다고 하데요”
그게 끝이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못한 채 50년을 생이별이 시작됐다.
조그만 촌 동네에서 네 가족이 그렇게 헤어졌다. 남편 정씨와 시숙, 18살 먹은 종질, 그리고 노씨의 종손이라는 사람.

이산의 아픔은 고난의 시작일 뿐

“전쟁이 끝나면 만날 줄 알았어요”박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별의 아픔은 박씨의 반세기에 걸친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다.
국군 수복지역에서 대대적인 인민군 부역자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경찰과 토벌대는 매일같이 ‘숨긴 남편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심지어 다락에 총질을 해대고 새참 나르는 박씨를 뒤쫓기도 했다.
51년 박씨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인 딸(정양자·50)을 낳았다. 이제 세 가족이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박씨는 농사도 짓다가 보따리 장사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여자 혼자 벌이로 세 식구 밥 문제 해결하기도 힘들었다. 아들 딸 모아 놓고 같이 죽자고 작정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월북가족의 굴레, 주위 눈총과 연좌제

그보다 더 박 할머니를 힘들게 했던 건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은 죄도 없이 기죽어 지내야 했던 50년이었다. 경찰서 정보 형사는 1년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경찰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며 박씨 가족을 범죄자 취급했다.
자식들은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다녀보지 못했다. 아들 해문씨는 영세공장을 전전하다 지금은 트럭 한 대로 이삿짐센터를 하고 있다.
박씨는 83년 이후 몇 번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 때 신고도 하지 않았다. 행여 월북자 가족이란 이유로 다시 차별 대우를 받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박씨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보고 용기를 내어 방북신청을 했다.
이러다가 예전처럼 한 두번 만나고 또 몇 년을 끌지는 않을까 하는 게 박씨의 가장 큰 걱정이다.
“만나는 건 둘째 문제고 생사확인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월북자 가족이란 피해의식에서 못 벗어난 탓일까. 박씨는 인터뷰를 하면서 “이젠 이런 얘기해도 별일 없겠죠”라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대구 성홍식 기자 hss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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