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된 지 10년 이상 지난 생활형 고정 간첩들이 스크린을 통해 추석 명절 연휴로 쌓인 피로를 풀어준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시절의 무시무시한 간첩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간첩’은 북의 공작금 지원이 끊긴 채 지령을 기다리다 지쳐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아 나선 생활형 간첩들의 실체와 애환을 흥미롭게 풀어놨다.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간첩들
우리는 한때 시대나 문화의 흐름과 동떨어진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너 간첩이냐?”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영화 ‘간첩’ 속의 간첩들은 남한의 물정을 모르는 이런 간첩이 아니다. 남한에서 가정을 이루고 이념을 떠나 먹고 살기위해 노력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북한으로 돌아갔을 때 “너 간첩이냐?”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
머리 좋고 말솜씨가 탁월한 김 과장(김명민)은 무역상으로 위장해 불법 비아그라를 팔며 남한과 북한의 가족들을 부양하고, 로케이션 담당자로 지도 파악 능력이 뛰어난 강 대리(염정아)는 부동산 중개인이자 싱글맘으로 바쁘게 살아간다. 신분세탁과 문서 위조에 능한 윤 고문(변희봉)은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정년퇴직 후 시간을 때우며 살아가고, 첨단기기 해커로서 혁명을 외치던 우 대리(정겨운)는 귀농해서 소를 키우며 FTA 반대시위에 앞장선다. 이들은 이름만 간첩일 뿐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걱정하고, 생활고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10년 만에 지령이 떨어진다. 북한 간부 리용성의 귀순으로 암살 전문 최 부장(유해진)이 북에서 내려오고 그의 명령에 따라 리용성 암살 작전을 수행해야하는 것이다. 조국(북한)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최 부장과는 달리 고정간첩들은 갑작스런 작전 지시에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며 너무나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코믹과 액션이 버무려진 휴머니즘
영화 ‘간첩’ 속의 고정간첩들은 모두 양면성을 갖고 있는 입체적 인물이면서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사업가이면서도 가족과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한 김 과장, 복비 한 푼에 목숨 거는 억척스런 부동산 아줌마지만 아들에게만은 지극정성인 강 대리, 북에서 헤엄쳐서 넘어온 간첩계의 산증인이지만 죽기 전에 고향 땅 밟기만을 소망하는 로맨티스트 윤 고문, FTA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열혈청년이지만 좋아하는 강 대리만 떠올리면 질투와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우 대리. 네 명의 인물은 현실과 작전수행이라는 갈등 상황을 익살스럽게 풀어가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코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재적소에서 민첩하고 과감한 액션을 선보이며 이들이 ‘허당’ 간첩만은 아님을 과시한다. 리용성이 머물고 있는 안가 침투작전에서 보여주는 조직력과 순발력,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생활 액션, 과감한 격투장면과 총격전 등은 실감나는 액션장면을 완성한다. 영화는 코믹과 액션이 뒤섞여있지만 가족, 고향, 소, 동료를 생각하는 휴머니즘을 곳곳에서 보여주며 감동을 이끌어낸다.
생활형 간첩, 이념 체제 속의 희생양
첨단 정보로 시간을 다투는 인터넷 시대에 고된 훈련을 받고 은밀하게 작전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캐던 간첩의 정보원 역할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한 내부에 이념과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위장 침투 및 교란 작전을 펼치기에는 시대가 달라졌다. 이념보다는 가족, 행복, 실리가 시대의 가치로 바뀌었다. 냉전시대에 정보원으로 활약했던 고정간첩들이 시대가 바뀌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5만 간첩을 북한이 반길 리도 없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소련군, 청나라로 끌려갔던 환향녀(還鄕女)처럼 조국을 위해 희생했지만 외면할 수밖에 없는 껄끄러운 존재일 것이다. 영화 ‘간첩’은 이념 체제의 희생양으로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생활형 고정간첩들의 애환을 무겁지 않게 전달했다.
이선이 리포터 2hyeo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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