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그녀를 듣다 김혜리

지역내일 2012-07-23 (수정 2012-07-23 오전 8:58:17)
1995년, 김혜리 기자는 씨네21 창간 팀의 일원으로 영화 기자의 업을 시작했다. ‘영화야 미안해’‘그녀에게 말하다’ ‘영화를 멈추다’ ‘진심의 탐닉’ 네 권의 책을 내면서 인터뷰이들에게는 생에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어로 기억되었으며, 인터뷰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기억되었다. 나 또한 그런 인터뷰어 중 하나다. 그녀의 인터뷰를 읽으며 질문지를 만들었고, 말을 골랐으며, 글을 고쳤다. 그녀는 나의 선생님이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그림 에세이 ‘그림과 그림자’를 냈다. 영화와 인터뷰의 영역에서 벗어난 글들은 그간 숨겨져 있던 그녀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급격하게 그녀가 궁금해졌다. 수많은 인터뷰를 ‘다시’ 읽으며, 대답을 하는 인물이 아닌 질문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듬었다. 결국,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11월의 어느 날, 상수의 작은 카페에 우리는 마주 앉았다. 모두가 그녀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를 들었다는 사실이, 못내 두근거렸다.






매번 책을 내시면서, 이 책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시게 될 것 같은데요. ‘그림과 그림자’는 어떤 바람으로 세상에 나왔나요.
사실, 과연 이 책이 사람들한테 쓸모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어요. 미술에 대한 전문 서적이 많은 상태에서 깊이 있는 지식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문학이라 하기엔 정보가 강하고요. 근데 일단, 책의 형태가 된다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사서 선물을 하고 싶었어요. (웃음) 사실 제가 책에 뽑아놓은 그림들이 기존의 미술 책에 많이 나오는 명작들은 아니잖아요. 현대미술에 대해서 관념적인 인상을 많이 갖고 있기 마련인데, 실제로 전시를 다니다 보니까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은데 책으로 소개되는 그림들은 너무 한정된 것 같아서 좀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가령 필립 거스턴의 술병과 머리 같은 그림을 보고, 거스턴을 더 찾아보시면 좋은 그림이 많거든요. 그런 식으로 더 많은 작가하고 유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고요. 글이 짧잖아요? 틈날 때마다 읽어 가시면서,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책장 구석에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이전에 인터뷰집에서 관찰을 굉장히 깊게 하신단 느낌 받았는데, 이번 책도 마찬가지더군요. 혹시, 기자님이 관찰력이 있단 사실을 인식하고 계신가요.
관찰력이 좋단 생각은 안 해봤지만 기사를 쓰면서 사람이든 영화든 어떤 대상에 대해 묘사하는 일을 해왔잖아요.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바라보긴 하겠죠. 그래서 메모하는 습관이 있고, 심지어 콘서트를 가도 메모를 해요. 뭔가 손에 없으면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이건 관찰력이 좋다기보다 신비한 생각인데요. 뭐랄까, 이상한 우연의 일치랄까. 저한테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림을 봤는데 그것과 연상되거나 잘 어울려서 예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거나, 영화를 봐도 그 안의 음악을 여러 번 듣게 된다거나.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건데. (웃음) 제 일상의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거든요. 무슨 조화 속인지.

짝사랑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네요. 들어보니, 원래 특정 대상에 애정을 잘 가지시는 것 같은데요. (웃음)
네. 전 되게 잘 빠져요. (웃음) 그래서 더 힘들기도 하고. 약점도 되죠. 누굴 인터뷰하게 되면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잖아요.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니까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했던 말들, 연기들, 그 사람이 나온 영화들, 예전엔 봤더라도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보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가 자꾸 그 사람 입장에 서게 되고 편을 들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상황일 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어떻게 느낄까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상태로 만나러 가게 돼요. 그리고 나서 헤어질 때, 뭐랄까, 서운해요.

더 힘들기도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감정적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데, 다음 취재해야 하니까 다른 대상에게 관심을 옮겨야 할 때 마음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이별하는 것 같은 느낌. 그건 개인적인 감정을 품는 것하고는 좀 달라요. 설명을… (생각하다) 어떻게 보면 연기하고 비슷한 지점도 있고요. 그게 꼭 나는 아니지만, 내가 인터뷰어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는 거기에 몰입했다가 다시 꺼내야 하니까. 그게 심리적으로 분리하기 힘든 느낌인 거죠.

기자이기 때문에 늘 좋아하는 사람만 인터뷰할 수는 없는데요. 애정이 덜 가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 글을 쓸 때, 혹은 그런 영화나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는 어떤 방식을 쓰실지 궁금해지네요.
그럴 땐 확실히, 더 어렵고요. 글 쓰는데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글이 안 풀린다고 하는데, 그게 꼭 단점만은 아닌 것 같아요. 늘 아주 좋아하는 상태에서만 쓰는 글들이 다수니까 조금 한 발 떨어진 상태에서 써도. 반드시 그 분을 칭찬하거나 그 영화에 대해서 미사여구를 쓰기 위해서 기사를 쓰는 건 아니잖아요. 재미있고 개성적인 글을 하나 쓰면 성공하는 거죠.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기사, 안 쓰려고 노력하는 기사가 맨 끝에 마무리를 어떻게든 좋게 끝내려고 하는 기사예요. “~하길 기원한다”로 끝나는 기사, 덕담으로 끝내려고 하는 기사는 다 지루해요. 그런 상투적인 덕담을 하나 얻는다고 해서 그 인터뷰이가 더 기뻐하지도 않아요. 그분들이 원하는 건, 어떤 새로운 시각이지 그게 칭찬이냐 비난이냐만 갖고서 그걸 저울질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또 신인인 경우에, “이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것도 너무…. 왜 꼭 어떤 결론이 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사실 ‘그림과 그림자’에 실린 글들도, 보면 “뭐야, 그래서? 뭐란 얘기야?” 이런 경우가 많을 거예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론을 원하는데, 저는 자꾸 청개구리같이. 아무것도 아니고요. 저는 이게 좋단 얘기도 아니고요. 나쁘단 얘기도 아니고요. 그냥 ‘이렇단’ 얘기에요. 그냥 그렇게. 살짝 바른 맞춤으로 안 끝나고 엇박으로 끝나거나, 완전 화음이 아닌 약간 삐쭉한 채로 끝내버리고 싶은 그런 이상한 반항심 같은 게 자꾸 생겨서. (웃음)

일을 시작하셨을 때 가지고 있던 작은 포부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기억나시나요? (웃음)
제가 역사를 전공한 건, 사람들의 삶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어요. 근데 제가 생각했던 드라마나 낭만적인 요소보다는 과학의 요소가 많더라고요. 그러다가 영화를 알게 됐는데, 그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문학도 있고, 철학도 있고, 정치도 있고, 어디로도 통할 수 있는 저수지 같은 데가 영화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글은 깨쳤으니까, 글 쓰는 것 밖에 없잖아요. 그럼 어떤 글? 저는 신문 기사에선 영화에 대해서 충분히 표현할 수 없고 이미지와 텍스트도 마음대로 배열할 수 없는 게 싫었어요. 영화에 대해 얘기하려면 영화랑 비슷한 뭔가의 구조물을 만드는 게 즐겁죠. 잡지는 영화처럼 이미지랑 언어를 배열하는 일이잖아요. 그 작업 자체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잡지를 원했어요. 그렇게 하나씩 경우의 수를 지워가면서 귀착된 데가 영화 잡지였죠. 내가 한국 사회에서 내 자신을 부양하면서 공부하는 듯이 일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포부가 아니라, 하게 되서 다행이죠. (웃음)
일을 하면서, 그런 건 생겼죠. 영화를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최대한 영화 유통을 매개한다. 그 바운더리 안에서, 영화를 안 본 사람이 내 글을 읽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개성을 가진 글을 쓰고 싶다. 근데 항상 그림이건 인터뷰건 궁극적으로는 내 얘기를 어떤 매개체를 빌어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직설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얘기할 만큼 내 안의 내용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숨어서 하는 거죠.

책 서문에도 대학교 2학년 시절에 영화가 휙 휘파람을 불었다고 표현하셨는데요. 그 때를 회상하자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는지요.
(한숨을 쉬며) 너무 오래되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훨씬 자신감이 있었어요. 단지 제도 교육에 갇혀 있을 뿐이지 대학만 가면 굉장히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제가 믿는 바대로 다 행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많이 깨진 거죠. 지금까지 누가 말려서 못한 게 아니라, 내 용량이 이것밖에 안 돼서 못하는 거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그럴 거다. 실체를 파악하게 됐다고 해야 하나? 대학에 다니면서 자신을 가장 덜 속일 수 있는 삶의 방식,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 나를 책임질 수 있는 방식이 뭘까 고민하느라 힘들었고 항상 괴로웠어요. 공부든 사회문제든 어떤 일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부끄러움이나 열등감도 느꼈고. 그렇지만 억지로 날 끌고 갈 순 없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나한테 맞는 뭔가를 찾으려고 틈새를 찾다가 찾은 게 영화에 대해서 글 쓰는 거. 조용히 웅크리고 남들에게 피해를 안 주고 살 수 있는 틈 같은 곳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죠.

영화의 큰 힘에 매료되셨단 대답을 듣게 될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사실 영화는, 영화에 대한 글이 먼저 재미있었어요. 장면 분석이나 그런 것들이 재미있어서 거기에 나온 영화들을 거꾸로 찾아본 거예요. 예를 들어, 영화 ‘졸업’에서 줌을 쓴 장면이라고 하면, 그래? 그럼 찾아봐야지. 아, 이 장면에 대해서 이렇게 썼구나. 그렇게 글부터 재미를 붙여서,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극장에서 살다시피 한 기억이나 동시상영의 추억, 그런 건 진짜 없고요. (웃음)

중간에 유학을 다녀오셨죠. 기자님 성격에 비춰보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 같은데, 그런 결심을 하신 이유가 뭔가요.
씨네21 창간할 때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다섯 명이 두 달 동안 준비해서 창간호를 겨우 만든 거예요. 그렇게 쫓겨서 만들고 마감을 딱 하고 나서 생각하니까, 이제 주간지니까 매주 하나씩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 (폭소)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저희 전부다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예요. 생활의 여유라는 게 없었어요. 2년쯤 됐을 때 두 가지에 대해 확신이 들었어요. 첫째, 난 이 일을 좋아하고 오래 하고 싶다. 앞으로도 다른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다. 두 번째는, 근데 지금 상태로 가면 난 2달 안에 나자빠지고 회복을 못할 것 같다. 그러면 여기서 중단을 하고 더 오래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다음에 다시 돌아오는 게 맞겠단 생각을 한 거예요. 지금처럼 소모되면 영영 못하게 되고 나는 탈진하고 그냥 이 일 자체도 환멸을 느끼게 될 것 같았죠. 그래서 여기서 잠깐! 그만! (웃음)
유학 시절은 행복했어요. 혼자 밥해먹고 빨래를 하고 자신을 돌보는 걸 배워간다는 게 즐거웠고요. 또, 영화를 공부하면서 영화광들에 대한 열등감이 없어졌어요. 세상에는 많은 영화 이론이 있고, 어떤 경지에 가기 위한 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우회로가 있고 여러가지 시각이 있다는 걸 느꼈달까. 영화 해석에 있어서의 지적 강박? 그런 게 없어진 거죠.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기자님도 충분하신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작은데 빠지는 거죠. 딱 하나! 개체에 빠지는 거고, 전체적인 지형도를 그리는 맵핑을 못해요. 물론 기사를 써야 하니까 제가 필요로 하는 한의 어떤 시야는 가지려고 해요. 근데 영화를 보면 그 영화 안으로 자꾸 들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더 이상은, 저항하지 않기로 했어요. (폭소) 어차피 노력해도 안 돼.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걸 쓰고, 기사에 필요하다면 그 영화의 전체적인 지형도로서의 좌표는 공부를 해서 찾아내자. 저는 그릇이 작기 때문에, 그 그릇을 깨버릴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그거라도 잘 채우거나…. 어쨌든 살긴 해야 하잖아요. 자살하지 않을 거면.(웃음)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스스로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요. ‘그래서 죽을 용기가 있어? 만약 그게 아니면 넌 아침에 일어나고 또 밤 되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겠다고 잘 텐데, 그러면 나름대로 핑계가 있어야 할 것 아냐. 아주 작은 거라도.’(웃음) 그럼 나 자신을 똑바로 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남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자. 그 정도로 정리하고 생활한 것 같아요.

훗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나중에요? (한참을 생각하고) 그런 생각 진짜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나쁜 기억만 안 남기면 좋겠어요. 다 잊혀도 괜찮아요. 쟤가 글로 나를 속였었지, 그런 생각은 안 들었으면 좋겠고요. 어떤 영화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그림에 대해서, “저 사람이 쓴 글 때문에 안 보이던 아름다움 같은 걸 찰나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좋겠죠. 가령, 그림을 다시 봤을 때 제가 생각나시거나 어떤 배우의 눈빛을 봤을 때 제가 쓴 어떤 한 구절이 생각나시거나 그럼 굉장히 영광일 것 같아요. 뭐랄까, 내 느낌과 상대방의 느낌은 완전히 다른 건데 그게 아주 순간적으로 딱 부딪혀서 통하는 것 같은. 원래 사람은 안 통하는 건데, 아주 순간적으로 통할 때가 있잖아요.
아니면, 어떤 배우와 자신을 통하게 하는 끈이 무얼까 그건 모르겠는데 그 배우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다가 제 기사를 우연히 읽었는데 ‘아, 그래서 내가 얘한테 끌리는 거였구나’라고 자기감정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했다면… 전 그런 거 되게 좋아해요. 당신이 그래서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라고 제 글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었다면 그런 건 정말 기쁜 일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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