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원작으로 한 영화 ‘은교’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선정성 논란으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했지만 선정적인 장면은 영화의 흐름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일부 요소에 불과했다. 흥분과 긴장 없이 영화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동경과 질투의 감정으로 연결된 삼각관계
문학계의 거장인 노(老)시인 이적요(박해일)의 일상은 그의 이름처럼 적적하고 고요하다. 거울에 비친 시인의 몸은 인간이라면 비껴갈 수 없는 세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책상에는 현재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젊은 이적요의 모습이 담긴 소액자가 놓여 있어 지나간 젊음을 동경하는 그의 심리를 드러낸다. 무료한 시인의 일상에 열일곱 살의 싱그러운 소녀 은교(김고은)가 찾아오면서 그는 은교의 젊음에 순식간에 매혹된다.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김무열)는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시기한다. 시인의 조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문학인으로서의 성공을 꿈꾸지만 공대생 출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스승과 은교의 사이를 의심하면서 질투는 불타오른다.
은교는 우연한 기회에 이적요의 집에서 집안일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노시인과 친밀해진다. 어린 소녀지만 은교는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시인과의 짤막한 대화로 연필, 거울과 같은 사소한 사물이 사람에 따라 같은 사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시인과 은교는 물리적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작품세계를 통해 다가간다.
천의 얼굴 박해일과 산 속 이적요의 집
탄탄한 연기력과 선과 악이 공존하는 묘한 눈빛으로 ‘살인의 추억’, ‘이끼’, ‘최종병기 활’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빛나는 존재감을 보여줬던 배우 박해일. 영화 ‘은교’에서는 자신의 나이보다 두 배나 많은 노인의 표정과 몸짓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더구나 소녀를 만나 흔들리는 노인의 절제된 내면 연기와 무능한 젊은 제자에 대한 연민, 질투, 무시 등의 복합적인 감정 연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된 산 속 이적요의 집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시인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대변해준다. 이적요가 은교를 처음 만나는 현관 앞의 흔들의자는 집을 둘러싼 풍광과 햇살이 어우러져 은교의 싱그러운 자연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수천 권의 책과 손 때 묻은 소품,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가구 등으로 채워진 서재는 고요한 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이뤄지는 은교와 젊은 이적요의 사랑은 자연 배경과 어우러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역설
젊은 시절 나는 부모님의 일상과 가슴 속에 청춘과 로맨스는 없는 줄 알았다. 이제 내가 그 시절 부모님의 나이가 되고 보니 몸이 쇠하는 것과 비례해서 마음도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도는 달라지겠지만 나이 들어도 여전히 가슴속에 청춘과 열정은 살아있고, 어쩌면 정신적으로 더 아름답게 성숙해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노시인 이적요와 소녀 은교의 사랑은 서지우의 말처럼 추잡한 스캔들이나 불륜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에는 깊이 있는 내면의 심리와 서로의 위로가 담겨있어 아름답다. 이에 비해 서지우와 은교의 사랑은 본능에 이끌린 욕망의 충족일 뿐이라서 젊지만 추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원고 ‘은교’를 훔쳐 이상 문학상까지 받게 된 서지우의 시상식에서 이적요는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선이 리포터 sunnyy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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