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딸을 향한 엄마들의 고백

엄마가 그 때는 정말 미안했어!

초보엄마 시절을 돌아보면 아이에게 미안했던 순간들이 있기 마련

지역내일 2011-07-18

"태어난 순간부터 일곱 여덟 살 때까지 기억이 모두 생생하게 남아있다면 넌 아마 미안해서라도 엄마한테 함부로 못 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네가 내 행복인 걸." 많은 엄마들의 공감을 얻은 한 기업의 광고 카피이다.
하지만 엄마와 아들, 딸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함께 해온 사이이다 보니 어디 미안한 일이 아이에게만 있겠는가. 엄마들 역시 초보엄마 시절을 돌아보면 아이에게 미안했던 순간들이 있기 마련. 엄마 입장에서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사례들을 모아보았다.
"아들, 딸! 그때 일 엄마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해해줘."


딸의 거짓말을 한 번쯤 눈감아줄 수도 있었는데

어느새 엄마 아빠보다 더 커버린 딸은 우리 부부의 첫 아이이자 양쪽 부모님들에게는 첫 손녀로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워낙 야무지고 똑똑했기 때문에 한 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다.
딸의 양육을 위해 모든 일을 접은 나는 네 살 터울의 둘째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오로지 딸의 교육에만 마음을 쏟았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남편과 나는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늘 "친구와 싸우면 안 된다", "거짓말 하면 안 된다"라며 ''안 된다'' 시리즈를 강조했다. 그렇게 키우는 것이 부모의 참 역할인줄만 알고.
어느 듯 중학생이 된 딸은 다행히 우리 부부의 바람대로 예의 바르고 학교와 학원밖에 모르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거짓말을 하는 사건(?)이 터졌다. 방과 후에 간식을 먹고 논술학원으로 간 딸이 충분히 도착했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강사의 연락이 온 것이다. 수업시작 시간이 15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란 나는 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았다. 잠시 후에 전화를 건 딸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묻는 내 말에 "지하철을 거꾸로 타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변명을 했다. 친구들과 잠시 놀다가 시간을 놓친 거였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 그럴 수도 있으련만 그 때의 나는 그 걸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엄마였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아이는 처음으로 학원에 30분 정도 지각을 했다. 문제는 화난 마음에 내가 아이에게 "네가 거짓말 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집에 들어 올 생각 하지 마"라고 내뱉은 거다. 전형적인 첫 아이 성격인 딸은 융통성 없이 정말로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휴대폰도 꺼져있는 게 아닌가. 놀라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날 무렵 딸은 눈치를 보며 겨우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못 들어 왔다며.
그냥 한 번쯤 눈감아 주거나 따끔하게 혼내고 말았어도 될 일인데 나는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남편을 시켜 회초리를 들게 했다. 그 때까지 딸에게 큰 소리 한 번 친 적도 없었던 남편은 내 강요에 떨리는 손으로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지금도 그 때의 가슴 아팠던 순간을 두고두고 얘기한다.
사춘기 증상도 단순히 제 방문 잠그고 혼자 있는 것으로 넘길 정도로 무던한 딸이었는데 거짓말 한 번 한 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이라고 그 난리를 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딸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딸을 키우면서 좌충우돌 끝에 체득한 지혜로 둘째인 아들에게는 어느 정도 너그러운 엄마가 됐으니 우리 딸이 엄마에게 일종의 ''선생님'' 역할을 한 셈이다.
"사랑하는 우리 공주, 엄마도 그 때는 풋내기 엄마라 정말 미안했어. 용서해 줄 거지?"



오해받는 아들을 의심했던 결벽증 엄마


지난 해 봄 어느 날 자정 무렵,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아들이 전화를 했다. 수화기 저쪽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특목고에 진학해 2학년이 된 아들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해 성적이 우수하고 교우관계도 좋았다. 그 덕분에 부모가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이따금 아이가 밤늦게 전화할 때가 있기는 했다. 몸이 아픈 경우였다.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들이 친구에게 도둑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아들은 수학을 풀다가 각도기가 필요해서 친구 A의 방에 가서 각도기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그 방에서 돈 1만원이 없어졌다. 그 돈은 A의 룸메이트인 B가 기숙사의 책 속에 넣어둔 것이다. B는 제 방에 드나든 출입자를 찾기 위해 사감과 함께 CCTV를 돌렸다. 찍힌 사람은 A와 아들 둘뿐이었다. 그런데 A는 방의 주인이니 아들만 외부인인 셈이었다. B는 그 결과를 아들에게 알려주면서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냐"는 식으로 물었다고 한다.


나는 아이를 믿었다. 평소 아이는 돈이나 물건에 관심이 없었다. 길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고 지나쳤다. 잃어버린 건 수두룩하지만 남의 것을 가져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내 자식을 어찌 다 알겠는가. ''만에 하나'' 남의 돈에 손을 댔다면 이만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억울하다는 아이한테 되레 추궁하듯이 캐묻고 말았다.


엄마가 사 준 각도기는 어쩌고 친구 걸 빌리느냐, 빌리기 전에 친구한테 허락은 받았냐, 다 썼으면 바로 친구 방에 가져다 뒀냐, 돈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도 이런 것으로 오해받는 것 자체가 큰 오점이다 등의 잔소리는 "내일 학생과에서 부르면 있는 그대로 얘기해라"로 끝을 맺었다. "기숙사에서는 평소 네 것, 내 것 구별 없이 가져다 쓴다. 남자 애들이 누가 그런 걸 일일이 허락 받나, 내 물건도 친구들이 가져가서 없어진 거 많다"는 아이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행히 그 일은 별 탈 없이 무마되었다. CCTV만으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게 학생과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 놈의 ''만에 하나''가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몇 달 후 여름방학이 되었다. 아이의 기숙사 짐이 집으로 배달됐다. 짐을 정리하던 나는 용도가 불분명한 노트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아들의 일기였다. 거기에는 단 이틀 치의 일기만 쓰여 있었다.


아들이 난생 처음 쓴 일기는 도둑으로 몰렸던 그 날 너무나 억울했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글자마다 눈물이 배어있는 듯한 일기를 읽으며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제야 아이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보다는 그 동안 아들을 터무니없이 의심했다는 죄책감이 더 컸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이다. 



 공부 안하는 아들, 무조건 문제아로 몰아


아들이 군에 입대한 지 1년이 돼간다. 요즘처럼 시국이 흉흉한 때 당당히 육군에 입대해 잘 적응하고 있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하지만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넌 군대 가서 고생 좀 해봐야 해!"라고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붓곤 했다.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은 방학이면 집에 와있으면서 일주일이면 서너 번 밤 외출을 했다. 미국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가 한국의 다양한 밤 문화에 흠뻑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중학교 때 만났던 그 나쁜 놈들 다시 만나는 것 아냐!" 드디어 남편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내질렀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아들아이는 미국에서 4년을 살다가 6학년 2학기 때 강남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공부가 장난이 아니었다. 공부를 따라가기는 힘들었지만 왕따 안당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부 안하는 친구들, 소위 좀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국어가 시급해서 논술학원에 보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이가 오지 않았다. 그 당시 남자 아이들의 놀이문화는 게임방 아니면 PC방이었다. 휴대전화도 없을 때여서 아이가 늦게까지 오지 않으면 주변의 게임방이나 PC방을 샅샅이 뒤지는 게 일이었다. 가볼만한 곳은 다 가봤는데 찾지 못했다. 밤 9시쯤 귀가한 아이는 "엄마가 모르는 다른 PC방에 갔었다"며 그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고 실토했다.


평소에도 아빠를 무서워했던 아이는 걔네들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아들의 눈치를 보니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남편과 상의했더니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 앞에 가보자고 했다. 우리 부부는 학원 앞 주차장에 숨어서 아들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그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아파트 놀이터로 가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우리가 염려했던 어떤 비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녁 무렵 놀이터에서 무리지어 배회하는 것 자체로도 남편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남편은 현장으로 뛰어들어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취조하듯이 야단을 치고 훈계를 늘어놓았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내 아들이건 남의 아들이건 모두 문제아''라는 식이었다. 아이는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빠한테 화가 난다고 한다. 한국생활에 적응 못하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의리 있는 친구들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야단을 쳤으니 아빠가 야속하다는 것이다. 지금 그 아이들은 군대에 가 있거나 대학생이 되어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어른들의 잣대로 아이들을 함부로 저울질하고, 편견과 아집으로 상처를 줬던 그때를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엄마의 욕심으로 오히려 공부에 흥미를 잃게 했다. 미안하다 아들아!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모 욕심이 앞설 때가 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부를 밀어붙이다 보면 아이도 지치고 부모도 지친다.


2년 전 일이다. 남편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던 우리 가족은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중에 귀국했다. 미국에서야 학교 갔다 오면 아파트 친구들과 마냥 뛰어놀기 때문에 노는 게 일상이 되다시피 했던 열 살 아들, 엄마는 한국에 도착해 안정을 취하기가 무섭게 아이를 학습의 바다에 풍덩 던져 놓았다. 지금까지 2년 동안의 공백을 일순간에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아들은 힘들었지만 엄마의 강압에 못 이겨 따라오는 시늉을 했다. 학교 적응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설상가상으로 전학 와서 20여일 만에 기말고사가 닥쳤다. 엊그제 사귄 아들의 반 친구 엄마의 말이 귀국 엄마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대부분 100점 아니면 90점 이상이래"


귀국 엄마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아이를 책상 앞에 앉게 했다. 금방 서점에서 사온 전과목 문제집을 펼쳐들고 시험공부를 시키는데 오히려 엄마가 완전 수험생 모드였다.  아이가 정해진 분량을 못 풀면 자정이 넘어도 잠을 재우지 않았다. 물론 아이는 기말 고사에서 귀국 엄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점수를 받아왔다. 엄마는 더 욕심이 생겼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문제없겠어''라고 생각하며 한층 더 세게 고삐를 잡아 쥐었다. 수학에 약한 아이를 가르치다 지쳐선 일요일 날 남편까지 아이를 가르치게 했다.


불만이 쌓이면 언젠가는 터지는 법, 공부 스트레스를 못이긴 아이는 새 학년이 되면서 거세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아이와의 부대낌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던 어느 날 엄마는 그제야 지난날을 돌아보게 됐다. 모두 엄마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귀국 엄마는 그제야 공부를 놓아야 엄마도 살고 아이도 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아들을 대상으로 도를 닦기 시작했고 공부를 놓으면 죽을 것 같았던 그 마음도 내려놓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공부 못해도 괜찮아'' 라고 받아들이자 아이와의 관계가 급물살을 탄 듯 좋아졌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빨개진다. 어리석은 엄마의 욕심으로 아이에게 큰 상처를 주었기에.


"아들아, 그때 너무 힘들었지. 공부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는 것이란 걸 그 때는 몰랐어. 어리석었던 엄마를 용서하렴, 미안하다 아들아. 사랑해."



엄마가 힘들어도 욕심 부려 볼 걸 정말 미안해


첫 애를 키우면서 난 내 아이가 천재인줄 알았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쉽게 이해했으며 아이의 열정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이렇게 잘난 딸은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한다는 근거 없는 사명감에 불탔다. 항상 아이를 크게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뒷바라지를 했지만 결과는 늘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랄수록 지능은 좋은 편이나 천재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내 자신이 천재를 키우는 엄마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엄마 때문에 내 아이는 늘 힘들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욕심이고 그 욕심은 아이를 망친다는 사실을.
그래서 첫 애와 나이 차이가 많은 작은 애한테는 일체의 욕심을 버리고 기본에 충실하며 아이의 수준에 맞게 키웠다. 안정추구와 실속을 모토로 무리수도 두지 않았고 허튼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육적으로 내실을 기하며 필요한 부분에는 더 충실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마지막 순간에 이 아이가 남들이 감탄할 만한 성과를 터트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약삭빠른 엄마로 거듭났다.
아이는 착실히 공부했고 덕분에 나도 마음 편히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는 경쟁력이 없었다. 열정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고 나약한 모습도 보였다.
이런 아이를 보고 난 혼란에 빠졌다. 마침 그때 엄마의 욕심에 시달렸던 큰 아이가 "어렸을 때는 엄마의 목표가 매번 높아지는 것이 싫었고 부담스러웠지만, 그 목표를 향해 순간순간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던 경험이 클수록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 말에 기쁘기는커녕 만감이 교차하며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큰 애한테 욕심 부린 것이 잘못이라 생각돼 작은 아이는 욕심 없이 키웠는데 이것이 잘못된 판단인가. 결국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 편하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자식 둘을 키우면서 아직도 부모로서의 최선과 욕심을 구별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최선이든 욕심이든 극성을 떨며 키운 자식의 대학 진학 성적이 더 좋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나중에 누가 더 행복하게 살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욕심 없이 키운 작은 애한테 미안하다. 엄마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으로. 



일하는 엄마라서 미안해

일하는 엄마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이에게 미안한 일을 치르게 마련이다. 그게 무엇이든 아이가 원할 때 맘껏 해줄 수 없다는 부채감은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날 때까지 온갖 자책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고 한 달 쯤 학교를 다닌 후였다. 어느 수업시간. 엄격한 선생님이 무서워서였는지, 등·하교 길에 엄마의 손을 잡고 오는 친구들 모습에 화가 났던 건지, 그도 아니면 엄마가 달려올 수밖에 없는 응급 상황을 만들고 싶었던 건지 아이에게 갑자기 복통이 찾아왔다.
선생님은 전화를 해서 아이를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일터에서 갑자기 조퇴를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좌불안석, 노심초사.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지경이 됐다. 다행히 시어머님이 학교로 달려가 주셔서 아이의 안부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팔순이 다 된 노모는 배가 너무 아파 새우등처럼 고부라져 자꾸만 길에 주저앉는 아이를 집까지 데려올 능력이 없었다.
아파트와 학교뿐인 동네라 지나가는 택시조차 없었고, 할머니가 부축하기엔 1학년이어도 손자의 몸은 무거웠다. 게다가 아이는 무거운 책가방에 신발주머니까지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팔순의 노모는 아픈 손자와 기력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거리에 환자 둘이 서 있는 것과 같았다. 그 순간 아이의 맘속에 얼마나 많은 원망과 미움이 솟아올랐을까. ?
시간이 지나도 아이가 낫질 않자 할머니는 특단의 결심을 했다. 지나가는 승용차를 붙잡기로 한 것이었다.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불가능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한 남자분이 차를 세워주셨다고 했다. 아마도 당신의 아이가 어딘가에서 아파 힘들어할 때 누구라도 엄마 대신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길 바라면서 가든 길을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응급 약을 먹고, 핫 팩을 대고 깊은 잠을 두어 시간 잔 후에야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정작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는 편안해져 있었다. 마음이 놓이면서도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날 아이가 아팠던 건 정말 배였을까. 늘 혼자였어야 하는 외로운 마음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아들아, 끊어질 것처럼 아픈 배를 잡고 길바닥에 누운 너에게 달려가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어린 너의 첫 사회생활인 초등학교 1학년 3월을 그렇게 혼자 견디게 해서 엄마가 정말,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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