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꽃들이 만발한 봄의 향기를 느끼기도 전에 우리는 카이스트 교수의 자살이라는 우울한 소식을 접했다. 최근 네 명의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에 이어진 교수의 자살은 교육계를 들썩이게 했고 학점 미달에 따른 징벌식 등록금과 영어수업 등 카이스트의 강압적인 개혁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진정한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창의적인 과학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서남표 총장의 야심과 개혁의지는 이번 자살사태로 칭송의 대상에서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원인에 집착하다보면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소통 없는 교육제도의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는 또 다른 ''한스''들이 비단 카이스트 학생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교육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부모가 없을 것이다. 특히 교육열이 가장 뜨겁다고 할 수 있는 강남은 모든 생활이 교육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남에는 처음부터 강남에 거주한 가정도 있겠지만 교육을 목적으로 빠르게는 자녀가 초등 저학년 때, 늦게는 고등학교 때 이주해 온 가정이 제법 많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자녀가 공부에 싹수가 보인다고 판단돼 좀 더 경쟁적인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우리나라 유수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자 하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강남에서 학교를 보내고 나면 그 다음은 불안과 갈등의 연속은 아닌지. 지나치게 어려운 내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좌절하는 아이, 돈 있고 학원 많은 환경에서 공부 못하는 자녀를 이해 못하는 아버지, 어떻게든 아이의 성적을 끌어 올리려고 사교육의 거리를 동분서주하는 어머니, 가족 구성원들은 어느새 방향을 잃고 모두 제각각 소통을 회피한 채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며칠 간격으로 아파트 벽을 타고 들리는 아이와 부모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싸움이 이를 대변해준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그럼, 이러한 현상의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부모들의 일그러진 지나친 교육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같은 부모 입장에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교육제도 측면에서 보면 고등학교까지 우리의 공교육 시스템과 교육과정이 그다지 창의적이거나 자기 주도적이지 않은데 반해 대학입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입시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글로벌 창의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고등학교 입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공교육과 사교육의 수레바퀴에 끼어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사고의 깊이가 생길 수 있을까.
다음으로는 아이들의 나약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려서부터 과도한 공부로 시달리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지나치게 과보호 하는데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의 지시와 각본에 따라 살다보니 혼자 떨어졌을 때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 나가지 못한다. 살다보면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이 때 깊이 있고 유연한 사고가 요구된다. 하지만 공부일변도와 과보호로 양육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사고의 깊이와 유연성은 싹트기 힘들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쉽게 ''포기''를 선택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소통의 부재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풍요와 디지털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빈곤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뤄야했던 기성세대와는 의식 자체가 다르다.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언제나 주어져 노력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의식도 약할 뿐 아니라 원하는 것에 빠르게 반응하는 디지털은 아이들에게 기다림의 미덕을 심어주지 못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잣대로 소통하길 원하고 아이들은 아이들의 잣대로 소통하길 원하다.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예전과 달리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기반 사회는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생성해 공부의 양과 질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유통기간도 짧아졌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시대도 아닌 것이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와 절실함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니 아이들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 끊임없이 접하게 되는 자살 소식,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설마, 내 아이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우리의 아이들은 지극히 충동적이다. 마음을 열고 아이들과 소통을 시도해야하는 이유이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몇 구절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본다.
이선이 리포터 sunnyy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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