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이 바빠서 혹은 아이들 교육시키느라 정신이 없어서 부모님을 잊고 지내는 날들이 점점 늘어간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이유들은 부모님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자식들의 어리석은 핑계임을 모른 채 지낸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각 가정의 작지만 기특한 효도법에 대해 들어보았다. 늘 "우리는 잘 있다. 바쁠텐데 너희들이나 건강하게 잘 지내렴" 이라고 하시며 되레 자식들 걱정부터 앞세우시는 부모님. 더 늦기 전에 그 귀한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기회를 가져야하지 않을까.
손자, 손녀의 효도로 더 큰 즐거움 드려
양쪽 부모님께서 모두 멀리 계시는 바람에 명절이나 여름휴가, 집안 행사가 있을 때나 찾아뵙는 형편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명절 전후로 여유 있게 시댁이나 친정에서 지내다 오곤 했었다. 하지만 큰 아이가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명절 때조차 학원과 학교시험 스케줄에 맞춰 쫓기듯이 다녀오기 일쑤였다. 항상 "아이들 공부가 먼저지" 하시며 이해해주시지만 섭섭하실 그 마음을 알기에 돌아오는 길이 결코 편하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가족 나름의 작은 효도법은 있다. 바로 아이들을 통해 즐거움을 드리는 것이다. 첫 손녀인 큰 아이는 네 살 무렵 동생이 태어나기 전후로 두 달간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공주처럼 사랑을 독차지하며 지낸 적이 있다. 아이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부터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릴 때 우리 부부는 최대한 짧게 인사를 마치고 아이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도록 시켰다.
워낙 다부지게 말을 잘하는데다가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정이 깊은 터라 아이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조잘조잘 보고를 했다. 그럴 때마다 수화기 너머로 부모님의 즐거운 웃음이 넘쳐흘렀음은 물론이다. 둘째인 아들이 말을 막 시작할 무렵부터는 둘이서 교대로 안부전화를 드리도록 했다. 그랬더니 중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드린다. 요즘은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의 건강까지 챙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아이들이 학급 임원이 되거나 1등을 했을 때 등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알려드리는 것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어느새 남편이 승진했다는 소식보다 이런저런 아이들의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때 더 반가워하시니 말이다. 물론 그때마다 칭찬과 더불어 용돈까지 듬뿍 보내주시는 것이 부모님의 즐거움이다. 처음에는 큰 자랑거리도 아닌데 용돈을 보내시니 오히려 폐를 끼쳐드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도 됐었다. 하지만 손자 손녀를 위해 은행으로 달려가시는 것 자체가 부모님들께는 큰 낙이라는 생각에 아이들과 우리 부부의 효도법은 계속되고 있다.
부모님 모시고 노래방에 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는 그저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여든이 넘으신 부모님이 아직도 건강하신 것은 물론 자식들의 도움 없이도 당당하게 잘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집근처 한강변에 나가 운동하시고, 여러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면서 활기찬 노년을 보내는 부모님을 뵈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우리가 자랄 때에는 나라 전체가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부모님의 사랑과 성실, 근면함 속에서 우리 4남매는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각 분야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명절이나 생신, 어버이날 등에 선물이나 용돈을 챙겨 드리면 그것마저 손주들 용돈으로 되돌려주시고, 요즘 같은 고물가시대에 아이들 키우면서 가정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부모님. 때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고민하다가 매월 셋째 주 목요일을 ''삼목회''로 정하고 아예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었다.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제외한 남동생 둘과 나, 부모님 이렇게 다섯 명이 정회원이다. 사위와 며느리 둘은 아이들 때문에 저녁시간에 외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비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저녁식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들은 옛날 어렸을 적 얘기로 꽃을 피운다. 사소한 일로 형제끼리 싸우다가 부모님께 야단맞았던 얘기, 유난히 아들만을 챙겼던 친정엄마, 그래서 섭섭했다는 등 추억담을 늘어놓다보면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 다음 코스는 노래방. "우리 같은 노인네가 그런 데를 어떻게 가냐"고 거절하시던 부모님은 막상 그 자리에 가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우리 역시 부모님 시대에 유행했던 흘러간 가요들을 불러드린다. 노래교실에서 배운 실력을 뽐내시는 어머니, 구순이 다 돼 가시는 아버지의 18번 ''황성옛터''의 서글픈 곡조는 우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가끔은 일이 생겨 요일이나 날짜를 변경하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의 ''삼목회''는 별 탈 없이 3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자식들이 바쁠까봐 혹은 경비가 많이 들까 싶어 "매달 모이는 이 모임이 부담스럽지 않냐"고 물어보시는 부모님. 그래도 그날이 되면 "이번엔 어디서 모이느냐"며 기다리시는 부모님.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말벗이 돼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효도인 것 같다.
홀로 계신 엄마 생각하며 오늘도 엄마에게 갑니다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딸 부잣집이다. 부모님은 딸만 다섯을 낳았고, 나는 그중 넷째이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올해 여든이 된 엄마는 20년을 혼자 살고 계신다. 지금은 언니들뿐 아니라 동생들까지 다 결혼해서 다섯 자매 모두 가정을 꾸리고 있다. 서로 나이 차이가 많아서 그런지 우리 다섯 자매에게서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엄마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다.
아마 다섯 자매 마음속에는 엄마, 아버지가 아들 없는 설움 따위는 느끼지 않게 하겠다는 의연한 결의가 내재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큰 언니는 큰 언니대로 맏이로서 아픈 엄마의 병수발을 다할 정도로 효녀라면 효녀이고, 다른 언니와 동생들도 각자 처한 상황에 맞춰 경제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진심을 다한다.
사실 나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다. 늘 이성적인 엄마보다는 앞뒤 재지 않고 내편이 돼주는 아빠가 좋았다. 오히려 늘 엄마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좀체 엄마에게선 내가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나도 엄마가 됐다. 엄마는 딸들이 사는 서울에 자주 올라오긴 했지만 고향에 머물기를 원했다. 친구들은 많았지만 뭐든 혼자 하는 것을 즐기셨다. 영화도 혼자 보고 운동도 혼자 다녔다. 어느 날 불현듯 엄마에게서 나를 보았다. 무엇이든 혼자 즐기는 엄마는 바로 나였다. 그 즈음 몸이 편찮아서 서울에 올라왔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셨다. ''가엾은 우리 엄마, 아무도 없는 빈집에 홀로 누워계시면 얼마나 외로울까''. 돌아보니 늘 바쁜 일상에 치여 지금까지 엄마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본 적이 없었다.
생각만 하다 뒤늦은 후회를 하기보다 실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설득해서 직장일이 마무리되는 금요일 밤이면 비행기를 타고 엄마가 있는 섬으로 달려갔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 내가 한 것은 고작 엄마 옆에 있어 주는 게 다였다. 엄마가 하는 얘기 귀담아 들어주고 시장에 가면 시장에 따라가고, 운동가면 나도 따라 나섰다. 결혼 전 아침에 나갔다 퇴근해서 집에 온 딸처럼 그렇게 6개월여를 주말이면 엄마와 함께 했다.
처음에 엄마는 내가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돈 낭비한다고 나무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말이면 비행기를 탔다. 엄마의 진심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주기적으로 찾아뵙자 엄마는 어느 날부터는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성화를 부리셨던 엄마가 어느 날은 "몇 시에 오니?"라고 물어 오는 것이다.
요즘 나는 엄마도 어머니이기에 앞서 한 여자이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에게 엄마는 영원히 어머니일 것 같지만 자식들을 다 떠나보내고 빈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도 연약한 한 인간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엄마가 얼마나 심심할까?'' 생각하며 전화를 건다.
손녀가 건네는 작은 용돈이 큰 감동으로 변신
''자식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란 설문에 현금이라고 답한 부모가 가장 많았다는 결과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선물로 돈이 가장 성의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받는 입장에선 절대 아니다.
나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당시 여든이 넘으셨던 할아버지께 선물을 사드릴까 용돈으로 드릴까 망설이다 봉투에 넣어 돈을 드렸다. 큰돈도 아니었는데 할아버지는 기쁘다 못해 울컥해 하시던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직 내가 손녀에게 돈을 받아보지 못해 그때 할아버지가 얼마가 기뻐하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도 자식에게 선물을 받아보면 어렴풋이 짐작이 되기도 한다.
어느덧 내 자식도 대학생이 됐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대학생 정도면 충분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용돈을 드릴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 딸아이에게 처음 번 돈의 일부를 그분들께 용돈으로 드리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분들께 물심양면으로 사랑만 받던 딸아이는 왜 드려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엄마로부터 이런 저런 회유와 특혜(?)를 약속받은 딸아이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제가 번 돈입니다. 나중에 많이 벌면 더 많이 드릴께요"라고 말하며 친가와 외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용돈을 건넸다. "아니 네가 돈을 벌 만큼 다 컸구나" "이렇게 어렵게 번 돈을 내가 어떻게 그냥 받냐"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럽다" "어미나 애비가 준 돈 보다 백배 천배 고맙다" "내 당장 자랑할거다" 등 반응은 매우 다채로웠다.
딸아이는 그분들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감격해 하시는 모습을 보고 "용돈 드리기를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그 뒤로 아이는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에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자연스레 포함되었다.
4년 뒤에 작은 딸아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똑 같은 절차를 밟아 그 분들께 용돈을 드렸다. 이미 한 번 경험하셨는데도 그 감격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하는 모양이다. 손녀가 그 돈을 벌기위해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고 가슴 아파하며 고맙게 받으시는 그분들의 모습에 작은 아이도 숙연해 지는 눈치다.
내 자식들이 작은 효도로 내 부모님께 기쁨을 드린 걸 생각하면 나는 이루말로 표현할 수 없이 흐뭇하다. 전에 내가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을 때 나는 단지 할아버지께만 효도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나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내 부모님에게도 효도를 한 셈이었다.
손자 손녀가 조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실천할 수 있는 효도이다. 내 아이들이 다 컸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만 한 일이다.
마음을 달래는 소소한 일상 보고
시어머니와 함께 산지 13년. 아이들과 난 어떤 효도를 하고 살았나 돌아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해드린 것이 없다. 큰 용돈을 드려본 적도 없고, 그 흔한 해외여행도 보내드린 적이 없다. 오히려 아이들을 함께 키우느라 할머니가 될 시간이 없으실 정도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그렇게 일상의 매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어머님께 해드릴 수 있는 작은 효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와 아이들은 할머니께 매일 매일의 생활을 보고하며 산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고, 오늘은 어떤 일로 바쁘고, 내일은 어떤 큰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방금 전에 한 통화는 어떤 내용이고, 지금부터는 어떤 내용의 전화 통화를 할 예정인지, 컴퓨터를 켜는 이유는 오락 때문인지 숙제 때문인지 일일이 말씀 드린다. 선생님과 아이들 상담은 어떤 내용으로 했는지, 아이들의 성적은 어떻게 리듬을 타고 있는지, 아이들의 친구문제나 고민은 무엇인지 함께 알고 함께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께서도 집안에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느끼고 계신 것 같다.
철통같이 사수하시는 아침밥 문화도 어머님의 굳은 의지로 시행되고 있고, 아이들을 훈계해야할지 다독여야 할지 매순간 달라지는 고민들도 어머님은 현명하게 판단을 내려 주신다. 아이들을 통해 보내는 학교 선생님의 의도를 못 읽어 고민스러울 때도 어머님의 오랜 경험은 늘 천리 앞을 내다보시고, 기가 막힌 재활용 노하우와 살림솜씨는 손자소녀의 입에서 경탄의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아이들의 환호성에 어머님의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아이들에게 슬슬 사춘기가 찾아오고,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얘기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을 엄히 다스려 할머니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일은 내 몫이다. 어버이날의 카네이션보다, 생일날의 화려한 케이크 보다 늘 곁에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상의 소소한 보고들이 우리 집의 가장 중요한 효도 아이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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