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인구가 늘어나면서 시니어들은 남은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심한다. 언제부턴가는 ''황혼 이혼''과 더불어 ''황혼 재혼''이라는 새로운 풍속도도 생겨나고 있다. 노년의 사랑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풍요로운 노년을 보내는 비결에는 ''육체적으로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포함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성에 정년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결혼정보회사 관계자는 "실제 황혼 이혼자 중 과반 수 이상이 재혼을 희망하지만 자녀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며 자녀들이 조금만 더 적극적인 자세로 부모님을 배려한다면 황혼의 사랑도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아름다운 황혼의 로맨스를 꿈꾸는 시니어들의 감춰진 속내를 들여다보자.
정리 김선미 리포터
실패로 끝난 미국교포와의 만남
40대 후반, 어느 봄날이었다. 평소처럼 남편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길에 나섰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정리를 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정적을 깨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회사원이던 남편이 사무실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다급한 동료직원의 전화였다. 달려가 보니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심장마비였다. 그렇게 남편은 한마디 말도 없이 황망히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하나 뿐인 딸아이를 키우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나마 남편직장에서 나오는 연금과 장학금 덕분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외동딸마저 결혼시킨 후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상실감에다 갱년기 증세까지 겹쳐 몹시 힘든 상태였다. 주위에서 "딸도 결혼했으니 이제는 좋은 사람 만나 외롭지 않게 노후를 보내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런 권유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 지인의 소개로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60대 초반의 교포와 맞선을 보았다.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근교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그는 7년 전 부인과 사별했고, 남매인 아이들은 뉴욕에서 대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안정적인 생활에다 매너까지 좋은 그 남자와 곧 사랑에 빠졌다. 내가 받고 있는 연금문제 등으로 혼인신고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우리는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고, 막연히 꿈꾸던 미국생활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산처럼 쌓여있는 더러운 세탁물들이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이어지는 세탁소 일은 말도 통하지 않은데다 총기사고 등이 자주 일어나는 위험한 지역이어서 나를 더욱 고달프게 했다. 또한 서툰 솜씨로 세탁소에 맡겨진 옷들을 수선까지 해야 했다. 남편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세탁하는 것보다 수선을 해야 돈이 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이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새로운 사람과 여행도 다니면서 알콩달콩 살고 싶었는데···''. 시카고에 도착한 다음부터 끝없이 갈등 했다. 남편은 수입의 대부분을 뉴욕에서 음악과 미술공부를 하는 자녀들에게 쏟아 부었다. 3년을 그렇게 살면서 흩어진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헤어지는데 복잡한 법적 절차는 필요 없었다.
외로운 노후를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다. 나이 들어 또 다른 배우자를 만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혼인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꿈꾼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이순재씨와 전양자씨가 그려내던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언젠가는 내게도 찾아오리라는 것을.
-서초구 반포동 이 모(여, 58)씨
이 나이에 밤이 외롭다면 주책인가요?
나는 60대 초반의 남자다. 세 살 연하인 아내는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지만 글쓰기를 좋아해 두 권의 수필집을 내기도 했던 감성이 풍부한 여자였다. 약국을 경영하면서도 자식들까지 잘 키워준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아내는 젊었을 때부터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피부가 하얗고 마른체격에 말수도 적은 편이었지만 나는 그런 아내의 모습에 반해 밤낮으로 쫓아다녔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성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한창때인 나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자주 요구했고, 아내는 피곤하다거나 아이들 핑계를 대면서 거부했다. 결혼 후 8년째 되던 해, 우리 부부는 홀로 되신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일하는 며느리도 도와줄 겸 어머니의 적적함도 달래 드릴 겸 내린 결정이었다. 그 전에는 그나마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관계를 가졌는데 어머니가 오시고부터는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내 욕심 채우자고 자꾸 보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생리적인 욕구를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러다 50대 초반에 아내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로 우리 집안은 하루아침에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암과의 사투를 벌이며 살얼음판을 걷듯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결국 아내를 괴롭히던 암은 인파선 등 여러 곳으로 전이돼 발병 3년 만에 아내는 가족 곁을 떠났다. 고등학생이던 아이들은 엄마가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자라 대학에 진학했다. 할머니의 지극정성이 있어 엄마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아내가 떠난 지 6년이 되던 해, 아들 하나를 키우던 50대 초반의 여성과 재혼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먼저 간 아내에게는 너무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새 인생을 얻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적으로 잘 맞았다. 저녁을 먹고 나선 양재천에 나가 산책을 했고, 시간이 날 때면 주변의 산을 비롯해 전국의 산을 찾아 다녔다. 오랜 금욕생활(?)로 나의 성적능력이 저하되지는 않았는지 내심 염려했지만 새 파트너를 만남으로써 삶의 의욕이 넘쳐난다고나 할까.
새롭게 맞은 아내는 같이 길을 걸을 때나 TV를 볼 때, 가벼운 스킨십을 하면서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혼자된 주위 어르신들에게 재혼을 적극 권하고 싶다. 재혼이 힘들면 이성 친구라도 사귀어야 한다고 말한다. 육체적인 문제뿐 아니라 누군가를 의지하면서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가 남은 인생을 더욱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거듭 강조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 홀로 된 노년들의 쓸쓸한 삶에도 새 희망의 꽃이 피어나길 소망해본다.
-강남구 개포동 안 모(남, 62)씨
재혼으로 안정적인 노후생활 보내
10여 년 전 아내와 사별했다. 일밖에 모르고 산 나를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마다않던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니 그 빈자리가 너무 컸다. 갑자기 큰 아들네와 살림을 합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 지내려니 외로움은 둘째치더라도 당장 집안일부터가 문제였다. 할 수없이 매일 아침 며느리가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내 끼니를 챙기고 살림까지 대신해주었고 딸들도 돌아가며 나를 챙기기에 바빴다. 비록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지만 까다로운 내 성격 탓에 남에게 집안일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생활이 하루하루 계속되면서 며느리도 점점 지쳐갔고 그로 인해 아들과 다툼이 잦은 눈치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자니 내 마음도 결코 편치가 않았다. 어느새 내가 아이들에게 짐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서글픈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먼저 간 아내와 분위기가 너무나도 비슷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을 했다.
딸들은 평생 고생만 하다가 제대로 여유도 누리지 못한 채 떠난 엄마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며느리 역시 두 집 살림을 해야 하는 부담은 덜었지만 새시어머니를 어떻게 대하고 모셔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 물론 자식들 모두 내가 가진 재산에 대한 우려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사별한 아내가 나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던 만큼 자식들도 아버지를 어려워해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자식들과 며느리의 눈치를 애써 외면하고 살았다.
어렵게 재혼을 결정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아내와 함께 국내외 여행도 많이 다니고 친구들 부부동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나가면서 전혀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다. 게다가 싹싹한 새 아내가 집안사람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아무리 자식들이 혼자 된 아버지를 잘 챙긴다고 해도 늘 곁에 있어주는 아내만 하겠는가.
무엇보다 건강이 좋지 않을 때 한창 바쁜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바로 도움 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서로 든든하다.
-서초구 서초동 강 모(75, 남)
딸들의 반대로 10년 만에 이뤄진 재혼
38세 되던 해에 남편과 이혼했다. 남들은 아이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결혼생활의 참맛을 알아갈 그런 시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듭되는 남편의 여자문제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언뜻 보면 연예인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호남형인 남편은 그런 외모 때문에 주위에 여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남편은 동대문시장에서 의류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남편의 외모에 반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겠다고 나섰으니 그 당시 친정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죄송한 마음뿐이다. 이혼 후, 나는 서초구 양재동 한 학교 앞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며 꽤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런대로 재테크도 잘 해 작은 평수이긴 하지만 아파트도 두 채나 마련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골프를 막 배우기 시작할 무렵, 집 근처 골프연습장에서 한 남성을 만났다. 일곱 살 연상에 공무원인 그는 상처한지 3년째 되었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됐고,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시작했다.
5년쯤 지났을 때 그는 "딸들이 엄마를 아직도 못 잊고 재혼을 반대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또다시 5년이 흘렀다. 그동안 딸 둘은 모두 결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결혼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즈음 우리 아들도 결혼했다. 두 딸들은 고인이 지내던 방과 옷가지, 유품 등을 그대로 간직하기를 원했고, 명절 때나 기일에 제사를 지내면서는 "엄마를 절대 배신하면 안 된다"고 아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자식들의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들의 지나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했다. 행여나 내 아들이 자식(?) 노릇 하겠다고 나서면 어쩌나, 아니면 그나마 있는 아빠의 재산을 뺏기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헤어지자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는 절대로 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전남편에게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이 남자와 나누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바람만큼 우리의 결합으로 인해 파생될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 시간들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작년 가을, 우리는 만난 지 10여 년 만에 드디어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집도 이사하고 신혼방도 꾸몄다. 다정한 남편은 "그동안의 시간들을 보상해 주겠다"면서 나를 많이 아껴준다. 하지만 지난 설날에 찾아온 남편의 딸들이 또 다시 내 속을 뒤집는 바람에 나는 내 팔자를 원망하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어머니로 받아주겠지''라고 위안 삼아 보지만 그런 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아 그저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서초구 서초동 김 모(여, 55)씨
쿨~하게 만나기로 했지만 아쉬움 남아
"나이 들수록 즐겁게 운동해야한다"는 오랜 친구의 권유로 문화센터의 노인 댄스교실에 발을 들인지가 벌써 2년이 됐다. 처음엔 상처한 홀아비가 다 늙어서 주책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친구를 따라갔는데 한두 달 다니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 보니 운동도 되고 시들었던 나의 삶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3년 동안 나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듯 살다가 댄스교실에서 친해진 다섯 살 연하의 ''여친''(할멈이라고 하면 그녀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은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10년 전 남편을 잃은 그녀는 막내딸까지 모두 출가시킨 다음부터 여행도 다니고 댄스교실도 다니며 활기차게 살고 있었다.
처음엔 댄스교실 파트너로만 만나다 점점 친해져 모임이 없는 날에는 가끔 따로 만나 식사도 하고 산책도 했다. 어쩌다가 댄스교실에 그녀가 안 나오면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몹시 걱정도 됐다. 그녀 또한 내 옷차림이며 건강 등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었고 몸에 좋다는 음식도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자식들 모두 출가하고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나에게 그녀의 세심한 손길은 마치 죽은 아내의 따뜻했던 손길 같았다.
고목나무에 생기가 돌아서인지 자식들이 눈치를 챘다. 처음, 댄스교실에 다니는 것을 알았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운동도 되고 좋죠"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나에게 ''여친''이 생겼다는 것을 알자 "그냥 친구로만 지내시는 거죠?"라고 말하며 혹시 내가 재혼이라도 할까봐 불안해했다. 그녀는 나와 재혼을 원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상황을 설명하자 "그냥 쿨~하게 서로 의지하며 보고 싶을 때 만나면서 지내자"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 부담 없이 쿨~하게 만나면서 가끔 여행도 다닌다. 하지만 밤에 홀로 잠들며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아쉬운 마음과 자식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밀려온다.
- 서초구 양재동 김 모(71세)씨
각서, 꼭 받아야했니?
영감님을 만난 건 2년 전 노인복지회관 강좌에서였다. 원로 시인인 강사선생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도 감상하고, 경치도 감상하는 것이 재미있어 몇 달 째 꾸준히 수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봄 날, 김 영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봄바람이 걱정돼 작은 보온병을 들고 나갔는데 물 한 잔을 얻어 마신 김 영감님이 내 보온병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거였다.
김 영감님은 오래 전 상처를 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깔끔하기가 웬만한 할머니 저리가라였고, 과묵하지만 속정이 깊어 어느 틈엔가 내 모든 일을 살뜰히 챙겨주고 있었다. 젊은이들처럼 뜨거울 순 없지만 함께 있으면 편안함이 느껴졌고, 자식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든든함이 느껴졌다. ?
용기는 김 영감님이 냈다. 하얀 메밀꽃이 사방에 피어있던 그 날, 나이 일흔이 넘어 청혼이라는 걸 받아본 것이다. 김 영감님은 꽃반지를 만들어주며 비싼 건 못해줘도 저세상 가는 그날까지 아끼며 함께 해 주겠다며 청혼을 했다. ? ? ?
문제는 김 영감님의 자식들이었다. 2남 1녀.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식들이었는데 나를 영 못마땅해 했다. 어머니 없이 외로웠을 아버지 삶에는 관심조차 없고, 나를 은퇴재산이나 축내러 온 마귀할멈으로 몰아쳤다. 결혼을 꼭 하려던 마음은 없었지만 자식들 성화에 움츠러드는 김 영감님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게도 자식이 있고, 내 명의의 작은 아파트가 있다고 설명해도 김 영감님의 자식들은 완강했다. 나를 퇴직한 ''꽃뱀''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결국 난 각서를 쓰기로 했다. "차후에 김○○씨가 먼저 죽게 된다 할지라도 일체의 유산 상속을 포기한다."
지금 난 김 영감님과 1년째 황혼 신혼을 즐기고 있다.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서로 배려하고, 꼭 필요할 때(?)만 싸우면서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각서를 생각하면 아직도 김 영감님의 자식들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겠다. 훗날 내가 정말 김 영감님 보다 늦게까지 남는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각서, 꼭 받아야 했니?"
-강남구 개포동 이 모(여, 67)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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