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주부들의 인생 도전기

내 삶의 소중한 터닝 포인트

지역내일 2011-02-28

‘슬라이딩 도어즈’라는 영화가 있다. 출근과 동시에 해고당한 여성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탈 경우와 안 탈 경우를 놓고 서로 다른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여주인공의 인생은 한순간에 180° 달라진다. 그녀에겐 지하철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셈이다.


터닝 포인트라고 해서 거창하거나 큰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게다. 우리는 늘 선택의 귀로에서 고민하고 방황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터닝 후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 혹은 터닝의 순간에 진심으로 함께 해준 이는 누구냐, 또는 얼마나 준비하고 맞이한 터닝 포인트냐 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고학력에 커리어우먼이 많은 강남에서 주부로 살다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문하게 된다. ‘지금 이 삶은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인가?’ ‘다른 사람들의 잔치에 들러리를 서고 있는 건 아닐까?’ 2000년대의 첫 10여년 보낸 지금, 나름의 인생 터닝 포인트를 성공리에 마무리 하고 있는 사례들을 모아 재구성 해보았다.    
김선미, 장은진, 이선이, 이지혜 리포터 



남편의 배신, 지금도 용서할 수 없어


 내 나이 50대 초반이니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의 일이다. 30대 후반이었던 나는 연년생인 아들, 딸을 키우며 바쁘게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과의 하루하루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학교 보내고 잠시 한숨 돌리다 집안 정리를 하다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간식해먹이고 숙제 봐주고 준비물 챙기고…. 거기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치러야하는 집안의 대소사는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나는 별 갈등 없이 잘 헤쳐 나갔다. 어느 가을 오후, 저녁을 준비하느라 한참 동동거리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문을 여니 20대 후반쯤 보이는 젊은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순간, 야릇하고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그 여자와 찻집에서 20여분 앉아 있었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여자는 남편과 사귄지 일 년 정도 되었다면서 둘이 야외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을 증거물로 제시했다. 그런데 최근엔 남편이 만나주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려 할 수 없이 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남편은 술집에서 알았던 여자인데 집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돈을 요구해와 몇 번 들어주다가 액수가 자꾸 커져 네 맘대로 하라 했더니 정말 찾아온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편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고, 둘이 상당기간 교제를 했던 것 같았다.


당시의 고통과 충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남편과 당장 이혼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났다. 마침 사촌언니가 그곳에 있어서 정착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고, 남편에 대한 미움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아이들을 고등학교에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한 복지기관에서 3년째 상담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상담도 해주고 봉사도 한다. 그 당시 이혼을 했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온전히 나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다. 
-강남구 도곡동 하 모(51)씨



딸 조기유학 보낸 후 ‘나’를 되찾다


결혼 후 딸 하나를 낳아 키우면서 그야말로 모든 열정을 아이에게 쏟았다. 딸이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의 생활은 거의 아이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침에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연습에 학교와 학원 숙제까지 모두 마친 후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하루일과도 마무리 되는 날들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조기유학을 보내기로 한 나는 1~2년간 남편을 기러기 아빠로 남겨두고 딸과 함께 떠날 것인지, 아니면 아이만 관리형 유학 프로그램에 맡길 것인지 여러모로 고민을 했다. 결국 믿을만한 프로그램을 소개받아 아이만 보내기로 어렵게 결정을 내렸고 딸이 없는 1년간 마음껏 내 생활을 즐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현지에 데려다주고 혼자 돌아온 날부터 마치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 나간 듯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딸이 태어난 후 10여 년 간 아이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어느 날 대학부설 언어교육원의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권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한 영어회화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고, 각 반 우수생에게 주는 학비감면 혜택까지 받으며 레벨 업 행진을 계속했다. 영어회화 과정을 모두 마친 후에는 테솔 프로그램에 도전해 전 영역 점수 A를 받기도 했다. 같이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리포트와 시험 준비로 거의 매일 밤을 새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이가 아닌 나를 위해 열정을 쏟으면서 나의 미래를 꿈꾸게 됐다. 평소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남편은 테솔 석사과정 유학까지 도전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1년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의 진로에 대해 좀 더 고민을 해 본 후 결정을 할 생각이다. 만약 이렇게 아이와 잠시 떨어져 있을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아이 뒤만 쫓아다니며 정작 나의 삶은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의 조기유학, 그것은 아이에게만 매달려 정작 자신의 삶은 잊고 산 나에게 ‘나’를 되찾게 해준 내 인생의 소중한 터닝 포인트였다.
-강남구 서초동 유 모(37)씨



잘 나가던 직장 그만두고 아이 교육 선택


 이제 막 늦은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3학년 아들과 하루하루 활기차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내 모습을 들여다보면 6년 전의 나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6년 전 나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 전자회사의 핵심 부서인 기획팀에서 과장 4년차의 중견사원으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당시 대기업에는 혁신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생산부문이나 스태프부문이나 생상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근무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중요한 아침회의가 있으면 새벽에 출근하기도 했고 퇴근시간도 9시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방이나 해외 출장도 잦았다. 힘들게 일하는 만큼 일한 결과에 대한 인정과 보상도 주어졌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직장인’의 대열에 합류해 성취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입사동기 200여 명 중에 여자 신입사원은 단 4명. 그만큼 당시 대기업에도 여성인력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었다.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남자 사원들에 비해 더 빈틈없이 노력해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일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가장 바쁘게 일하는 핵심부서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는 법.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가 직장을 그만둘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해왔던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바쁜 엄마 탓에 자신의 스케줄을 유치원 때부터 스스로 소화하는 조숙함을 보였던 아들이 공부는 뒷전이고 자신처럼 엄마들의 관리에서 벗어난 아이들과 어울려 PC방 등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직장과 아이교육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아이교육을 택했다. 직장을 그만두자 아들은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일 행복한 모습이었다. 6년이 지난 지금 때때로 엄마의 간섭을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들을 보면 좀 억울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 다시 6년 전 그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역시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선택의 시기였던 만큼 아이에게도 그 시기는 중요한 시기였고, 6년간 아이와 지지고 볶는(?)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는 부모의 정성을 먹고 성장한다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강남구 대치동 정 모(44세)씨



적과의 동거, 시어머니와 함께 살기


15년 전 결혼했다. 남편이 막내아들이라 부모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첫 아이가 생긴 후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워킹맘인 나를 많이 배려한 시댁 형님들이 홀로 계신 시어머니께 베이비시터 일을 부탁드렸던 것이다. 자식을 위해 뭐든 아끼지 않으셨던 시어머니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분이었다. 지금 생각이지만 어머니께 재산이나 작은 방 한 칸이라도 있었다면 형님들은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타의에 의해 덜컥 찾아왔다. 남편과 둘이서만 지내오던 내게 시어머니와의 동거는 전혀 다른 인생의 맛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가부장적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각종 집안일에 육아, 시어머니와의 대화 담당까지 우리 집 지붕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다 내 몫이었다. 남편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었을지 몰라도 내겐 또 다른 일터, 흡사 전쟁터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어수선하고 감당 안 되는 상황들이 많은데 동지 한명을 잃고, 상사 한명을 얻은 꼴이 되었으니 힘들고 슬퍼도 울 틈조차 없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암울한 터닝 포인트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황금열쇠는 있었으니 지치지 않는 자기 최면과 긍정적 믿음이었다. 악착같이 노력하고 주어진 관계와 상황에 최선을 다하니 유령처럼 다가온 터닝 포인트도 천사처럼 소중한 것이 되어버렸다. 고민이나 위기의 순간을 직면할 때 집안에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지 어른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작은 부부싸움이 큰 싸움으로 번질 때, 아이의 학업이나 남편의 승진, 일확천금에 욕심이 날 때 어머니는 나의 정서적인 안전장치가 되어주신다. 든든한 지원자가 있는 덕에 남편과 아이는 심리적 안정감도 얻을 수 있었다.


누구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고픈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중엔 나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을 맞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터닝 후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감당하게 될 터닝이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결국은 웃음 가득한 반전을 이뤄봄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강남구 서초동 이 모(39)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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