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들이 며느리들에게 하는 거짓말’을 순위별로 나열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1위는 아가야! 난 널 딸처럼 생각한단다
2위/ 생일상은 뭘……. 그냥 대충 먹자꾸나!
3위/ 내가 얼른 죽어야지!
4위/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5위/ 좀 더 자라. 아침은 내가 할 테니……. 등이다.
이렇듯 아들과 남편을 사이에 둔 고부간의 갈등은 평행선을 이루며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정말 딸 같은 며느리, 딸보다 더 사랑스러운 며느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간경화로 간이식을 받아야 하는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간 60%를 떼어준 효부 이야기도 있다. 며느리의 예쁜 마음 때문에 행복하다는 시어머니들의 사연을 들어보자.
다리를 못 쓰는 내게 수족이 되어준 며느리
10년 전 남편을 여의고, 내가 방안에 들어앉아 지낸 세월도 벌써 5년째다. 하반신을 못 쓰는 나를 위해 며느리가 내 수족이 되어 준 시간도 그만큼 되어간다. 내 처지도 처량 맞지만 며느리를 생각하면 너무나 고맙고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날의 악몽에 몸서리가 쳐진다.
당뇨 탓에 시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목욕탕에서 나오다 넘어지면서 탁자 모서리에 허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직행했고, 극심한 통증 때문에 곧바로 수술을 받게 됐다. 그 때 허리수술을 하면서 신경이 잘못된 것인지 결국엔 다리에 마비가 오고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 겨우 아파트 안에서 보조기구를 짚고 움직이는 정도가 전부이다. 현재는 2급 장애 판정을 받아 일주일에 두 번 건강도우미가 방문하긴 하지만 나의 인생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이다. 혼자 힘으로 바깥출입을 못하니 우울증세도 생기고 몇 년 사이에 파파할머니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남매를 두었다. 재미교포에게 시집간 딸아이는 2~3년에 한번 만나기도 힘들다. 내가 건강할 때는 딸을 만나러 미국에 간혹 가기도 했지만 아프고 나서는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춘천의 작은 주택을 처분하고 서울의 아들네와 살림을 합쳤다. 물론 며느리 입장에서는 결정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며느리와 함께 조그만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식당일에 아들 둘을 키우기도 버거운데 나까지 짐을 지우게 되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하지만 며느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린 적이 없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시어머니인 나에게도 딸처럼 살갑게 대해준다. 점점 호전되는 병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내 신세가 원통하기만 하다. 손자들이 커가면서 교육비니 뭐니 생활비도 많이 드는데 도움은커녕 아들내외에게 짐만 되고 있으니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 “어머니! 오늘 저녁엔 꽃게찌개 어떠세요? 슈퍼마켓 들렀다 금방 들어갈게요.” 명랑한 며느리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며느리는 분명 하늘이 내게 보내준 천사임에 틀림없다.
-서초구 서초4동 임 모(70)씨
“요즘 세상엔 재태크 잘하는 며느리가 최고죠”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며느리도 셋이다. 딱히 어느 며느리만 예쁘다고 말하긴 곤란하다. 셋 중에 둘은 맞벌이를 한다. 요즘 세상에 혼자 벌어서 자식 교육시키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가. 전문직을 가진 두 아들은 그나마 둘이 버니 어찌어찌 살아 갈 테니 큰 걱정이 안 된다.
그런데 맞벌이를 하지 않는 맏이가 늘 걱정이었다. 신혼 초에 전세금 마련해 준 것 외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며느리들처럼 큰 며느리도 직장을 다녔으면 했는데 시어미가 나서서 ‘너도 직장 좀 다녀라’라고 말 할 수도 없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요즘 나는 큰 며느리 덕분에 기 펴고 산다. 얼마 전 큰 아들 내외가 강남에 집을 사서 집들이를 했다. 요즘 텔레비전에 매일 전세 대란이니 강남 집값이 얼마니 하는 것을 보며 아들 셋이 서울에서 집 장만 하긴 글렀구나, 물려줄 재산이 없는 게 한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동안 큰 며느리가 주식을 해서 ‘얼마 벌었네, 얼마를 손해 봤네’라는 소식을 들을 때면 살림이나 반듯이 할 것이지 저러다 집안 말아 먹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하며 속으론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큰 며느리는 소위 말하는 재테크의 고수였다. 주식으로 모은 쌈짓돈으로 시작해서 부동산에 관심을 갖고 투자해 그게 알을 까고 알을 까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친구들에게 우리 며느리가 재테크를 잘해서 집장만했다고 자랑했더니 정말 대단한 며느리라고 다들 부러워한다.
얼마 전에는 통장으로 느닷없이 돈이 들어와서 막내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알고 보니 칠순이 넘은 부모님이 아파서 병원도 자주 다니는데 용돈이라도 조금씩 모아 보내드리자고 큰 며느리 주재로 회의를 열었단다. 그래서 매달 통장으로 보내게 된 것이라고. 이만 하면 우리 큰 며느리 자랑할 만하죠.
-서초구 서초동 김모(71세)씨
소소한 기념일까지 챙겨 기쁨 주는 며느리
딸만 셋을 내리 낳은 후 어렵게 얻은 아들이 결혼을 해 며느리를 맞으니 사위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분가를 해 따로 살고 있는 며느리가 모처럼 집에라도 오는 날이면 한여름에도 옷을 갖춰 입고 점잖은 시아버지 모습을 보이느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님, 아버님’하면서 깍듯하게 대하는 며느리가 너무 예뻤다. 딸들이 샘을 낼 정도로.
그런 예쁜 며느리가 어느 날 초콜릿이 가득 든 작은 상자를 택배로 보냈다. 어쩐 일이냐고 전화로 물었더니 밸런타인데이 선물이란다. 처음으로 받아본 초콜릿 선물에 아내와 나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예쁘고 고마워 흐뭇했다. 친구들이 모이는 학당에 가져가 나눠 먹으면서 은근히 자랑을 했더니 모두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 후로도 화이트데이에는 사탕을, 빼빼로데이에는 초코과자를 보내와 아이들 모두 출가시키고 둘만 남아 적적하게 지내던 우리 부부에게 수시로 신선한 기쁨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집 근처 제과점 주인과도 의논을 해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이나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케이크를 배달시킨다. 옷이든 신발이든 시부모를 위한 선물은 최고로 하면서 정작 자신은 수수한 차림으로 다녀 요즘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나 싶다.
결혼 후에도 박사학위 과정을 밟느라 바쁘게 지내면서도 시부모를 위해 때마다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기특하기 그지없다. 비록 말수는 적지만 늘 표정이 밝고 속이 깊어 맏며느리 감으로는 그만이다. 게다가 형제들과도 우애 있게 지내고 아들과 알콩달콩 서로 위하며 잘 살고 있으니 부모로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예쁜 며느리지만 무엇보다 고마운 건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 와 장손을 낳았다는 거다. 며느리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하는 걸 보면 아이도 야무지게 키울 것 같아 아무 걱정이 없다. 우리 예쁜 며느리 최고!
서초구 잠원동 장 모(75)씨
분위기 메이커인 우리 며느리가 최고!
자고로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집안에 외로움과 우울함만 가득하다면 은행에 수십억 통장이 가득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날 연휴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걸 봐야한다면 무병장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솔직히 남편과 아들 셋, 거무튀튀한 장정만 넷을 두고 살아온 나로서는 설이나 추석이나 그저 일하는 날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큰 아들 놈이 장가를 가고 나서는 집안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여리고 예쁜 며느리가 들어와 각종 명절 이벤트를 주도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 상품권을 걸고 윷놀이하기, 집안 곳곳에 숨겨진 가족 선물 찾아가기, 일정액의 선물을 각자 준비해 번호표로 선물 뽑아가기 등등. 어차피 먹는 떡국이고, 의례히 주고받는 세뱃돈이지만 한번 떠들썩하게 윷판을 즐기고, 네 선물이 좋네, 내 선물이 낫네 하며 서로의 어깨 넘어 포장지를 훔쳐 보다보면 절로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세 아들이 모두 장가를 가고 손자손녀들이 태어나자 흥이 더 커졌다. 가족 대항 윷놀이도 재미나고, 가족 멤버를 섞어 1, 2, 3팀으로 짜도 재미있다. 그 중 제일 치열한 건 설거지를 걸고 하는 남녀 대항 윷 단판 게임이다. 개다, 걸이다, 백도다 하며 입에서 침들이 튀어나가도 아랑곳 않고 놀다보면 오랜만에 만난 서먹함도 사라지고 같은 반찬으로 먹는 명절상도 꿀맛이고 힘든 명절일도 미루는 법 없이 즐거이 하게 된다. 크게 웃으면 먹던 음식이 튀어나올까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지만 그래도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집어넣으며 놀이를 즐기는 아들들 가족을 보고 있자면 음식의 온기보다 더 따뜻한 뭔가가 뭉클 솟아오르곤 한다.
평소에 일이 바빠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며느리지만, 또 먼저와 명절 음식 한번 돕지 않는 얄미운 구석도 있는 며느리지만, 게다가 가끔씩 동서들 불러 모아 내 흉도 보는 걸 내가 알지만 그래도 명벌 연휴 온 가족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게 만들어주는 우리 며느리가 나는 좋다.
-강남구 수서동 박모씨(78)
20년째 함께 살고 있는 천사표 며느리
아들이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으니 내가 며느리와 함께 산 세월도 벌써 20년이다. 스물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잠시 다녀오는 여행을 제외하면 늘 시부모와 같은 공간에서 큰 마찰 없이 함께 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내 며느리는 요즘 보기 드문 효부다.
더구나 며느리가 시집올 때 우리는 변변한 집 한 채 없었고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은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위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며느리가 무슨 생각으로 내 아들과 결혼했는지 몰라 한번은 며느리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다고 한다. 목표와 의지가 확실하고 자신감에 차있는 내 아들이 좋았다는 것이다. 가진 건 별로 없어도 아들 하나 당당하게 키운 보람으로 이런 착한 며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살림은 어려워도 손은 귀한 집안이라 내심 손자를 기다리는 나에게 며느리는 2년 터울로 두 손자를 안겨주었다. 연이은 임신에다 만삭이 되어서도 직장을 다니는 며느리를 보며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른다. 두 아이를 낳고도 며느리는 몇 년간 더 직장생활을 했고 아들이 하는 사업도 점점 나아져 우리 집은 이제 경제적으로 전혀 어려움 없이 지낸다. 게다가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잘 자란 손자들을 바라보면 흐뭇하기 그지없다. 이 모든 것이 며느리의 덕이 아닌가 싶다.
작년에는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며느리는 간병인도 쓰지 않고 싫은 내색 전혀 없이 내 병수발을 다 들었다. 잠깐 들러 수다만 떨고 가는 딸들에 비하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퇴원 후 통원치료와 약 먹는 시간까지 꼬박꼬박 잊지 않고 챙기는 데다 몸에 좋은 음식도 정성껏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딸보다 열 배는 낫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요즘 나는 기도한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제발 며느리 힘들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 서초구 방배동 김 모 씨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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