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한 여자가 아닌 아내와 엄마로만 살아가던 중년의 여주인공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존재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자아를 찾아 떠나는 과정을 그린 책, ‘혼자 눈뜨는 아침’. 비록 오래된 책이지만 40대 중반의 주부 정모씨는 새해 벽두부터 신혼 무렵에 읽었던 그 책의 구절구절들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자식 교육에 모든 걸 쏟아 넣고 살다보니 어느 듯 중년이 돼버린 주부들로부터 ‘주부’라는 이름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순간들에 대해 들어 보았다.
엄마는 ‘세일’만 밝힌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모처럼 삼계탕으로 아들과 남편 몸보신을 시켜주려고 한창 준비를 서두르던 주부 김모(45)씨. 냉동실에 조금 남아 있는 줄 알았던 찹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아파트 상가에 있는 마트로 달려갔다. 찹쌀만 사서 오려고 했는데 ‘당일 특가, 바나나 한 송이 2,900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샀다. 떠먹는 요구르트도 ‘1+1’이라니 당연히 샀고. 가까운 거리이니 환경을 생각해서 쇼핑봉투는 NO! 한 손에 바나나와 요구르트를 올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찹쌀을 들고 아들이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줄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른 채 집까지 왔다.
그런 그녀를 본 아들과 남편의 반응은 “엄마는 세일을 왜 그렇게 밝혀? 손목 아프다더니 왜 그러고 다녀?”였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인 딸조차 백화점에 가면 엄마는 늘 행사매장에서만 쇼핑을 한다며 투덜거렸던 게 생각이 났다. 사업을 하셨던 친정아버지 덕분에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요즘 말하는 소위 ‘신상녀’였던 그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가족들조차 몰라주다니 왈칵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필요한 것을 구입하라며 백화점 상품권을 줘도 결국 아이들이나 남편 옷가지에 먼저 손이 가곤 했던 그녀. 비록 두 아이 교육비로 빠듯한 생활이지만 이제 조금씩이라도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생각이다. “이렇게 산다고 나중에 애들이 알아줄 리도 없잖아!”
일하는 친구 엄마가 부럽다고?
나도 당당하고 멋진 주부로 산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하나같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중년 주부들을 볼 때마다 마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다는 주부 박모(43)씨. 아이 둘을 키우느라 어느새 찌들어버린 인상에 해가 갈수록 푹 퍼져만 가는 몸매 그 자체가 스트레스다.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한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있고 골프에 악기 동호회 활동까지 즐긴다. “나도 쉬고 싶지만 다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한 모임이다”라는 핑계를 대며 주말까지 나가는데 이해는 되지만 불쑥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자신은 주말에도 아이들 끼니 챙기랴 학원 데려다주랴 잠시도 쉴 틈이 없는데 남편은 새벽같이 일어나 미안한 척하며 살짝 빠져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얄밉다는 생각마저 든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파트타임으로 해오던 일도 모두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아왔는데 요즘 들어 부쩍 과연 잘한 선택이었나를 따져보게 된다. 중학생인 아들이 제 친구 엄마는 맞벌이라 필요한 건 바로 다 사준다며 은근히 부러워하는 티를 낼 때마다 “내가 바로 너 때문에 잘나가던 일도 접었다”라는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곤 한다.
하지만 내 자식들을 위해 내가 선택한 일, 누구를 원망할 것이며 또 후회한들 지금 와서 달라지는 게 있겠는가. 새해가 시작되었으니 비록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헬스 등록도 하고 영어회화공부도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야무지게 몸매 관리도 하고 영어실력도 유창하게 다져서 주부생활을 당당하게 즐기고 싶다.”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게 내 탓?
공부를 못해도 네가 있어 든든하다!
아이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일 때까지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사는 엄마가 부럽기도 했다는 주부 이모(45)씨. 하지만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부터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둔 엄마가 다른 엄마들 사이에서 가장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엄마가 아무리 명품으로 휘감고 다녀도 애가 공부를 못하면 부럽기는커녕 그러고 다니는 게 똑바로 보이지 않더라는 얘기다. 오히려 수수하게 차리고 다녀도 애들이 최상위권 성적인 엄마는 뭔가 대단해 보이기까지 하다고.
이제 물질적인 부족함 때문에 마음이 상하던 시기는 벌써 지났고, 요즘에는 애들 성적 때문에 주부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강남에서 다 같이 교육을 시켰고 특별히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내 아이는 상위권으로 오르지 못할까를 생각하면 그것만큼 속상한 게 없다. 자신이 아이를 제대로 이끌어 주지 못해서 그런가 싶어 자책감이 들 때에는 미안하기도 하고, 앞으로 대입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 두렵기까지 하다. 아이들 학원비 부담에 허리가 휠 지경이지만 장기펀드에 투자하는 셈 치고 아깝지 않게 여겼는데 요즘은 그 펀드 적립금이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허무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저런 우울한 생각 때문에 축 처져 있을 때, ‘엄마’라고 부르며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 모두 잊고 “배고프지? 뭐 먹고 싶어?”하면서 등을 토닥이게 된다. “그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너희는 엄마의 가장 든든한 재산이다. 파이팅!”
장은진 리포터 jkume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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