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아름답고 처연한 음악, 뮤지컬 ‘서편제’

한 많은 세상, 말로 열고 소리로 풀어라

11월 7일까지 종로5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

지역내일 2010-10-30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과 감수성을 키우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그의 작품 ‘남도소리(1978)’에 담긴 단편소설이자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한 ‘서편제’에 이어 10여년 만에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는 ‘서편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가을이 깊어가는 밤, 공연을 보기 위해 종로 두산아트센터로 향했다. 준비기간이 길었던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언론의 호평도 있었지만 판소리라는 요소가 뮤지컬 안에서 어떻게 접목되고 어우러지는지가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배어있는 뮤지컬

막이 오르면서 맑고 청아한 아이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우리 가락으로 만든 뮤지컬이 이런 폭발적인 흡인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면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 들어간다. 서양문화의 전유물인 대형 뮤지컬에 길들어져 있는 우리에게 한국인 특유의 정서로 도전장을 낸 뮤지컬 ‘서편제’는 한과 소리, 억압과 예술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서편제는 메말라버린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각 장면마다 객석에서는 배우가 내뿜는 소리에 집중하고 그 순간만큼은 관객과 배우가 하나 되어 제각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의붓아버지 유봉 때문이라며 불타오르는 증오심을 안고 살아가는 동호, 소리에 대한 집착으로 송화의 눈을 멀게 하는 유봉, 소리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다 유봉에 의해 평생 앞을 볼 수 없게 된 송화 등. 이들의 한 맺힌 응어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용서를 통해 새로운 생명과 예술적 에너지로 승화된다. 한 많은 세상을 말로 열고 소리로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송화, 동호, 유봉이란 세 인물이 음악을 매개로 극을 이끌어가고, 세 사람의 갈등과 관계가 50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노래로 흐른다. 또 판소리로 상징되는 송화가 겪는 고난의 과정이 소리를 향한 고행과 자기 자신과의 투쟁 그리고 성공이나 명예를 원한 것이 아닌 오롯이 소리자체의 완성으로 귀결되는 여정을 그려낸다. 아버지인 유봉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자식에게까지 모진 아비가 되어 송화의 눈을 멀게 하는 장면에서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판소리는 지루하다는 편견을 벗겨내다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판타지적 연출과 함축적이고도 절제된 미가 묻어나는 무대장치는 감동의 요소를 더해 주었다. 또한 서편제 가락을 대 선율로 차용해 서편제가 갖는 풍부한 음악성과 아련하고 미려한 느낌은 살리되, 거기에 대중적인 멜로디를 가미함으로써 판소리는 지루하다는 편견을 벗겨내고 있었다. 한국의 풍미를 제대로 살린 전통 한국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무용과 과거와 현대적인 스타일을 반영한 의상은 자유로움의 극치였다.
1막에서는 면과 마 린넨을 사용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스타일에 색감은 잿빛으로 어두운 톤이었지만 포인트를 살려 강렬하게 표현했다. 2막의 클럽 장면에서는 스팽글과 반짝이는 원단으로 스타일과 색감에서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또 무대 미학인 생략과 상징을 관객들의 상상력으로 채워가며 각자 나름대로의 서편제를 만들도록 유도했다. 특히, 마지막부분에 송화가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하기 위해 입을 뗄 때 관객들은 모두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뱃속 깊이 응어리진 그 무언가가 단단하게 공처럼 뭉쳐져 하나씩 하나씩 그녀의 입을 통해 토해내듯 뱉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약 10분 이상 심청가를 부르면서 눈물도 함께 쏟아냈다. 소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송화, 그로 인해 피어나는 아름답고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관객들 역시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공연장을 나오니 청량한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속삭이면서.


김선미 리포터 srakim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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