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오페라 ‘프린스 이고르’

문학, 음악, 춤이 어우러진 오페라 미학의 집대성

러시아의 이국적인 색채에 더해 오리엔탈적인 요소도 충만

지역내일 2010-10-27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치고 마음 놓고 문화생활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이것저것 챙겨야할 것도 많고 공부하는 아이들을 두고 혼자 여가를 즐기기도 미안하다. 아무래도 저녁보다는 오전시간이 자유롭다보니 오페라나 뮤지컬 극장보다는 영화관을 쉽게 찾는다. 추석 명절에 이어진 아이 중간고사로 내가 공부한 것도 아닌데 심신이 피곤해져 있었던 내게 남편이 불쑥 내민 오페라 ''프린스 이고르’의 VIP 티켓 2장, 자신은 오페라에 관심 없으니 친구와 함께 다녀오란다. 이렇게 찾아온 지난 토요일 오후의 자유, 고등학생인 두 아들을 키우느라 정신없는 언니와 함께 자매의 화려한 외출을 시작했다.
5시 공연인데도 4시부터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야외무대에서 유니버설 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하이라이트를 무료로 공연하고 있어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고전 서사문학을 통해 12세기 러시아의 색채를 한껏 체험
푸치니나 베르디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친숙한 상태에서 러시아 브로딘의 ‘프린스 이고르’는 왠지 낯설기도 했지만 러시아 오페라만의 어떤 색다름을 선보일지 기대하면서 공연장에 들어섰다.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조의 한 사람인 브로딘의 오페라 ‘프린스 이고르’는 러시아 건국기인 12세기 노브고로드 공작 이고르가 남방 초원지대에서 침략해 오는 유목민족을 정벌하려다 포로로 잡힌 뒤 탈출하기까지의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러시아 고대 서사시인 ‘이고르 원정기’를 바탕으로 브로딘 자신이 대본을 작성했다. ‘이고르 원정기’의 고문서로 무대의 막을 형상화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잔잔하면서도 러시아의 민족적인 느낌이 전해지는 아름다운 서곡에 이어 프롤로그에서는 교회 앞에서 이고르 공의 출정식이 진행된다. 출정식 도중 일식이 진행되어 전쟁의 불길함을 예고하는데, 무대가 서서히 어둠에 휩싸이면서 개기일식 상태가 되었을 때는 캄캄한 어둠 속에 태양의 고리만이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나 조명예술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었다.
1막에서는 이고르 공이 떠난 후 처남인 가리츠키가 처녀들을 유린하는 등 쾌락을 일삼고 처녀들은 이고르 공의 부인인 야로슬라바를 찾아가 하소연 한다. 이 작품은 12세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며 당시의 러시아 색채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세상 어디에나 정의가 틈을 보일 때 파고드는 사악함이 존재하고 그 사악함에 빌붙어 살아가는 인물들이 존재하는 사실이 흥미롭다. 


웅장한 스케일의 환상적이고 역동적인 춤
‘프린스 이고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2막의 ‘폴로베츠인의 춤’ 장면은 1막의 우울한 분위기를 완전히 전환시킨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하고 역동적인 연주에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합창과 더불어 20여 분 동안 발레단 40여 명이 등장해 화려한 군무로 환상적이며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해냈다. 특히 원색의 화려한 동양적 의상은 힘차면서도 섬세한 춤사위에 날개를 달아 무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여고 시절 반별 세계무용대회에서 러시아 춤을 선보였던 반이 1등을 한 적이 있어 러시아 춤이 역동적이고 활기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인이 직접 추는 춤을 체험하고 나니 추운 나라 러시아에서 그들이 어떻게 역동적으로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3막에서는 탈출하여 폐허가 된 영지로 돌아온 이고르 공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유목민들을 몰아낼 것을 다짐한다. 


 
역사의 현장 체험 후 평화로운 저녁에 감사한 하루
지난해 130여 명이 내한한 ‘카르멘’에서 놀라운 예술성을 보여주었던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 국립오페라발레극장은 이번 공연에서 성악가, 합창단, 발레단, 오케스트라, 스태프 등 총 250여 명이 동원된 웅장한 스케일의 무대연출로 서사적인 오페라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두 번의 인터미션을 포함해 세 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동안 12세기 후반의 러시아 한복판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이고르 원정기’는 러시아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썼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속에서는 유목민의 기상이 러시아인의 기상을 압도한 것처럼 묘사됐고 남러시아는 16세기 초까지 몽골인이 세운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극장 밖으로 나와 가을밤 클래식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분수를 바라보며 평화로운 이 시대에 역사의 한 장면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그 속의 평범한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소박한 감사를 드린 하루였다.    


이선이 리포터 sunnyy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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