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란 이름의 이데오로기
임 현 진
서울대학교 교수
정치사회학
올해 우리 서점가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실상 이 책은 미국 보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로서 명성이 더 높다. 다양한 주제를 놓고 원심화되어 있는 미국 독서시장의 특징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능하지만, 나는 미국인 보다 한국인이 정의에 대한 관심을 더 지니고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본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기본적인 시민권을 누리게 되어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의식주 문제의 해결과 함께 법아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극적 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극화로 인해 도시와 농촌, 대기업과 중소기업, 취업자와 실업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모래시계형 사회에서 사람들은 평등과 자유에 대해 반문하면서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한 샌델교수의 견해는 흥미롭다. 한국인들이 경제에 몰입해 있다 보니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제 한국 국민은 경제성장을 넘어 도덕적.윤리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정치인을 원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에 의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얘기할 수 있는 정치인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 대선에서 오마바의 승리도 그러한 국민적 열망의 표현이라고 한다. 한국의 차기 대선 후보자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
마침 한국사회의 화두가 ‘공정한 사회’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공정한 사회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 ‘창조적 실용주의’ 대신 ‘공정한 사회’가 집권 후기 국정기조로 제시되고 있다. 친서민 중도실용이란 정책표명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의 보수 지지세력에 중간층을 끌어넣음으로써 권력기반을 넓히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는 친기업에서 친서민 노선으로의 전환과 무관치 않으며, 결국 지지기반의 확대를 통한 정권재창출을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의아해 한다. 만일 공정을 얘기하라면, 특권과 반칙을 없애려고 한 노무현정부가 자격이 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려한 노무현정부야말로 국가권력 기관의 탈(脫)권력화를 시도하다가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특권과 반칙으로 얼룩진 이명박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대다수 국민은 기대에 앞서 회의를 갖는다.
작금과 같이 일반 대중, 특히 상대방에게만 준법을 강요한다면 ‘공정한 사회’란 공정이란 이름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분명 공정한 사회는 모든 국민이 바라는 시대적 요구다. 그러나 스스로부터 공정의 잣대에 의해 특권과 반칙을 퇴출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권의 수사로 끝날 것이다.
공정이란 공평하고 올바른 것을 뜻한다. 그러나 출발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란 양면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이 출발에서 결과에 이르기 까지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사회성원들이 합의한 게임규칙이다. 공정한 사회에서 격차가 있어도 패자나 승자가 모두 받아들이는 공약수다. 격차가 존재하지만 차별 보다 경쟁으로 이어진다. 뒤떨어진 사람도 다시 일어나 뛸 수 있듯이,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그러나 공평하다고 해서 반드시 정의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절차로서 공평과 달리 정의는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도덕과 같은 윤리적 차원의 해석과 법, 권력과 같은 현실적 차원의 집행 사이에서 정의는 시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73.0%에 달한다. 태어나고, 학교가고, 직장얻고, 결혼하는 일련의 생애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득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하다 보니 현실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도층이 지위에 걸맞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중요하지만, 누구나 남의 공정함 보다 나의 공정함을 먼저 따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센달의 논의를 따르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리함이 없도록 정책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자유는 일부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늘려 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만치 자유시장아래 민주주의를 하는 사회에서 공정한 사회에 이르는 길은 간단한 것 같지만 쉽지 않다. 결국 공정한 사회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경제정책에 못지않게 호혜와 분배를 향한 사회정책의 개진 여부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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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현 진
서울대학교 교수
정치사회학
올해 우리 서점가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실상 이 책은 미국 보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로서 명성이 더 높다. 다양한 주제를 놓고 원심화되어 있는 미국 독서시장의 특징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능하지만, 나는 미국인 보다 한국인이 정의에 대한 관심을 더 지니고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본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기본적인 시민권을 누리게 되어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의식주 문제의 해결과 함께 법아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극적 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극화로 인해 도시와 농촌, 대기업과 중소기업, 취업자와 실업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모래시계형 사회에서 사람들은 평등과 자유에 대해 반문하면서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한 샌델교수의 견해는 흥미롭다. 한국인들이 경제에 몰입해 있다 보니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제 한국 국민은 경제성장을 넘어 도덕적.윤리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정치인을 원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에 의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얘기할 수 있는 정치인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 대선에서 오마바의 승리도 그러한 국민적 열망의 표현이라고 한다. 한국의 차기 대선 후보자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
마침 한국사회의 화두가 ‘공정한 사회’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공정한 사회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 ‘창조적 실용주의’ 대신 ‘공정한 사회’가 집권 후기 국정기조로 제시되고 있다. 친서민 중도실용이란 정책표명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의 보수 지지세력에 중간층을 끌어넣음으로써 권력기반을 넓히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는 친기업에서 친서민 노선으로의 전환과 무관치 않으며, 결국 지지기반의 확대를 통한 정권재창출을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의아해 한다. 만일 공정을 얘기하라면, 특권과 반칙을 없애려고 한 노무현정부가 자격이 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려한 노무현정부야말로 국가권력 기관의 탈(脫)권력화를 시도하다가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특권과 반칙으로 얼룩진 이명박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대다수 국민은 기대에 앞서 회의를 갖는다.
작금과 같이 일반 대중, 특히 상대방에게만 준법을 강요한다면 ‘공정한 사회’란 공정이란 이름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분명 공정한 사회는 모든 국민이 바라는 시대적 요구다. 그러나 스스로부터 공정의 잣대에 의해 특권과 반칙을 퇴출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권의 수사로 끝날 것이다.
공정이란 공평하고 올바른 것을 뜻한다. 그러나 출발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란 양면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이 출발에서 결과에 이르기 까지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사회성원들이 합의한 게임규칙이다. 공정한 사회에서 격차가 있어도 패자나 승자가 모두 받아들이는 공약수다. 격차가 존재하지만 차별 보다 경쟁으로 이어진다. 뒤떨어진 사람도 다시 일어나 뛸 수 있듯이,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그러나 공평하다고 해서 반드시 정의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절차로서 공평과 달리 정의는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도덕과 같은 윤리적 차원의 해석과 법, 권력과 같은 현실적 차원의 집행 사이에서 정의는 시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73.0%에 달한다. 태어나고, 학교가고, 직장얻고, 결혼하는 일련의 생애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득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하다 보니 현실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도층이 지위에 걸맞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중요하지만, 누구나 남의 공정함 보다 나의 공정함을 먼저 따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센달의 논의를 따르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리함이 없도록 정책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자유는 일부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늘려 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만치 자유시장아래 민주주의를 하는 사회에서 공정한 사회에 이르는 길은 간단한 것 같지만 쉽지 않다. 결국 공정한 사회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경제정책에 못지않게 호혜와 분배를 향한 사회정책의 개진 여부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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