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은 창작활동 결과 10회 개인전과 150여회 단체전 열어
그의 나이 46세. 조각가로서 오롯이 창작활동에만 전념해온 전업 작가다. 남들은 나이가 들면 후회된 일이 많다고들 하지만 그는 중년이라서 더 행복하다. 지나온 인생의 깊이를 작품으로 고스란히 승화시킬 수 있어서다.
작품의 소재는 ‘여체’다. 여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풍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에서 그의 온화하고 풍요한 삶이 엿보이고, 여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몽환적인 모습은 꿈을 좇는 여심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작품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대가 금세 형성된다.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작품 활동에 쏟아 부은 시간과 열정과 땀의 대가다. “작가이기 때문에 작품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일이 좋아서 습관처럼 작업실을 찾는다”고 말하는 그는 분명 행복한 예술인이다.
“나의 길은 오로지 예술”
화순 고향을 떠나 광주살이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무렵. 예쁘장한 외모에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천방지축 생활과는 달리 광주에서의 삶은 냉정했다. 성적은 바닥을 쳤고 그를 어여삐 봐주는 눈길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문대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기가 발동했다. “잘하는 것이 뭔가를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미술 개인교습을 받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초등학교 때 시도 제법 쓰고 그림도 곧잘 그렸거든요. 미술이라면 충분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음을 정하니 학업 성적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 당시 언니가 미술을 전공하고 있던 터라 ‘예술=고생길’이란 마인드가 강했던 아버지에게 정씨의 결정은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화실에 보내달라고 아버지에게 협박하다시피 졸라댔어요.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수채화를 배우게 됐죠. 하지만 열정이 너무 늦게 도발한 탓에 원하는 대학에는 갈 수 없었어요.” 여기서 멈출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시작도 안했다.
정 씨는 다시 도전했다. 오직 수채화 작업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우연히 옆방 조각실을 기웃거리다 찰흙을 만진 것이 인생의 새로운 지표를 여는 계기가 됐다. “찰흙을 만진 순간 손에서 느끼지는 촉각이 나를 새로운 예술 세계로 이끌었죠. 그 순간 조각의 입체 예술에 바로 매료돼 버렸어요.”
흙에서 탄생한 입체 창조물 ‘조각’
그렇게 조대 미대 조소과 1회 합격생이 됐고 조각에 대한 열정만큼 졸업도 수석을 차지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했던가. 졸업 후에도 그의 작품 활동은 식을 줄 몰랐다. 결혼생활도 그의 작업에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배우자를 고를 때 첫 번째 조건도 나의 예술 활동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어요. 지금의 남편이 흔쾌히 허락해서 바로 결혼을 결심했죠.” 그래도 아내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낮에는 주부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밤늦은 시간부터 새벽 동이 틀 때까지는 지하 작업실에서 작가로 이중생활을 해왔다. 드디어 1992년 그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그의 작품은 관람객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됐다. 첫 소장자가 나타나고 작품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를 또 다른 작품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여인, 나무, 새 그리고 북어
그는 수십 년간 다듬어진 작업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다양한 색깔의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잠시 여인을 외도하고 북어작품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가 갈망하는 영원한 주제는 ‘여체와 새’다. 인위적인 창작이 아니라 정 씨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과거의 향기와 감정의 세포를 일깨워 자연스럽게 작품에 표현하다보면 어느새 여인의 모습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을 보이지 않는 창작이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세계를 작품에 표현할 때 관람객도 비로소 감동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가 투자한 시간과 땀과 노력의 결과가 말해준다.” 그러자면 작가의 인생 마인드부터 바꿔야 한다. 항상 아름답고 긍정적인 생각만을 담고 남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며 도를 닦듯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서 사랑과 행복이 느껴진다.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름다운 중년으로 산다는 것은 남은 인생에 대한 꿈을 향해 도전과 열정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 또 다른 시작이다. 정춘표 작가처럼 말이다.
김영희 리포터 beauty02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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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46세. 조각가로서 오롯이 창작활동에만 전념해온 전업 작가다. 남들은 나이가 들면 후회된 일이 많다고들 하지만 그는 중년이라서 더 행복하다. 지나온 인생의 깊이를 작품으로 고스란히 승화시킬 수 있어서다.
작품의 소재는 ‘여체’다. 여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풍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에서 그의 온화하고 풍요한 삶이 엿보이고, 여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몽환적인 모습은 꿈을 좇는 여심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작품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대가 금세 형성된다.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작품 활동에 쏟아 부은 시간과 열정과 땀의 대가다. “작가이기 때문에 작품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일이 좋아서 습관처럼 작업실을 찾는다”고 말하는 그는 분명 행복한 예술인이다.
“나의 길은 오로지 예술”
화순 고향을 떠나 광주살이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무렵. 예쁘장한 외모에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천방지축 생활과는 달리 광주에서의 삶은 냉정했다. 성적은 바닥을 쳤고 그를 어여삐 봐주는 눈길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문대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기가 발동했다. “잘하는 것이 뭔가를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미술 개인교습을 받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초등학교 때 시도 제법 쓰고 그림도 곧잘 그렸거든요. 미술이라면 충분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음을 정하니 학업 성적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 당시 언니가 미술을 전공하고 있던 터라 ‘예술=고생길’이란 마인드가 강했던 아버지에게 정씨의 결정은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화실에 보내달라고 아버지에게 협박하다시피 졸라댔어요.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수채화를 배우게 됐죠. 하지만 열정이 너무 늦게 도발한 탓에 원하는 대학에는 갈 수 없었어요.” 여기서 멈출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시작도 안했다.
정 씨는 다시 도전했다. 오직 수채화 작업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우연히 옆방 조각실을 기웃거리다 찰흙을 만진 것이 인생의 새로운 지표를 여는 계기가 됐다. “찰흙을 만진 순간 손에서 느끼지는 촉각이 나를 새로운 예술 세계로 이끌었죠. 그 순간 조각의 입체 예술에 바로 매료돼 버렸어요.”
흙에서 탄생한 입체 창조물 ‘조각’
그렇게 조대 미대 조소과 1회 합격생이 됐고 조각에 대한 열정만큼 졸업도 수석을 차지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했던가. 졸업 후에도 그의 작품 활동은 식을 줄 몰랐다. 결혼생활도 그의 작업에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배우자를 고를 때 첫 번째 조건도 나의 예술 활동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어요. 지금의 남편이 흔쾌히 허락해서 바로 결혼을 결심했죠.” 그래도 아내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낮에는 주부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밤늦은 시간부터 새벽 동이 틀 때까지는 지하 작업실에서 작가로 이중생활을 해왔다. 드디어 1992년 그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그의 작품은 관람객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됐다. 첫 소장자가 나타나고 작품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를 또 다른 작품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여인, 나무, 새 그리고 북어
그는 수십 년간 다듬어진 작업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다양한 색깔의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잠시 여인을 외도하고 북어작품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가 갈망하는 영원한 주제는 ‘여체와 새’다. 인위적인 창작이 아니라 정 씨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과거의 향기와 감정의 세포를 일깨워 자연스럽게 작품에 표현하다보면 어느새 여인의 모습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을 보이지 않는 창작이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세계를 작품에 표현할 때 관람객도 비로소 감동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가 투자한 시간과 땀과 노력의 결과가 말해준다.” 그러자면 작가의 인생 마인드부터 바꿔야 한다. 항상 아름답고 긍정적인 생각만을 담고 남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며 도를 닦듯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서 사랑과 행복이 느껴진다.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름다운 중년으로 산다는 것은 남은 인생에 대한 꿈을 향해 도전과 열정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 또 다른 시작이다. 정춘표 작가처럼 말이다.
김영희 리포터 beauty02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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