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의 이름은 얼리어답터. 관심 있는 분야도 폭넓어 카메라나 휴대폰, 컴퓨터 등 전자 제품은 기본이요, 자전거에 인라인스케이트까지 신제품이 나왔다 하면 기어코 사고야 마는 진정한 얼리어답터다. 매달 하나씩 사는 모습이 마치 침체된 경기부양을 책임지는 ‘로키’라도 되는 것 같다. 원하는 신제품은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손에 넣고 싶어하는 남편과 사는 아내들의 속 타는 이야기.
지난 5월 21일, 부부의 날을 맞아 (사)하이패밀리에서는 색다른 제안을 했다. ‘내조의 여왕, 외조의 고수 10계명’이 그것.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내조의 여왕 되기 10계명’ 가운데 9계명 ‘남편 취미 생활의 지원군이 되어주자’다. 여기서 말하는 취미 생활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기호 식품, 얼리어답터 등이 속한다. 하이패밀리는 그 이유로 “남편의 취미를 방해하면 거짓말만 늘어나기 때문”이라 밝힌다. 드디어 21세기 내조의 여왕이 되기 위한 기본 덕목으로 ‘얼리어답터 남편을 이해하기’가 꼽힌 것이다.
얼리어답터는 ‘early’와 ‘adopter’의 합성어. 이슈가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지만, 실제 이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버릿 로저스의 〈디퓨전 오브 이노베이션〉이라는 책에서 등장한 것. ‘신제품이 출시되면 가장 먼저 구입해 사용해보고, 그 기능을 파악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이 개념은 비록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1990년대 들어 IT 바람이 거세지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얼리어답터에게 최대의 적은 결혼?
주부 박은지(가명, 40·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씨는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는 남편을 보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는단다. “매일 밤늦게까지 뭘 그리 열심히 하나 했는데, 세상에 얼리어답터 동호회까지 가입했더라고요.” 이런 남편의 기질을 전혀 모르고 결혼했다는 박씨는 결혼 1년 만에 남편의 본색을 알았다는데…. “결혼 후 카메라가 갖고 싶다기에 200만 원짜리 비디오카메라를 사줬죠. 그런데 1년도 안 돼 디지털카메라를 사겠다는 거예요. 몇 달 동안 뜯어말렸는데, 얼마 후쯤 ‘엄마가 사줬다’면서 입이 귀에 걸려 새 카메라를 안고 오더군요.”
얼리어답터 기질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나마 결혼 후 많이 줄었다는 게 많은 남편들의 하소연이다. 아내의 잔소리와 눈치 때문이다. 얼리어답터 남편을 둔 아내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대체로 한결같다. 누구는 반찬 값 몇천 원 아끼려고 집 앞 마트 대신 20분 거리의 재래시장까지 다니는 판에, 누구는 몇십만 원짜리 신제품을 한 달이 멀게 사느냐는 식.
아내의 눈치와 잔소리에 대처하는 남편들의 노력도 가상하다. 세상에서 신제품 샀을 때 마주하는 아내 얼굴이 제일 무섭다는 얼리어답터 권아무개씨는 구입하고 싶은 신제품이 있을 때는 귀가를 서두른다. 소문난 애주가지만 웬만한 술자리는 패스~ 한두 달 가사 노동으로 아내의 기분을 맞춰준 다음, 분위기를 봐서 갖고 싶은 신제품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낸다고.
남편들이 이렇게 애쓰며 얼리어답터로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남이 아직 구하지 못한 것을 처음 갖는다는 사실, 남이 아직 모르는 것을 먼저 알았다는 뿌듯함, 과학의 신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익혔다는 자신감 등이 아내의 눈치 속에서도 남편들을 얼리어답터로 살게 하는 이유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아내들 역시 연애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남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현실에 안착하고 나니, 남편의 얼리어답터 기질이 이기적으로 비춰지는 것. 호기심 많은 얼리어답터 남친은 좋지만, 가정경제 생각 않고 ‘지르는’ 이기적인 남편은 노 땡큐라는 얘기다.
남편만 사란 법 있냐!
얼리어답터 주부도 수두룩
하지만 이 어찌 남편들만의 얘기겠는가. 사실 주변 주부들 사이에서도 얼리어답터는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새로 나온 각종 세제는 꼭 써보고야 마는 A주부,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아 식품 브랜드의 신제품 체험단이 되어 시판 전 새로운 맛을 본다는 B주부, 뷰티 브랜드의 신제품은 꼭 발라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C주부, 명품 브랜드의 ‘신상’ 가방을 위시 리스트 1순위로 올려놓았다는 D주부까지…. 분야가 다를 뿐, 얼리어답터의 자세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주부 이미현(가명, 44·서울 서초구 서초동)씨는 얼리어답터 남편 때문에 매일 속 터지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도 얼리어답터라고 수줍게 고백한다. 아이들 시판 과자부터 생필품은 물론, 뜨는 건강법까지 직접 체험한 뒤 이를 아줌마들에게 얘기해주는 것. 모두 체험단 활동을 통해서다. 이씨의 경험담은 주변인들에게 좋은 정보가 되고, 이를 통해 이씨는 인맥을 유지한다.
상대를 배려한 소비라면, 자신의 경제 기반과 수준을 고려한 소비라면… 남편이든 아내든 현대사회에서 꼭 필요한 정보력을 키워준다는 얼리어답터 라이프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문영애 리포터 happymoon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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