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김영희

나를 키운 8할은

지역내일 2010-04-21 (수정 2010-04-21 오전 9:51:13)




 




‘매일 이혼을 떠올리게 한 남편’
“저는 맘만 먹으면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될 수 있어요. 결혼한 부부는 무조건 5년만 살고 헤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벌금을 세게 물리는 법을 제정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할 겁니다. 어떠세요, 여러분. 저를 안 뽑으시겠습니까?”
한 강연장에서 시작된 조용한 모반이다. 좌중은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보내고 ‘당선! 당선!’ 힘찬 구호가 선거 유세를 방불케 한다. 유쾌한 언변의 주인공이 진짜 강의를 시작한다. “여러분, 부부가 원래 그런 존재예요.” 김영희 조정위원(65)이다.

달인에서 귀신까지
그에겐 화려한 수식이 많다. 조정의 달인, 부부 화합의 연금술사, 서초동 솔로몬, 귀신… . 15년째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가사조정 성공률로 대법원에서 감사장을 받은 파워 우먼이다. 조정위원은 이혼하려고 하는데 협의하지 못하고 이혼소송까지 하는 부부를 대상으로 조정을 한다.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연기자 정애리와 이호재가 하는 일이 조정위원의 역할이다. 그러나 조정위원이 ‘상담’만 해주는 사람은 아니다. 모든 합의를 조정위원에게 받고 나서, 최후 판결만 재판관 앞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정위원들은 라이선스 없는 재판관과 똑같다.
그는 법률 지식이 해박한 법조인도, 학식이 높은 대학 교수나 심리학자도 아니다. 20여 년을 전업 주부로 살다가 여성 단체에서 인권·여성 지위 향상 운동에 참여한 뒤 1997년 윤관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조정위원이 되었다.
“조정위원은 양쪽 당사자 모두 억울한 부분이나 지나치게 손해 보는 부분이 없도록 해야 조정에 성공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는 법률가나 심리학자보다 오히려 세상 풍파를 많이 겪은  할머니가 뛰어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제가 높은 성공률을 보인 이유도 똑같다고 생각해요. 저도 365일 중 360일은 이혼을 생각할 만큼 힘들게 결혼 생활을 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만큼 그들을 잘 설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의 첫인상은 이력과 고백에 어울리지 않게 소녀 같다. 15년을 이혼의 현장에서 울고 웃으며 환갑을 넘은 연륜이 어찌 이리 맑고 예쁠까. 분당에 문을 연 ‘김영희 부부컨설팅’ 상담소를 찾았다. 마치 신혼집에 들어온 듯 포근하고 달콤하다. 강아지 가족, 뽀뽀하는 신랑 신부 등 아기자기한 소품 인형들과 곳곳에 멋스럽게 연출된 화분과 꽃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예쁜 걸 좋아한다는 주인의 성품을 꼭 닮은 풍경이다.
조정은 말기 암 환자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단다. 40분 만에 재산 분할, 위자료, 양육권자 지정과 면접교섭권을 해결하는 절망적인 자리지만 상담에서 만나는 이들은 초기 암 환자와 같아 깊숙이 파고들어 이야기하면 얼마든지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3년만 살고 죽어도 좋았을 사랑
그토록 힘들게 견뎠다는 결혼 생활에 대해 묻자, 그는 책상에 놓인 액자를 보여준다. 40년 된 그의 신혼여행 사진이다. 서귀포관광호텔 앞에서 영화배우 같은 남녀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련된 외모와 스타일이 지금 내놓아도 손색없는 커플이다. 이렇게 근사한 신행을 보냈지만, 신혼의 단꿈은 오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숙명여대 입학식에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편, 첫눈에 반해 5년을 열애했고 이 남자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 결혼했다. 이 결혼을 하면 3년 안에 죽을 거라는 점쟁이 말에 싫은 사람과 평생을 사는 것보다 좋은 사람과 3년 살고 죽는 게 낫다며 당돌하게 어머니의 반대를 물리친 그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마취제 없이 수술을 받는 것 같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신문기자인 남편은 술과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 달에 서너 번 집에 들어오고, 월급봉투는 아예 가져다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서 남편이 자신의 여고 선배와 연애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장마가 오면 무너질 것만 같았던 구파발 기자촌 꼭대기 집에서 세 아이를 데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며 울음을 삼켰다. 굶기도 하고 슈퍼에서 외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자신은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보다 못한 이웃이 남편의 뒷조사를 해주마 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외박한 남편에게 어디서 잤느냐 물어본 적도, 남편의 주머니를 뒤져본 적도 없다.
“분명 거짓말할 텐데 물으면 뭐 하겠어요. 남편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으면 어리석은 아내가 되고, 믿지 않고 따지면 싸움만 일어나고…. 남편에게 여자가 있어서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버티지 않았으면 이혼을 해도 몇 번을 했을 거예요.”
어린 아이들만 있는데 문을 밖에서 잠가놓고 외박한 남편의 옷과 인삼 달인 물까지 챙겨 회사로 가는 버스에서 쏟은 눈물을 그는 잊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아내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복수했는지도 모른다. 7년 만에 얻은 귀한 외동딸로 유복한 환경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키워준 친정 부모님께 어려운 모습을 보일 수도 없던 그는 남편의 외박과 쌀값 걱정으로 보낸 10년이 자신을 키웠다고 회상한다.

부부 위기는
소리 없이 찾아오는 ‘암’
“결혼 생활이란 본성과 자라온 환경이 전혀 다른 남녀가 만나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다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즉 블루(blue)의 남자와 레드(red)의 여자가 서로 인정하면서 조화로운 퍼플(purple)이 탄생한다는 것. 이것이 김영희의 ‘퍼플 솔루션’이다.
그는 부부의 첫 위기는 30~40대 ‘등 돌리고 자는 아내와 남편’, 즉 잠자리 거부에서 시작된다고 진단한다. 출산과 육아로 지친 아내, 피곤에 지친 남편. 아내가 원하면 남편이 싫고, 남편이 원하면 아내가 싫다고 뿌리치고…. 50대나 60대가 아니라, 30~40대여서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상담소에서 만난 30~40대 내담자의 70~80퍼센트가 ‘섹스리스’ 부부라고 한다.
“성이 메마른 가정은 위기의 가정이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마음이 고프면 마음을 먹어야 해요. 결혼 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외로움인데 잠자리를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가벼운 스킨십, 따뜻한 말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해서 상대를 외롭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식 때문에, 체면 때문에 사는 시대는 지났다. 정말 불행하다면 이혼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결혼은 하는데 왜 이혼은 못 하는가? 다만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문제를 개선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최선을 다했는지… 그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혼하고 나서 당사자들이 진짜 행복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혼 후 경제적인 이유와 자녀 문제로 고통 받는 게 사실이고, 80퍼센트가 이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해요. 게다가 재혼 실패율이 70~80퍼센트가 넘는 것을 보면 ‘이혼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죠. 즉 그 여자가 그 여자고, 그 남자가 그 남자라는 거죠.”
그는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들에게 “내가 그랬듯이(웃음), 차라리 지금의 배우자와 함께 결혼 생활을 개선해서 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살기 위해 싸우는 거라면 안 살 것처럼 독하게 싸우지 마세요. 살려면 그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 안 되죠. 남편은 제가 차 한잔 마시자고 할 때가 제일 무섭대요.” 그는 남편이 지어준 자신의 별명이 ‘차 한잔’이라고 했다.
“남편이 화낼 때 전 절대 맞서지 않아요. 상대가 화낼 때 맞서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요. 대신 시간이 지나면 화낸 걸 후회하게 마련이죠. 그때 조용히 ‘차 한잔 하자’고 해요. 함께 차를 마시면서 섭섭한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서로 존경하며 살자’고 부탁해요. 그리고 ‘오늘 저녁은 뭘 먹지?’ 하고 화제를 돌려요. 그래도 남편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다 알아들어요. 잔소리는 1분을 넘기면 안 돼요. 잔소리가 길어지면 싸움밖에 안 되거든요.”
지혜롭고 현명하게 그리고 부딪히지 말기. 이것이 그가 강조하는 대화의 기술이다.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tip!      김영희 위원이 말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 6계명
혀끝을 조심하라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상대를 감동시키지만, 독한 말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준다. 마음에 받은 상처는 평생 간다는 것을 잊지 말고, 독한 소리는 못 살고 헤어질 때 한 번만 하자.
상대의 단점을 고치려 들지 마라  상대의 단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결혼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라.
두 사람만의 대화 시간을 가져라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나 집 앞 카페에서 살림 이야기 대신 두 사람의 사랑과 인생을 이야기하라.
잔소리는 1분이면 족하다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잔소리만큼 끔찍한 고문은 없다. 상대가 잔소리라고 생각되지 않게 부드럽고 온화한 말씨로 하라. 그 효과는 훨씬 더 크다.
자기 허물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자기 잘못부터 인정하라. 잘못을 지적한 사람에게 화내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맞서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좋은 점을 찾아서 칭찬하라  칭찬 받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상대를 칭찬하면 칭찬 받는 것보다 기쁨이 배가 된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은 고달프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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