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35년 불우이웃돕기 앞장
퇴임 후에는 무료급식소 운영
“도청 공보계장 엄지호는 이 시대의 희귀식물이다. 음지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민초를 빼닮았다는 눈빛과 목소리가 그렇고 숱한 남의 자식 키워 장가보내는 마음씨가 또한 그렇다 …”
얼마 전 작고한 고 최석하 시인이 지은 시 제목은 ‘희귀식물 엄지호’다. 시인의 말처럼 엄지호(64)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은 괴짜다. 평생을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살고 있는 ‘희귀식물’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한 카페 ‘손잡고 가요’에서도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구두닦이 대부로 공직 시작 = 출발은 1970년 7월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시 서구 내당5동 서기보(5급)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다. 당시 일대는 속칭 ‘창돌이(창과 돌멩이)’로 불리던 부랑아들이 종이집에서 거주하며 구걸과 넝마주이로 연명하던 곳이었다.
“공무원도 박봉이었지만 ‘꿀꿀이죽’같은 음식으로 생계를 잇는 그들에 비하면 너무 풍족해보였습니다.”
급여 중 일정액을 떼어 밀가루를 사주고 수제비를 끓여먹게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엄씨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정부에서도 그들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대책없이 방치하는 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1972년 경북도청으로 전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자활지원에 나섰다. 고 이태영 전 대구대 총장이 주도한 BBS(Big Brothers and Sisters)운동에 참여하면서다.
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BBS 형제’들은 당시 서구 이현동 대구시 부지에 합숙소를 짓고 함께 살았다. 엄씨도 숙식을 함께 하며 형제들 고충해결에 앞장섰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였고 경찰서에서는 신변 보증인이었다.
“사고뭉치들이 모여 살다보니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당시 경찰은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BBS 합숙소부터 덮쳤죠. 공무원이 보호자로 함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나 봅니다.”
경찰과 친분을 쌓은 뒤에는 신원조회 협조를 받아 합숙소로 들어온 미아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낸 일도 많았다. 퇴근 후에도 ‘민원 해결’을 위해 뛰다가 통금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그의 사정을 아는 이현파출소에서 팔뚝에 통행허가 도장을 찍어줄 정도였다.
형제들 학습지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해 4명이 대학에 진학할 때도 있었지만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담당 교수를 찾아가 ‘특별관리’를 부탁해 졸업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 합숙소 출신 중에 대학교수며 의사로 성공한 이도 있다. 형제들이 성장해 결혼을 하게 되면 엄씨는 총각 혼주가 되기도 했고 주례를 맡기도 했다.
◆죽어가는 목숨 살리기도 = 숱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엄씨가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수상한 김금옥(57)씨와 ‘욕쟁이 스님’으로 통하는 통허 스님이다.
“1987년 도청 위민실에 근무할 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1985년 서무계에서 포상을 담당할 때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받은 김금옥씨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옷을 떠 고아원에 나눠주는 예쁜 색시였는데 중병에 걸려 죽게 될 지경이 됐다는 겁니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다며 김씨를 찾아갔다. 2년 전 만났던 예쁜 색시는 오간데 없고 말기 암환자 몰골이었다. BBS 지도위원 때부터 도움을 받은 동산병원(계명대 부속의료원)에 도움을 청했다. 동산병원은 의료보험이 도입되기 전부터 사회사업실을 만들어 어려운 환자들을 돕고 있었다. 18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김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지금은 엄씨와 함께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다.
통허스님은 중구 보현사 입구에서 청소년을 지도하고 급식봉사를 하는 이였다. 스님이 폐암선고를 받은 뒤 엄씨는 ‘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스님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켰다.
“운명하시기 전에 외상값을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꽃집이며 보살 등에게 빌린 600여만원 빚이 걸리셨던 모양이예요.”
장례며 빚 청산 역시 엄씨가 정리했다.
◆490명 ‘손잡고’ 서로돕기 = 1980년대 중반에는 이웃돕기를 ‘조직화’했다. ‘서로 돕고 살자’는데 뜻을 같이 한 지역 언론사 간부와 함께 모임을 꾸렸다. 매달 1000원을 내는 회원 1만명을 확보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2001년 다음에 카페 ‘손잡고 가요’를 개설한 뒤 지금가지 공무원 변호사 사업가 스님 주부 등 회원 490여명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사연을 가급적 해결해주려고 합니다. 카페에 사연이 올라오면 바로 번개 모임을 갖고 해결책을 의논합니다. 단순 불우이웃돕기부터 수술비 학비 연탄 지원은 물론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회원들 노력봉사까지 형태는 다양합니다.”
카페에서는 2008년 12월 남구 대명동에 작은 식당을 냈다. ‘서로 돕고 사는 집’이다.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하며 매주 두차례 차상위계층 21가구에 도시락을 배달한다.
지난해 12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직에서 물러나 ‘실직자’가 된 엄씨는 요즘 이 식당으로 출근, 잡일을 돕고 있다.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웃을 도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웃보듬기’는 평생 업으로 삼고 있어요.”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초등학생 때부터 장사해 학비 마련
아들장가 보내며 생애 첫양복 구입
평생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엄지호씨는 자신에게는 철저한 구두쇠였다. 지난해 11월에야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구입할 정도였다. 둘째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대형할인점에서 10만원도 안되는 것으로 샀다. 공직에 있을 때는 ‘근무복’, 퇴임 후에는 점퍼나 재킷으로 버텼다. 하의는 주로 검은색 등산복. 한번 구입하면 구멍 날 때까지 입었다.
“고령군에서 도청 발령을 받았는데 정장차림으로 사령장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정장이 없어 사령장을 받지 못했어요. 도청 과장으로 재직할 때는 도의원들이 성화(?)를 해서 고리형 넥타이를 사무실에 두고 의회에 갈 때만 착용했죠.”
엄씨의 구두쇠 노릇은 가난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에는 소풍과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계란이며 생선 과일 등을 팔아 학비를 조달했다. 최종학력은 고졸이지만 졸업장이 없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고3때는 4기분 등록금 5960원을 내지 못해 졸업시험도 거부당했다.
군대도 ‘로비’해서 갔다. 당시 2인 동시입영으로 생계가 곤란할 경우 한명만 입대하면 되는 시기였다. 교사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입대를 하면 7남매의 집안생계가 어려워 대신 군생활을 자원했다. 시력이 나빠 면제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계를 책임진 형을 대신해 입대를 고집했다. 경북도청 공무원시절에는 남을 돕는 보직만 맡았다. 서무계 포상담당, 위민실, 공보관실 공보계장을 거쳐 서기관으로 승진해서는 가정복지과장과 노인복지과장, 도민연수과장 등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
공직 말년에는 부단체장 발령도 거부했다. 엄씨는 “늙어서 부군수라고 폼잡으면 추해질 수 있어 사양했다”고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나서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으로 4년간 일했다.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퇴임 후에는 무료급식소 운영
“도청 공보계장 엄지호는 이 시대의 희귀식물이다. 음지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민초를 빼닮았다는 눈빛과 목소리가 그렇고 숱한 남의 자식 키워 장가보내는 마음씨가 또한 그렇다 …”
얼마 전 작고한 고 최석하 시인이 지은 시 제목은 ‘희귀식물 엄지호’다. 시인의 말처럼 엄지호(64)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은 괴짜다. 평생을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살고 있는 ‘희귀식물’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한 카페 ‘손잡고 가요’에서도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구두닦이 대부로 공직 시작 = 출발은 1970년 7월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시 서구 내당5동 서기보(5급)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다. 당시 일대는 속칭 ‘창돌이(창과 돌멩이)’로 불리던 부랑아들이 종이집에서 거주하며 구걸과 넝마주이로 연명하던 곳이었다.
“공무원도 박봉이었지만 ‘꿀꿀이죽’같은 음식으로 생계를 잇는 그들에 비하면 너무 풍족해보였습니다.”
급여 중 일정액을 떼어 밀가루를 사주고 수제비를 끓여먹게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엄씨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정부에서도 그들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대책없이 방치하는 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1972년 경북도청으로 전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자활지원에 나섰다. 고 이태영 전 대구대 총장이 주도한 BBS(Big Brothers and Sisters)운동에 참여하면서다.
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BBS 형제’들은 당시 서구 이현동 대구시 부지에 합숙소를 짓고 함께 살았다. 엄씨도 숙식을 함께 하며 형제들 고충해결에 앞장섰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였고 경찰서에서는 신변 보증인이었다.
“사고뭉치들이 모여 살다보니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당시 경찰은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BBS 합숙소부터 덮쳤죠. 공무원이 보호자로 함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나 봅니다.”
경찰과 친분을 쌓은 뒤에는 신원조회 협조를 받아 합숙소로 들어온 미아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낸 일도 많았다. 퇴근 후에도 ‘민원 해결’을 위해 뛰다가 통금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그의 사정을 아는 이현파출소에서 팔뚝에 통행허가 도장을 찍어줄 정도였다.
형제들 학습지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해 4명이 대학에 진학할 때도 있었지만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담당 교수를 찾아가 ‘특별관리’를 부탁해 졸업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 합숙소 출신 중에 대학교수며 의사로 성공한 이도 있다. 형제들이 성장해 결혼을 하게 되면 엄씨는 총각 혼주가 되기도 했고 주례를 맡기도 했다.
◆죽어가는 목숨 살리기도 = 숱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엄씨가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수상한 김금옥(57)씨와 ‘욕쟁이 스님’으로 통하는 통허 스님이다.
“1987년 도청 위민실에 근무할 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1985년 서무계에서 포상을 담당할 때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받은 김금옥씨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옷을 떠 고아원에 나눠주는 예쁜 색시였는데 중병에 걸려 죽게 될 지경이 됐다는 겁니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다며 김씨를 찾아갔다. 2년 전 만났던 예쁜 색시는 오간데 없고 말기 암환자 몰골이었다. BBS 지도위원 때부터 도움을 받은 동산병원(계명대 부속의료원)에 도움을 청했다. 동산병원은 의료보험이 도입되기 전부터 사회사업실을 만들어 어려운 환자들을 돕고 있었다. 18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김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지금은 엄씨와 함께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다.
통허스님은 중구 보현사 입구에서 청소년을 지도하고 급식봉사를 하는 이였다. 스님이 폐암선고를 받은 뒤 엄씨는 ‘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스님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켰다.
“운명하시기 전에 외상값을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꽃집이며 보살 등에게 빌린 600여만원 빚이 걸리셨던 모양이예요.”
장례며 빚 청산 역시 엄씨가 정리했다.
◆490명 ‘손잡고’ 서로돕기 = 1980년대 중반에는 이웃돕기를 ‘조직화’했다. ‘서로 돕고 살자’는데 뜻을 같이 한 지역 언론사 간부와 함께 모임을 꾸렸다. 매달 1000원을 내는 회원 1만명을 확보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2001년 다음에 카페 ‘손잡고 가요’를 개설한 뒤 지금가지 공무원 변호사 사업가 스님 주부 등 회원 490여명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사연을 가급적 해결해주려고 합니다. 카페에 사연이 올라오면 바로 번개 모임을 갖고 해결책을 의논합니다. 단순 불우이웃돕기부터 수술비 학비 연탄 지원은 물론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회원들 노력봉사까지 형태는 다양합니다.”
카페에서는 2008년 12월 남구 대명동에 작은 식당을 냈다. ‘서로 돕고 사는 집’이다.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하며 매주 두차례 차상위계층 21가구에 도시락을 배달한다.
지난해 12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직에서 물러나 ‘실직자’가 된 엄씨는 요즘 이 식당으로 출근, 잡일을 돕고 있다.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웃을 도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웃보듬기’는 평생 업으로 삼고 있어요.”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초등학생 때부터 장사해 학비 마련
아들장가 보내며 생애 첫양복 구입
평생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엄지호씨는 자신에게는 철저한 구두쇠였다. 지난해 11월에야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구입할 정도였다. 둘째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대형할인점에서 10만원도 안되는 것으로 샀다. 공직에 있을 때는 ‘근무복’, 퇴임 후에는 점퍼나 재킷으로 버텼다. 하의는 주로 검은색 등산복. 한번 구입하면 구멍 날 때까지 입었다.
“고령군에서 도청 발령을 받았는데 정장차림으로 사령장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정장이 없어 사령장을 받지 못했어요. 도청 과장으로 재직할 때는 도의원들이 성화(?)를 해서 고리형 넥타이를 사무실에 두고 의회에 갈 때만 착용했죠.”
엄씨의 구두쇠 노릇은 가난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에는 소풍과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계란이며 생선 과일 등을 팔아 학비를 조달했다. 최종학력은 고졸이지만 졸업장이 없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고3때는 4기분 등록금 5960원을 내지 못해 졸업시험도 거부당했다.
군대도 ‘로비’해서 갔다. 당시 2인 동시입영으로 생계가 곤란할 경우 한명만 입대하면 되는 시기였다. 교사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입대를 하면 7남매의 집안생계가 어려워 대신 군생활을 자원했다. 시력이 나빠 면제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계를 책임진 형을 대신해 입대를 고집했다. 경북도청 공무원시절에는 남을 돕는 보직만 맡았다. 서무계 포상담당, 위민실, 공보관실 공보계장을 거쳐 서기관으로 승진해서는 가정복지과장과 노인복지과장, 도민연수과장 등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
공직 말년에는 부단체장 발령도 거부했다. 엄씨는 “늙어서 부군수라고 폼잡으면 추해질 수 있어 사양했다”고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나서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으로 4년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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