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직접 체험한 김정운 교수, 저서 통해 상세 공개
“역사는 우연한 방식으로 변화, 한반도 예외 아닐 것”
세기적 전환이자 현대 세계사의 주요 이정표가 된 베를린 장벽 붕괴. 그 장벽이 무너져 내린 진짜 이유가 뭘까.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1일자 신문을 통해 당시 급작스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진짜 주인공은 ‘동독주재 서방 매체 기자들’이라는 추적보도 기사를 게재했다. 그런데 이 세기적 사건을 현장에서 직접 겪은 한국인 교수가 있다.
그 주인공은 김정운 명지대 교수다. 문화심리학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한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었고 역사적인 11월 9일 밤 서베를린 슈판다우 외곽지역 동독인 난민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로 이 세기적 사건의 생생한 현장을 직접 체험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가 출판한 책은 올해 6월 1일자로 발행돼 10월 21일 보도한 ‘월스트리트 저널’보다 넉 달 전에 한국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셈이다.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말실수’에서 촉발 = 김 교수에 따르면 “독일 통일은 정말 코미디처럼 이루어졌다”며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별 생각없이 답변한 한마디와 독일 사정을 잘 모르던 이탈리아 등 서방기자들의 기사 송고가 겹쳐진 우연성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가 밝힌 베를린 장벽 붕괴의 전말은 이렇다.
사건은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정부가 여행자유화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시작된다.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동독시민들의 시위가 그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지속되자 동독 정부는 뭔가 시위대를 달랠 정책을 발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당시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Schabow-ski)는 이 기자회견에서 동독인들의 해외여행 절차를 간소화하는 행정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주변국 외에 동서독 국경을 통한 출국도 가능케 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연일 커져가는 시위를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이전의 정책과 비교해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특별한 내용이라고는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한다는 것뿐이었다. 저녁 6시 58분 샤보브스키는 기자회견을 열어 그 내용을 발표한다.
그러나 문제는 샤보브스키가 새 조치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로 회견장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는 당 지도부가 새 여행 규정을 결정하는 동안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가 기자회견 당일에야 문서를 건네받았다. 회견장에는 국내외 기자들이 가득했다.
◆독일어에 서투른 이탈리아 기자의 과잉 해석 한몫 = 그가 여행 자유화에 대해 운을 떼자 기자들이 벌떼처럼 질문을 던졌다. “의미가 뭔가” “언제 발효되나” 등등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마침내 그에게 한 이탈리아 기자가 그 정책이 언제부터 유효한지 물었다. 새정책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던 그는 들고 간 문서를 정신없이 뒤적이며 아무생각 없이 “지금부터 바로!”라고 답변했다. 그의 즉석 답변에 귀를 쫑긋 세운 기자들은 발표 내용이 국경 개방을 뜻하며, 그것도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대부분 독일기자들은 별 내용이 없는 여행자유화 정책에 시큰둥해 했다. 그러나 독일어에 서툰 이탈리아 기자는 오버하며 본국으로 급전을 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미국기자들도 덩달아 “내일부터 당장 동베를린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 밤 서독 TV는 외신을 짜깁기하여 “동독이 드디어 국경을 개방했다”고 애매한 보도를 내보냈다.
◆여행자유화 정책 발표가 ‘베를린 장벽 무너졌다’로 둔갑 = 뉴스를 시청한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국경수비대가 저지했지만 동독 주민들은 “뉴스를 듣지도 못했냐”고 오히려 따졌다. 황당해진 국경수비대는 혼돈에 빠졌다. 그들은 발포를 해서라도 인파를 해산시켜야 하는지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끝에 결국 검문절차를 포기하고 국경을 개방했다. 동독주민들이 장벽을 올라타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일부 주민들은 도끼, 망치를 들고 나와 아예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반대편 서베를린쪽 젊은이들도 망치로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로써 베를린 장벽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월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샤보브스키를 혼돈에 빠뜨린 결정적 질문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다시 논쟁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이탈리아 통신사인 ANSA의 외신기자 리카르도 에르만(Ehrman)의 공으로 간주됐다. 그는 자신이 여행 자유에 관한 첫 질문을 던졌으며, 답변을 듣고서 재빨리 회견장을 떠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헤드라인을 송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차이퉁의 피터 브링만(Brinkmann) 기자는 자신이 자유화 발표시점에 관해 결정적 질문을 던졌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당시 동독 TV 자료 화면이 진상을 가려줄 단서를 제공하는데 이탈리아의 에르만과 독일의 브링 외에 ‘미국의 소리(VOA)’ 기자도 가세했지만 워낙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 샤보프스키가 “즉시 지체없이”라는 단어를 내뱉게 한 질문자의 신원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정운 교수는 “샤보브스키의 엉뚱한 브리핑 답변이 없었더라면 베를린 장벽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역사는 필연적 인과관계보다는 아주 황당하고 우연한 방식으로 변화한다”며 “한반도도 분명 예외는 아니다”라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안찬수 기자 khae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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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연한 방식으로 변화, 한반도 예외 아닐 것”
세기적 전환이자 현대 세계사의 주요 이정표가 된 베를린 장벽 붕괴. 그 장벽이 무너져 내린 진짜 이유가 뭘까.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1일자 신문을 통해 당시 급작스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진짜 주인공은 ‘동독주재 서방 매체 기자들’이라는 추적보도 기사를 게재했다. 그런데 이 세기적 사건을 현장에서 직접 겪은 한국인 교수가 있다.
그 주인공은 김정운 명지대 교수다. 문화심리학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한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었고 역사적인 11월 9일 밤 서베를린 슈판다우 외곽지역 동독인 난민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로 이 세기적 사건의 생생한 현장을 직접 체험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가 출판한 책은 올해 6월 1일자로 발행돼 10월 21일 보도한 ‘월스트리트 저널’보다 넉 달 전에 한국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셈이다.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말실수’에서 촉발 = 김 교수에 따르면 “독일 통일은 정말 코미디처럼 이루어졌다”며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별 생각없이 답변한 한마디와 독일 사정을 잘 모르던 이탈리아 등 서방기자들의 기사 송고가 겹쳐진 우연성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가 밝힌 베를린 장벽 붕괴의 전말은 이렇다.
사건은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정부가 여행자유화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시작된다.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동독시민들의 시위가 그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지속되자 동독 정부는 뭔가 시위대를 달랠 정책을 발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당시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Schabow-ski)는 이 기자회견에서 동독인들의 해외여행 절차를 간소화하는 행정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주변국 외에 동서독 국경을 통한 출국도 가능케 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연일 커져가는 시위를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이전의 정책과 비교해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특별한 내용이라고는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한다는 것뿐이었다. 저녁 6시 58분 샤보브스키는 기자회견을 열어 그 내용을 발표한다.
그러나 문제는 샤보브스키가 새 조치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로 회견장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는 당 지도부가 새 여행 규정을 결정하는 동안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가 기자회견 당일에야 문서를 건네받았다. 회견장에는 국내외 기자들이 가득했다.
◆독일어에 서투른 이탈리아 기자의 과잉 해석 한몫 = 그가 여행 자유화에 대해 운을 떼자 기자들이 벌떼처럼 질문을 던졌다. “의미가 뭔가” “언제 발효되나” 등등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마침내 그에게 한 이탈리아 기자가 그 정책이 언제부터 유효한지 물었다. 새정책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던 그는 들고 간 문서를 정신없이 뒤적이며 아무생각 없이 “지금부터 바로!”라고 답변했다. 그의 즉석 답변에 귀를 쫑긋 세운 기자들은 발표 내용이 국경 개방을 뜻하며, 그것도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대부분 독일기자들은 별 내용이 없는 여행자유화 정책에 시큰둥해 했다. 그러나 독일어에 서툰 이탈리아 기자는 오버하며 본국으로 급전을 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미국기자들도 덩달아 “내일부터 당장 동베를린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 밤 서독 TV는 외신을 짜깁기하여 “동독이 드디어 국경을 개방했다”고 애매한 보도를 내보냈다.
◆여행자유화 정책 발표가 ‘베를린 장벽 무너졌다’로 둔갑 = 뉴스를 시청한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국경수비대가 저지했지만 동독 주민들은 “뉴스를 듣지도 못했냐”고 오히려 따졌다. 황당해진 국경수비대는 혼돈에 빠졌다. 그들은 발포를 해서라도 인파를 해산시켜야 하는지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끝에 결국 검문절차를 포기하고 국경을 개방했다. 동독주민들이 장벽을 올라타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일부 주민들은 도끼, 망치를 들고 나와 아예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반대편 서베를린쪽 젊은이들도 망치로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로써 베를린 장벽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월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샤보브스키를 혼돈에 빠뜨린 결정적 질문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다시 논쟁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이탈리아 통신사인 ANSA의 외신기자 리카르도 에르만(Ehrman)의 공으로 간주됐다. 그는 자신이 여행 자유에 관한 첫 질문을 던졌으며, 답변을 듣고서 재빨리 회견장을 떠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헤드라인을 송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차이퉁의 피터 브링만(Brinkmann) 기자는 자신이 자유화 발표시점에 관해 결정적 질문을 던졌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당시 동독 TV 자료 화면이 진상을 가려줄 단서를 제공하는데 이탈리아의 에르만과 독일의 브링 외에 ‘미국의 소리(VOA)’ 기자도 가세했지만 워낙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 샤보프스키가 “즉시 지체없이”라는 단어를 내뱉게 한 질문자의 신원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정운 교수는 “샤보브스키의 엉뚱한 브리핑 답변이 없었더라면 베를린 장벽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역사는 필연적 인과관계보다는 아주 황당하고 우연한 방식으로 변화한다”며 “한반도도 분명 예외는 아니다”라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안찬수 기자 khae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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