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경제위기를 이겨내는 지혜, ‘작은 사치’

지역내일 2009-10-13 (수정 2009-10-13 오전 8:41:03)
지난 9월 닐슨컴퍼니코리아의 설문조사에서 국민의 73.9%가 경기회복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경제위기를 이겨내는 최고의 방법으로 ‘절약’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구두쇠’처럼 아끼기만 하면 우울하고 무미건조한 삶이 되기 십상이다. 하루하루 돈에 쫓기듯 사느라 숨은 턱턱 막히고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도 사는 재미도 잃어버린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의 작은 행복마저 포기해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가족은 삶의 이유다. 우리가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유도 결국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다. 가족이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고 졸라매도 희망은 잰 걸음으로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생뚱맞은 제안을 하고 싶다. 가끔씩은 가족을 위한 ‘작은 사치’는 부리며 살자는 것이다. 헤픈 씀씀이는 줄여야 하지만 어느 정도 삶을 즐기는 여유도 필요하다. ‘절약’이 무조건 안 쓰는 것은 아니다. 쓸 것은 쓰면서 아끼는 것이다. 잘 쓰는 것도 절약이다. 잘 쓴 돈은 당장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여운을 가져다 준다. 뿌듯한 느낌으로 남는 소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소비, 바로 가족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주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작은 사치(Small Luxury)’다.
그렇다고 대단한 ‘과소비’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작은 사치는 두둑한 현금봉투나 거창한 선물보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은 돈이라도 가족의 행복을 불러오는 소비에 써보라는 것이다. 올 들어 필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지출은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결혼기념일에 찾은 ‘프리미엄 영화관’이었다. 고급 코스 요리를 먹으면서 최상급 화질과 빵빵한 사운드를 갖춘 극장에서 항공기의 1등석처럼 푹신한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본 것이다. 평소에 비좁은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콜라에 팝콘 먹으려 보는 영화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극장에 온 건지 호텔 레스토랑에 와있는지 착각할 정도였다. 물론 보통 영화 관람료의 물경 10배에 이르는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진한 감동이 교차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해온 수십만 가지 소비 중에서도 가장 가슴 뿌듯한 소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1년 내내 이런 소비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누리는 이런 호사스런 소비는 가족의 행복을 부르는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 때로는 여유를 즐겨야 더 나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작은 사치의 진짜 재미는 소비하는 순간보다는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푼돈이나 자투리 돈을 모아 작은 사치에 들어갈 비용을 만드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요즘 필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갑에 3만원 이상을 넣어 다니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현금을 갖고 있다 보면 아무래도 새나가는 돈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충동구매를 자극하는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사용하고 출퇴근도 될 수 있으면 지하철을 이용해서 교통비도 반으로 줄였다. 술자리가 있는 날에도 늦어도 자정까지는 귀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택시 타는 회수도 술자리 차수도 줄어들었다. 돈도 덜 쓰고 술도 덜 마시게 되고 게다가 귀가시간이 일러지면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늘어나니 말 그대로 ‘일석삼조’다. 점심식사도 구내식당에서 해결하고 커피전문점에서 폼 나게 마시던 커피도 사무실의 원두커피로 대신한다. 예전에는 시큰둥했던 미용실•패밀리 레스토랑 등의 공짜 쿠폰도 꼼꼼히 챙기고 마일리지 카드를 만드는 데도 열심이다. 요즘 불황으로 인해 고객확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0번 이용하면 한번 무료 등 이용실적에 따라 혜택을 주는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일리지 카드가 있으면 아무래도 단골고객이라고 해서 좀더 신경을 써줄 때가 많다.
한 마디로 ‘절약’을 위해 아니 ‘작은 사치’를 위해 라이프 스타일까지 바꿨다. 물론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기도 한다. 때론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주변에서 ‘왕소금’이란 원성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절약의 진짜 재미를 알게 된다. 이제 절약은 돈을 아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가족의 행복에 한발 짝 다가서고 있다는 보람과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아껴 모은 돈이 가족의 행복을 일구는 텃밭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의 그림자가 온 세상에 드리워져 있다. 경제위기는 가정도 비켜가지 않았다. 많은 가정이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가족관계도 예전 같지않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럴 때 행복을 사는 작은 사치로 집안 분위기를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박철 국민은행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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