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자영업은 해체중]금융위기에 또 무너진 김병호씨 20년
“이젠 꿈도 없어요 먹고사는 게 전쟁이죠”
대기업 부도·외환위기로 2번 부도
금융위기로 일거리 없어 하층 전락
김병호(45·가명)씨는 모두가 잠든 새벽 4시 30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작업현장인 동두천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바삐 서둘러야 한다. 새벽 출근한 지 10년이 넘었건만 지금도 일어날 때마다 좀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내 처지에 무슨…” 생각을 하며 그는 가족들이 깰까봐 조심스레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현관을 나서자 초가을 차가한 공기가 그를 맞이한다. 찬 기운에 그의 몸은 가벼운 경련을 일으킨다.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아침 해가 아파트 숲 너머로 떠오른다. 인테리어업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그는 요즘 3층 건물 하자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
오후 6시. 일을 마친 그는 곧장 집으로 향한다. 가끔은 술 한 잔으로 피곤함을 씻기도 하지만 얼마 안되는 술값조차 아까워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진다. 김씨는 가족 6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에 일을 많이 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하다. 건설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이상 일거리가 늘지 않고, 벌이가 신통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특히 부모 집에 얹혀살고 있는 형편이라 부인과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 전셋집이라도 구해야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한 달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다. 월 200만원 벌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그의 손에서는 담배가 떠나지 않는다.
일찍이 사업에 뛰어들어 젊은 나이에 의류업체를 설립, 사업이 번창할 때만해도 그는 대그룹을 꿈꿨다. 밤이 새도록 일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벌이도 쏠쏠했다. 그의 가슴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거래하던 대기업 부도 여파로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고, 회사를 살리고자 모든 노력에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이 부도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한번 무너진 김씨의 삶은 10여년이 지나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부도-외환위기-글로벌 금융위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꿈과 희망요? 나도 한때는 꿈과 희망을 가졌었죠. 꿈과 희망이 있어 모든 게 힘들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꿈과 희망이 나에게는 사치입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나의 모든 것이 된지 오래입니다.”
김씨는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삶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며 한숨을 내 쉬었다.
큰 꿈을 품고 사업전선으로
김씨는 80년대 초 “공부보다 돈 버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곧바로 서울시 봉천동에 있는 의류회사에 취업했다. 논노 등 브랜드 제품을 하도급 받아 의류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회사였다. 보조생활을 시작으로 디자인, 제단, 재봉 등 의류제작 기술을 배웠다. 이곳에서 배운 기술과 인연은 앞으로 설립할 회사의 기반이 됐다.
회사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중단한 학업을 마치고 싶어 대입검정고시 공부를 시작, 학원에 등록한지 8개월만에 합격했다.
김씨는 이때부터 자신이 회사를 운영하고 싶었다. 차근히 준비한 끝에 1989년 직원 4명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그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논노 등 브랜드 물량을 넘겨받아 일감은 충분했다. 성실히 일한 점을 인정받아 물량은 점차 늘어났다.
1990년경 김씨 수입이 월 300만원을 넘었다. 20대 중반을 갓 넘긴 총각으로는 썩 괜찮은 벌이였다. 23평 빌라도 구입했다. “눈에 띄게 회사가 성장하자 꿈도 커졌죠. 대기업들처럼 그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나 하나 준비하자고 다짐했죠.”
부도로 아내도 돈벌이 나서
김씨의 희망은 얼마가지 않아 위기에 직면했다. 잘나가던 회사가 1992년 논노 부도와 1993년부터 실시된 금융실명제로 인해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
논노가 부도나자 논노와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어음 8800만원이 휴지조각이 됐다. 논노 채권단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건져보려 했으나 액수가 적다는 이유로 채권단에 끼지도 못했다.
다음해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자금사정을 악화시켰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사채금리는 올라가고, 진성어음 이외는 어음할인이 불가능 했다. 당시 의류업계 결제 수단은 대부분 어음이었다. 어음을 받은 하청업체는 할인을 해 운전자금으로 활용했다.
어음할인이 불가능해지자 할인율은 상상을 초월했다. 보통 할인율이 연 25%였다. 급전인 경우에는 연 50~70%까지 받았다.
자금 여유가 없는 소규모 업체들은 대부분 높은 할인율을 감당하면서 어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규모 업체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졌고 김씨 또한 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포함 3억원 가량의 부도를 맞았다.
그런데도 김씨는 자재값, 인건비 등을 해결해야 했기에 집을 팔고, 방 1개 있는 전세 800만원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가지고 있던 모든 통장을 털었지만 갚아야 할 액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채권자들과 합의해 빚을 청산하고, 회사 문을 닫았다. 이때부터 아내도 돈벌이에 나섰다.
“결혼한지 2년만에 회사를 부도 내고 집까지 팔았으니 정말 미안했습니다. 이사한 집이 차고를 개조한 것이어서 환경이 좋지 않아 아이를 처가로 보냈어요. 너무 힘들어 여러 차례 한강에 갔지만 아내와 아이가 떠올라 다시 돌아왔죠.”
지금도 그는 아내와 갓 태어난 딸 다정이를 볼 때면 가슴이 찢어진다.
IMF에 부서진 꿈
모든 것을 잃은 그는 하루도 쉴 수 없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던 그에게 건설업을 하던 선배는 인테리어업을 권했다. 당시만 해도 건설업이 활황이었기 탓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전혀 모르는 분야였지만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건설·인테리어 점포를 내고 개인사업자로 나섰다. 건축 붐으로 일거리는 많았다. 집도 구하고 다정이도 데려와야 했기에 하루도 쉬지 않았다. 절망에서 빠져 나오는 듯 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또다시 그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로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대기업이 공중분해 됐다. 건설회사들도 무너지고 건설 붐은 한파를 맞았다.
하청을 준 기업이 부도를 내거나, 모텔 상가 주택 등 공사를 하고도 대금을 받지 못한 액수가 2억원이 넘는다. 외환위기로 미수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당시에는 큰 기업 하청업체들은 계약서 작성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어요. 대부분 하청은 계약서 없이 공사를 진행했죠. 특히 공사대금을 보통 70~80%만 결제해줘 공사하다보면 수천만원씩 미수금을 가지고 있었어요.”
건설·인테리어업으로 전환한 지 1년만에 두 번째 부도를 맞은 것이다. “더럽게 운도 따르지 않았다”며 김씨는 담배를 물었다.
이제는 꿈도 희망도 없다
두 번째 사업을 접으며 그는 ‘꿈’도 ‘희망’도 버렸다. 두 번의 사업실패로 친인척과 가족에게 피해를 안긴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진짜로 죽고 싶었어요. 믿고 도와준 이들에게 피해만 주었으니까요. 그들이 나를 믿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답을 해야죠. 그래서 악착같이 일을 한 겁니다.” 사업자 신고와 폐업 신고하기를 여러 차례. 일이 적을 때는 사업자 신고를 하지 않고 일을 했다.
하늘이 도왔을까.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건설경기가 살아나 김씨 벌이도 쏠쏠했다. 월 평균 400만원 이상은 집으로 가져갔다. 빚도 갚으면서 15평 아파트도 장만했다.
2003년 카드대란때 약간의 사고는 있었지만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2005년부터 점점 건설경기가 위축되면서 김씨 사업도 서서히 어려워졌다. 아내가 운영하던 미용실도 손님이 줄어들자 월세를 감당 못해 최근 문을 닫고, 아내는 화장품 판매원을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하던 모텔이 압류당해 3000만원 가량의 공사대금을 떼이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자재값, 인건비 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구입한지 3년 된 아파트를 팔고 노모 집으로 들어갔다. 전세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빚쟁이 독촉을 받고 있다. 그동안 조금씩 빚을 갚았지만 여전히 3000만원이 남아있다. 보기엔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남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주택마련통장 하나없는 김씨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다. 김씨 가족은 아내와 맞벌이로 올해들어와 월 평균 300만원 정도 번다. 소득이 안정적이지 않고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지만 이 정도 수입도 수년만에 맛보고 있다.
“나에게 미래는 없어요. 하루 하루 살기위해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겁니다. 꿈과 희망이요? 그런 거 없어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
공사 현장으로 돌아가는 김씨의 어깨가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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