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축소판’벽초 홍명희의 굴곡진 가족사(어깨)
조부는 친일 자신은 월북‘독립운동가 벽초’는 없다
고향 고택에 이름도 못붙여 … 상속땅 환수당할 판
“민족해방운동에 족적 남긴 민족지도자”재평가 필요
한국 민족문학 최고봉‘임꺽정’의 작가이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벽초 홍명희. 그러나 해방이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인간 홍명희의 삶은 남한에서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특히 자신과 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조부의 친일행적으로‘친일파 후손’이란 딱지마저 따라붙고 있다. 최근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충북의 고향 땅마저 국가에 환수당할 위기에 놓였을 정도다. 적어도 남한에선 벽초 개인적인 삶보다는 가족사가 더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벽초가 남긴 삶의 자취를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홍명희는 실제 박은식, 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동제사’의 해외 독립 운동에 가담했으며 3.1 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또 1920년대 신사상연구회와 화요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으며 좌우익 세력이 최초로 연대한 민족연합전선체인 신간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헌신하다 재차 투옥됐다. 벽초는 전통적인 한학의 세계로부터 근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을 부단히 혁신해 나간‘지성의 소유자’로 통한다.
때문에‘친일파’할아버지 ‘애국자’아버지 ‘월북자’홍명희로 이어지는 벽초의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를 집약해 놓았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3.1운동 90주년을 맞아 벽초와 벽초 가족의 굴곡지고 기구한 삶을 되돌아본다.
◆‘조선 천재’유학 때 민족의식 싹 터 = 벽초 홍명희는 혜경궁 홍씨가 태어난 풍산 홍씨 추만공파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다. 유년기 한학 수업을 받을 때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한 살 무렵에는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읽기 시작해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근대적인 학교가 활발히 설립되던 무렵 홍명희는 중교의숙 일어과에 입학해 초보적인 수준의 근대학문을 배운다.
일본 다이세이 중학 유학시절에는 학업 성적이 우수해 ‘만조보’에 한인수재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후일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조선 삼재’로 불린다.
일본 유학은 홍명희에게 민족의식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벽초는‘대한흥학보’에 기고한 ‘일괴열혈’이라는 시에서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 앞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은 ‘지방열(지역감정)’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는 것만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부친 자결, 민족운동가로서 내적 성장 =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경술국치때 벽초의 부친 홍범식(1871~1910)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당시 금산군수를 지내고 있던 홍범식 선생은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 벽초는 부친의 유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부친의 순국 이후 한동안 은둔하다시피 하며 지내던 홍명희는 1912년 가을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한다.
이 시절 홍명희는 새로운 서양 문물을 접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가로서나 문학인으로서 내면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해외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홍명희는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검거되어 1년 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는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다양한 사회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다 1926년말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해 ‘참다운 민족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간회운동’을 전개하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다.
◆운둔 끝내자 정치소용돌이 휘말려 = 일제 말 홍명희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하기 위해 창작을 포함한 모든 사회활동을 그만두고 은둔에 들어간다. 1945년 고대하던 해방을 맞은 후 벽초는 정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투신한다. 하지만 신탁통치 파동 중에 좌우익 양측에서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벽초는 좌우익 양측 모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중간파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중간파 정당활동에 나서게 된다. 특히 문맹 타파, 과학사상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같은 정책을 내세운 계몽적 성격이 강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당 결성 이후 중간파 정치세력은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의 회합을 구상하고 추진한다. 벽초의 노력으로 지난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된다.
벽초는 당시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측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 길에 오르게 되며 이때 남북연석회의 이후 북에 잔류하게 된다. 북에 남은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팔순의 나이로 북에서 사망할 때까지 고위직에 남아 있었다. 벽초는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부인 민순영과 함께 안장돼 있다.
◆죽어서도 모이지 못한 가족들 = 벽초 일가의 굴곡진 삶은 친일행적을 한 조부 홍승목(1843~1925)으로부터 비롯된다. 홍승목은 구한말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1907년 2월엔 대동학회 부회장을 맡았는데 대동학회는 전직 고위관리들이 모인 친일 유교단체다. 일제의 조선 총독인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자금을 받았고 총회 때 그를 초청해 연설을 들었다. 홍승목은 아들 홍범식이 자결한 해인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조석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를 지냈으며 1912년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한 아들과 손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셈이다. 최근 친일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월북한 벽초로 인해 가족들이 남북으로 갈라섰고 결국 죽어서도 벽초 일가는 모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벽초의 조부 부친 생모와 계모는 충북 괴산군 제월리에 묻혀있다. 벽초가 4살 때 홍범식과 결혼한 계모 조씨, 제수 김씨는 1948년 벽초와 함께 월북을 않고 고향에 남았다가 6.25 전쟁때 월북자 가족이란 ‘죄 아닌 죄’로 사살됐다.
벽초 일가의 비극과 영광이 중첩된 삶이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벽초 일가의 기구했던 삶의 여정은 지금도 재연되고 있다.
지난해 충북 괴산군에 있는 벽초 고택은 괴산군이 매입해 어렵사리 복원됐지만 보수단체의 반대로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했다. 이름도‘괴산 동부리 고가’라고 붙어졌다. 또 홍명희 이름의 문학제가 열리고 있지만 그의 호를 딴 ‘벽초 신인문학상’역시 보수단체 반대로 무산됐다. 여기에 최근엔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벽초가 상속권자인 16만평에 달하는 땅을 환수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면서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지만 조부의 친일이력 때문에‘친일파 후손’이란 멍에만 떠안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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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는 친일 자신은 월북‘독립운동가 벽초’는 없다
고향 고택에 이름도 못붙여 … 상속땅 환수당할 판
“민족해방운동에 족적 남긴 민족지도자”재평가 필요
한국 민족문학 최고봉‘임꺽정’의 작가이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벽초 홍명희. 그러나 해방이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인간 홍명희의 삶은 남한에서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특히 자신과 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조부의 친일행적으로‘친일파 후손’이란 딱지마저 따라붙고 있다. 최근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충북의 고향 땅마저 국가에 환수당할 위기에 놓였을 정도다. 적어도 남한에선 벽초 개인적인 삶보다는 가족사가 더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벽초가 남긴 삶의 자취를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홍명희는 실제 박은식, 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동제사’의 해외 독립 운동에 가담했으며 3.1 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또 1920년대 신사상연구회와 화요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으며 좌우익 세력이 최초로 연대한 민족연합전선체인 신간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헌신하다 재차 투옥됐다. 벽초는 전통적인 한학의 세계로부터 근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을 부단히 혁신해 나간‘지성의 소유자’로 통한다.
때문에‘친일파’할아버지 ‘애국자’아버지 ‘월북자’홍명희로 이어지는 벽초의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를 집약해 놓았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3.1운동 90주년을 맞아 벽초와 벽초 가족의 굴곡지고 기구한 삶을 되돌아본다.
◆‘조선 천재’유학 때 민족의식 싹 터 = 벽초 홍명희는 혜경궁 홍씨가 태어난 풍산 홍씨 추만공파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다. 유년기 한학 수업을 받을 때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한 살 무렵에는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읽기 시작해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근대적인 학교가 활발히 설립되던 무렵 홍명희는 중교의숙 일어과에 입학해 초보적인 수준의 근대학문을 배운다.
일본 다이세이 중학 유학시절에는 학업 성적이 우수해 ‘만조보’에 한인수재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후일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조선 삼재’로 불린다.
일본 유학은 홍명희에게 민족의식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벽초는‘대한흥학보’에 기고한 ‘일괴열혈’이라는 시에서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 앞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은 ‘지방열(지역감정)’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는 것만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부친 자결, 민족운동가로서 내적 성장 =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경술국치때 벽초의 부친 홍범식(1871~1910)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당시 금산군수를 지내고 있던 홍범식 선생은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 벽초는 부친의 유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부친의 순국 이후 한동안 은둔하다시피 하며 지내던 홍명희는 1912년 가을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한다.
이 시절 홍명희는 새로운 서양 문물을 접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가로서나 문학인으로서 내면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해외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홍명희는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검거되어 1년 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는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다양한 사회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다 1926년말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해 ‘참다운 민족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간회운동’을 전개하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다.
◆운둔 끝내자 정치소용돌이 휘말려 = 일제 말 홍명희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하기 위해 창작을 포함한 모든 사회활동을 그만두고 은둔에 들어간다. 1945년 고대하던 해방을 맞은 후 벽초는 정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투신한다. 하지만 신탁통치 파동 중에 좌우익 양측에서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벽초는 좌우익 양측 모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중간파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중간파 정당활동에 나서게 된다. 특히 문맹 타파, 과학사상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같은 정책을 내세운 계몽적 성격이 강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당 결성 이후 중간파 정치세력은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의 회합을 구상하고 추진한다. 벽초의 노력으로 지난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된다.
벽초는 당시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측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 길에 오르게 되며 이때 남북연석회의 이후 북에 잔류하게 된다. 북에 남은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팔순의 나이로 북에서 사망할 때까지 고위직에 남아 있었다. 벽초는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부인 민순영과 함께 안장돼 있다.
◆죽어서도 모이지 못한 가족들 = 벽초 일가의 굴곡진 삶은 친일행적을 한 조부 홍승목(1843~1925)으로부터 비롯된다. 홍승목은 구한말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1907년 2월엔 대동학회 부회장을 맡았는데 대동학회는 전직 고위관리들이 모인 친일 유교단체다. 일제의 조선 총독인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자금을 받았고 총회 때 그를 초청해 연설을 들었다. 홍승목은 아들 홍범식이 자결한 해인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조석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를 지냈으며 1912년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한 아들과 손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셈이다. 최근 친일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월북한 벽초로 인해 가족들이 남북으로 갈라섰고 결국 죽어서도 벽초 일가는 모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벽초의 조부 부친 생모와 계모는 충북 괴산군 제월리에 묻혀있다. 벽초가 4살 때 홍범식과 결혼한 계모 조씨, 제수 김씨는 1948년 벽초와 함께 월북을 않고 고향에 남았다가 6.25 전쟁때 월북자 가족이란 ‘죄 아닌 죄’로 사살됐다.
벽초 일가의 비극과 영광이 중첩된 삶이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벽초 일가의 기구했던 삶의 여정은 지금도 재연되고 있다.
지난해 충북 괴산군에 있는 벽초 고택은 괴산군이 매입해 어렵사리 복원됐지만 보수단체의 반대로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했다. 이름도‘괴산 동부리 고가’라고 붙어졌다. 또 홍명희 이름의 문학제가 열리고 있지만 그의 호를 딴 ‘벽초 신인문학상’역시 보수단체 반대로 무산됐다. 여기에 최근엔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벽초가 상속권자인 16만평에 달하는 땅을 환수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면서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지만 조부의 친일이력 때문에‘친일파 후손’이란 멍에만 떠안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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