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은 연중기획 ‘사람이 희망이다’를 연재하며 ‘사람’에게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하는 우리 이웃과 동료를 만나 그들이 일구어가는 희망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지면 만들기에 독자 여러분도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희망을 가꾸는 이웃과 동료를 소개해주세요.(문의:내일신문 자치행정팀 02-2287-2266)
“1년에 300번은 아차산에 올라요. 150~160일 정도는 문화유적답사단을 안내하고 나머지는 개인적으로 가는 거예요.”
산에서 내려와서도 그리 멀리 떠나지 않는다. 산자락 아차산생태공원에 마련된 한평 남짓한 아차산향토자료실에서 옛 문헌을 뒤지며 산에 얽힌 설화나 무속 자료에 집중한다.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가거나 지방으로 현장답사 갈 때만 온전히 광진구를 벗어날 뿐이다.
1989년부터 자그마치 20년째다. 김민수(62)씨를 보고 사람들은 ‘아차산 산신령’이라거나 ‘기인’이라고 부른다. 운동복 상하의에 등산화, 등산모자 차림인 그를 보니 별명이 틀리지 않다 싶다. 그러나 그는 아차산자락에 살며 아차산이 품고있는 역사적 흔적을 좇는 향토사학자다. 남한 내 고구려 흔적인 아차산성과 아차산보루를 세상에 소개한 주역이기도 하다.
‘민방위아저씨’가 역사가로
“88올림픽 다음해였는데 늦여름에 아차산 기슭에 산불이 발생했어요. 민방위라 진화작업에 ‘동원’됐죠.”
김민수씨는 우연한 기회에 아차산과 인연을 맺었다. 첫날 진화작업을 마친 뒤 다음날 잔불끄기에 참여하면 다음번 민방위훈련을 빼준다기에 선뜻 응했다. 화마가 삼키고 간 흔적을 좇던 그는 독특한 돌무지를 발견했다.
“돌무지 사이에 잔불이 남아있는데 껐다 싶으면 그 옆에서 일어나고를 반복하면서 잘 꺼지지 않는 거예요. 한참을 씨름하다보니까 돌무지 형태가 드러나는데 길게 이어진 것이 성곽의 흔적 같았어요.”
산마루까지 이어진 돌무지는 움푹 파인 큰 구덩이와 연결돼있었다. 구덩이 내부는 바닥이 평탄했고 바깥을 두른 벽면에는 돌로 쌓은 흔적이 선연했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많은 생각이 스쳤다. 옛 방어시설이라는 확신을 갖고 아차산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산마루 능선의 돌무지며 돌무지와 연결된 보루성, 계곡을 막은 차단성, 무너진 석탑, 돌무덤 유구, 폐허가 된 사찰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지….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져버릴 것 같아 셔터를 눌러댔다. ‘문화유산을 찾아냈다’고 외치고 싶어서 한 달음에 관계 기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허공 속 메아리처럼 흩어져버렸다.
“미친 사람이 헛것을 보고 귀찮게 하는 것쯤으로 여기더라구요. 구덩이가 말을 매놓는 곳이라고 얘기한 전문가도 있어요. 나중에는 활자로 된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제대로 확인도 않고 눈을 돌려버린 학자들에 대한 원망은 ‘왜 나라고 연구를 못하랴’ 싶은 자신감과 오기로 바뀌었다. 내친 김에 직접 공부하기로 했다. 1년여만에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라는 짤막한 논문을 펴냈다. 유적·유구라고 생각되는 장성과 병영지를 나름대로 만든 지도에 표시하고 사진을 첨부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토대로 돌무지는 아차산성 즉 신라의 북한산성이라는 추론을 내놨다. 온달장군 전사지라고까지 짚었다.
아차산 신령이 신내림처럼…
김민수씨는 광진구 토박이가 아니다. 그를 광진구로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아차산이었다. 제주 출신인 그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인연으로 결혼 후 강동구 천호동에 둥지를 틀었을 때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데 산이 너무 좋아요. 저 산 밑에서 살아야겠다 싶어서 이사를 왔는데 바로 산불이 났죠.”
김씨가 첫 논문을 발표한지 7년만인 1997년부터 아차산 일대에서 유물·유적 발굴이 시작됐다. 서울대와 고려대 조사단이 파견됐고 수차례 발굴작업 끝에 아차산은 무수한 ‘보물’을 쏟아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연화문화당을 비롯해 아차산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5605점. 아차산성은 사적 제234호로, 보로군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됐다.
“지금은 아차산이 고대사의 보고로 각광받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아차산 신령이 나를 통해 신내림처럼 외친 것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김민수씨는 ‘향토사가’로 첫 발을 내디뎠고 어느새 아차산과 고대사에 흠뻑 빠져버렸다. ‘잘 나가던’ 건축가가 갑자기 산에만 매달리니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1994년 향토사료연구논문 최우수상을 받고 1999년 사료조사 공로상을 받은데 이어 2000년 향토사연구논문 대상을 받았건만 그뿐이었다. 연구 분야를 한강과 고대사 전반으로 넓혀 논문 수편을 발간해냈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돈벌이가 안되니 전업 역사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살림살이는 사업가 시절 저축으로 꾸렸고 ‘향토사가’는 가끔 강의료만 보탤 정도였다.
“요즘은 남들이 좀 알아봐줘서 가족들 서운함이 덜해요. 이래봬도 고대사 분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거든요.”
광진구에서도 2002년 생태공원 안에 아차산향토자료실을 개설하고 고구려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주 토·일요일과 공휴일, 평일에도 20명 이상 신청자가 있으면 김씨는 산을 오른다. 홍련봉보루부터 온달장군주먹바위 용마산보루까지 훑으며 고구려 유물과 유적에 대해 알린다.
동네사람 무덤도 찾아줘
김민수씨는 요즘 부여 인근을 자주 다닌다. 12년 전에 쓴 논문을 다시 쉽게 고고학적 자료를 덧붙여 정리하는 중이다. 계백장군이 전사한 황산벌이 계백현 즉 현재의 행주라는 주장을 담을 계획이다.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까지 5년을 소요했던 평범한 동네 아저씨는 자신만의 학설을 내놓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김민수씨는 여전히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향토사학자’다. 그가 다른 어떤 연구진보다 바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연구와 함께 동네일을 겸하고 있어서다.
“집안 족보를 들고 와 해석해달라고 하거나 조상 무덤을 찾아달라고도 해요. 시간 없다고 내치는 일은 없어요. 동네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는 게 좋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 맡기는 일거리 역시 아차산이 간직한 역사다. 그는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내 전설이며 무속을 어린이들을 위한 설화로, 어른들을 위한 야사로 정리한다. 김씨는 “역사라는 큰 줄기가 있다면 민속이나 전설 무속 등은 다양하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도 아차산은 “무궁무진한 역사의 보고”다.
“요즘은 사명감이 생겼어요. 고대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예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아차산 자연과 함께 정서·문화적인 부분까지 알려줘야겠다 싶구요.”
김민수씨는 아차산을 두고 경쟁하는 광진구와 구리시에 대해 “싸우는 형상으로 가서는 고구려까지 망가진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지자체가 역사찾기에 나섰으니 중앙 정부에서 고마워해야죠. 다만 기획이나 예산부분에서 과다·중복이 안되도록 조율할 필요는 있어요. 광진구는 인근 백제·선사문화유적지와 함께 고대사 벨트로 묶고 구리시는 넓은 땅을 활용해 고구려 체험학습을 하도록 하면 돼요.”
김민수씨 말대로 “남한의 고구려에 북한과 요동의 고구려까지 합치면 국호 ‘코리아’도 찾을 수 있을 것”같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아차산향토자료실은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아차산 생태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다. 2002년부터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학습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중요 문화재인 아차산성과 아차산일대보루군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김민수씨 안내로 아차산 고구려 유물과 유적에 대한 강의와 탐방을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기프로그램은 매주 토·일요일과 공휴일에 개설된다. 평일에 개설하는 임시 프로그램은 학교나 단체 주민이 20명 이상 신청하면 가능하다.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1코스는 홍령봉보루~아차산성~옛무덤(석곽분)~온달장군주먹바위~아차산보루. 일반 시민이 대상인 2코스는 여기에 용마산보루까지 더했다. 광진구청 문화체육과에 신청하거나 김민수씨에게 직접 연락하면 탐방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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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300번은 아차산에 올라요. 150~160일 정도는 문화유적답사단을 안내하고 나머지는 개인적으로 가는 거예요.”
산에서 내려와서도 그리 멀리 떠나지 않는다. 산자락 아차산생태공원에 마련된 한평 남짓한 아차산향토자료실에서 옛 문헌을 뒤지며 산에 얽힌 설화나 무속 자료에 집중한다.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가거나 지방으로 현장답사 갈 때만 온전히 광진구를 벗어날 뿐이다.
1989년부터 자그마치 20년째다. 김민수(62)씨를 보고 사람들은 ‘아차산 산신령’이라거나 ‘기인’이라고 부른다. 운동복 상하의에 등산화, 등산모자 차림인 그를 보니 별명이 틀리지 않다 싶다. 그러나 그는 아차산자락에 살며 아차산이 품고있는 역사적 흔적을 좇는 향토사학자다. 남한 내 고구려 흔적인 아차산성과 아차산보루를 세상에 소개한 주역이기도 하다.
‘민방위아저씨’가 역사가로
“88올림픽 다음해였는데 늦여름에 아차산 기슭에 산불이 발생했어요. 민방위라 진화작업에 ‘동원’됐죠.”
김민수씨는 우연한 기회에 아차산과 인연을 맺었다. 첫날 진화작업을 마친 뒤 다음날 잔불끄기에 참여하면 다음번 민방위훈련을 빼준다기에 선뜻 응했다. 화마가 삼키고 간 흔적을 좇던 그는 독특한 돌무지를 발견했다.
“돌무지 사이에 잔불이 남아있는데 껐다 싶으면 그 옆에서 일어나고를 반복하면서 잘 꺼지지 않는 거예요. 한참을 씨름하다보니까 돌무지 형태가 드러나는데 길게 이어진 것이 성곽의 흔적 같았어요.”
산마루까지 이어진 돌무지는 움푹 파인 큰 구덩이와 연결돼있었다. 구덩이 내부는 바닥이 평탄했고 바깥을 두른 벽면에는 돌로 쌓은 흔적이 선연했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많은 생각이 스쳤다. 옛 방어시설이라는 확신을 갖고 아차산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산마루 능선의 돌무지며 돌무지와 연결된 보루성, 계곡을 막은 차단성, 무너진 석탑, 돌무덤 유구, 폐허가 된 사찰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지….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져버릴 것 같아 셔터를 눌러댔다. ‘문화유산을 찾아냈다’고 외치고 싶어서 한 달음에 관계 기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허공 속 메아리처럼 흩어져버렸다.
“미친 사람이 헛것을 보고 귀찮게 하는 것쯤으로 여기더라구요. 구덩이가 말을 매놓는 곳이라고 얘기한 전문가도 있어요. 나중에는 활자로 된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제대로 확인도 않고 눈을 돌려버린 학자들에 대한 원망은 ‘왜 나라고 연구를 못하랴’ 싶은 자신감과 오기로 바뀌었다. 내친 김에 직접 공부하기로 했다. 1년여만에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라는 짤막한 논문을 펴냈다. 유적·유구라고 생각되는 장성과 병영지를 나름대로 만든 지도에 표시하고 사진을 첨부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토대로 돌무지는 아차산성 즉 신라의 북한산성이라는 추론을 내놨다. 온달장군 전사지라고까지 짚었다.
아차산 신령이 신내림처럼…
김민수씨는 광진구 토박이가 아니다. 그를 광진구로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아차산이었다. 제주 출신인 그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인연으로 결혼 후 강동구 천호동에 둥지를 틀었을 때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데 산이 너무 좋아요. 저 산 밑에서 살아야겠다 싶어서 이사를 왔는데 바로 산불이 났죠.”
김씨가 첫 논문을 발표한지 7년만인 1997년부터 아차산 일대에서 유물·유적 발굴이 시작됐다. 서울대와 고려대 조사단이 파견됐고 수차례 발굴작업 끝에 아차산은 무수한 ‘보물’을 쏟아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연화문화당을 비롯해 아차산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5605점. 아차산성은 사적 제234호로, 보로군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됐다.
“지금은 아차산이 고대사의 보고로 각광받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아차산 신령이 나를 통해 신내림처럼 외친 것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김민수씨는 ‘향토사가’로 첫 발을 내디뎠고 어느새 아차산과 고대사에 흠뻑 빠져버렸다. ‘잘 나가던’ 건축가가 갑자기 산에만 매달리니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1994년 향토사료연구논문 최우수상을 받고 1999년 사료조사 공로상을 받은데 이어 2000년 향토사연구논문 대상을 받았건만 그뿐이었다. 연구 분야를 한강과 고대사 전반으로 넓혀 논문 수편을 발간해냈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돈벌이가 안되니 전업 역사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살림살이는 사업가 시절 저축으로 꾸렸고 ‘향토사가’는 가끔 강의료만 보탤 정도였다.
“요즘은 남들이 좀 알아봐줘서 가족들 서운함이 덜해요. 이래봬도 고대사 분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거든요.”
광진구에서도 2002년 생태공원 안에 아차산향토자료실을 개설하고 고구려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주 토·일요일과 공휴일, 평일에도 20명 이상 신청자가 있으면 김씨는 산을 오른다. 홍련봉보루부터 온달장군주먹바위 용마산보루까지 훑으며 고구려 유물과 유적에 대해 알린다.
동네사람 무덤도 찾아줘
김민수씨는 요즘 부여 인근을 자주 다닌다. 12년 전에 쓴 논문을 다시 쉽게 고고학적 자료를 덧붙여 정리하는 중이다. 계백장군이 전사한 황산벌이 계백현 즉 현재의 행주라는 주장을 담을 계획이다.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까지 5년을 소요했던 평범한 동네 아저씨는 자신만의 학설을 내놓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김민수씨는 여전히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향토사학자’다. 그가 다른 어떤 연구진보다 바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연구와 함께 동네일을 겸하고 있어서다.
“집안 족보를 들고 와 해석해달라고 하거나 조상 무덤을 찾아달라고도 해요. 시간 없다고 내치는 일은 없어요. 동네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는 게 좋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 맡기는 일거리 역시 아차산이 간직한 역사다. 그는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내 전설이며 무속을 어린이들을 위한 설화로, 어른들을 위한 야사로 정리한다. 김씨는 “역사라는 큰 줄기가 있다면 민속이나 전설 무속 등은 다양하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도 아차산은 “무궁무진한 역사의 보고”다.
“요즘은 사명감이 생겼어요. 고대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예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아차산 자연과 함께 정서·문화적인 부분까지 알려줘야겠다 싶구요.”
김민수씨는 아차산을 두고 경쟁하는 광진구와 구리시에 대해 “싸우는 형상으로 가서는 고구려까지 망가진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지자체가 역사찾기에 나섰으니 중앙 정부에서 고마워해야죠. 다만 기획이나 예산부분에서 과다·중복이 안되도록 조율할 필요는 있어요. 광진구는 인근 백제·선사문화유적지와 함께 고대사 벨트로 묶고 구리시는 넓은 땅을 활용해 고구려 체험학습을 하도록 하면 돼요.”
김민수씨 말대로 “남한의 고구려에 북한과 요동의 고구려까지 합치면 국호 ‘코리아’도 찾을 수 있을 것”같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아차산향토자료실은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아차산 생태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다. 2002년부터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학습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중요 문화재인 아차산성과 아차산일대보루군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김민수씨 안내로 아차산 고구려 유물과 유적에 대한 강의와 탐방을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기프로그램은 매주 토·일요일과 공휴일에 개설된다. 평일에 개설하는 임시 프로그램은 학교나 단체 주민이 20명 이상 신청하면 가능하다.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1코스는 홍령봉보루~아차산성~옛무덤(석곽분)~온달장군주먹바위~아차산보루. 일반 시민이 대상인 2코스는 여기에 용마산보루까지 더했다. 광진구청 문화체육과에 신청하거나 김민수씨에게 직접 연락하면 탐방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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