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처시리즈1

지역내일 2009-02-23
전자바우처, 사랑과 꿈을 이어주다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가 우리나라 사회복지 전달체계에 변화를 주고 있다. 기관 위주, 공급자 위주에서 서비스 이용자 위주, 소비자 위주로 바꾸는 전환점에 전자바우처가 있다. 현재는 활동이 어려운 노인과 장애인, 산모, 아동 등 사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용권을 발급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일신문은 3회에 걸쳐 전자바우처 이용사례와 실태, 과제 등을 살펴본다.

“바깥출입 삼가던 내가 걷기대회도 참가”
시각장애 딛고 재활의 희망 … 가족처럼 돌봐주는 활동도우미 힘 커

지난 20일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부는 서울 보라매공원 운동장. 시각장애인 강태규(41)씨가 활동도우미 이향희(여·52)씨의 도움을 받아 힘차게 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다.
트랙 한바퀴는 700mm. 강씨는 이 트랙을 보통 7바퀴 정도 돈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의 발거움은 가볍기만 하다.
일주일에 5번 이씨를 만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누구보다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강씨로서는 이씨의 도움이 없다면 바깥 공기를 마시며 이렇게 힘차게 운동할 수 없다.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혼자 장애인 지팡이를 이용해 걷게 되면 속도가 더뎌 전혀 운동이 되지 않으며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일에 대처를 할 수 없어 위험하기도 합니다.”
강씨는 몇 년 전 시력을 빼앗아간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독한 스테로이드제를 4년간 복용하다보니 뼛속 칼슘이 빠져나가 골다공증 증세가 생겼다. 햇볕을 쬐며 정기적으로 운동을 해야 골다공증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예전엔 운동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강씨는 말을 주고받을 때만 조금 속도를 늦출 뿐이다. 오후에 있던 황사도 모두 사라져 날씨가 좋았다.
“처음 눈이 안보이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집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었죠.”
서울맹학교를 다닐 때는 기숙사 바깥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부름의 전화’가 마련한 20km 걷기대회를 거뜬히 치른다. 지난해 10월 경남 진주에서 열린 걷기대회에 참석해 완주했다. 아차산과 남산도 오른다. 다 활동도우미 때문이란다.
강씨는 직업군인이었다. 지난 2001년 육군상사로 전역할 때만 해도 세상 누구 부럽지 않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전역한지 얼마되지 않아 눈에 포도막염이라는 질환이 생겼다. 처음엔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더니 2006년부터는 아예 빛도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됐다.
그는 ‘내 삶에 희망을 준 천사’라는 수기에서 “실명 뒤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서 ‘행복’이나 ‘희망’이라는 단어는 나와 관계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라디오를 듣다가 전자바우처를 통한 장애인활동도우미사업을 알게 됐다.
지금의 도우미 이씨를 만나기 전에는 봉사단체를 통해 일회적이거나 급한 용무만 도움을 받을 뿐이었다.
전자바우처 제도를 통해 장애인과 도우미를 직접 연결해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강씨는 기대가 컸다.
강씨는 공부와 체력단련, 문화생활을 이씨와 함께 하고 있다.
얼마전 독립영화 하나인 ‘워낭소리’를 극장에서 봤다. 이씨가 표정이나 옷차림, 배경 등을 간단히 설명해준다. 강씨는 어렸을 때 생각이 나곤 했다.
군 입대 전까지 드럼을 치며 음악에 심취했던 강씨는 시각장애가 생기고부터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었다. 하지만 활동도우미 이씨를 만난 뒤부터는 달라졌다.
‘열린 음악회’나 ‘7080콘서트’, ‘가요무대’ 등의 방청석에 앉아 가수들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씨가 녹화장 모습과 초대가수들의 옷차림을 설명해주었다.
지난해 7월에는 서울시 남부장애인복지관에서 바자회가 있었다. 음악공연도 있었다. 이씨는 강씨가 내심 드럼을 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강씨를 무대로 이끌었다. 악기 위치를 손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잠깐이나마 드럼을 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강씨는 이제 이씨와 한 가족이다. 이씨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가족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둘째아들과는 목욕을 같이 다니는 사이이다. 특히 첫째아들은 강원도 모 부대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어 서로 잘 통한다. 이 인연으로 지난해 큰아들 부대에 같이 찾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전자바우처 제도가 없었다면 지금같은 도움을 받지 못했을 거고 내 몸은 나빠지고 우울증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품으며 새벽 3시20분쯤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침 5시까지 켬퓨터작업을 한다. 안마와 관련된 내용을 듣거나 직접 자판을 두드리기도 한다. 강씨는 노트북은 시각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소리기능이 들어있다.
의지가 강한 그는 복지관에서 재활훈련을 마치고 맹학교에 입학해 재활과정을 끝냈다. 지난해부터 학사과정 1학년에 재학중이다. 이미 안마사 자격증을 땄다.
지난해는 학교 수업 외에 서울 상왕십리에 있는 이료연구회에 나가 시각장애인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강씨는 이씨의 도움을 받아 용산에서 상왕십리까지 전철을 타고 다닌다. 수업이 끝나고 맹학교 기숙사에 도착하면 10시쯤 된다.
“엘리베이터에 제대로 표시돼 있지 않아서 몇 층에서 환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객차번호가 스크린도어에 표시돼 있으면 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강씨는 3년간 학사과정을 마치고 자그마한 치료실을 운영하고 싶다. 안마를 해주고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힘이 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며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강씨는 시각장애인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컴퓨터’와 ‘점자’, ‘보행편의’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진솔한 얘기 나누는 게 중요”
장애인활동도우미 이향희씨

“장애인에게는 함께 외출하고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장애인활동도우미 이향희(여·53)씨의 말이다.
이씨는 시각장애인 강태규(41)씨와 함게 할 때 기쁨을 느낀다.
이씨는 ‘진심은 통한다’는 수기에서 “작은 정성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고 삶의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값진 일이 있겠는가”고 말했다.
이씨는 어렸을 때 장애인과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의 할머니가 실명해 돌아가실 때까지 이씨가 안내하고 보살펴야했다. 지금 강씨와 보행하면서도 전혀 서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씨는 또 결혼 뒤 13년 동안 전신마비로 누워계신 시어머니 수발을 했다.
그는 장애인들이 외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외로운 사람들은 처음에 말이 별로 없고 표정도 굳어 있으며 접근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했다.
특히 이씨는 가족 모두가 강씨를 한 식구처럼 대한 점이 눈에 띈다.
지난 5월 인천 장봉도로 강씨와 함께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에게 조개와 굴 등을 만져보도록 했다. 서울시 산하단체에 근무하는 이씨의 남편도 곧잘 강씨를 불러 식사를 같이 한다. 식사 때는 숟가락을 잡게 하고 시계방향 순서로 반찬의 종류와 위치를 알려주면 아무 문제없이 먹는다.
“시각장애인은 아무 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장애인이 가진 편견입니다.”
이씨의 보살핌과 도움으로 강씨는 익숙한 일상생활은 충분히 해낸다. 영화를 볼 수 있고 드럼도 칠 수 있다. 가사를 한 소절씩 앞서 알려주면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른다.
이씨는 바우처활동도우미가 상대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간 당 얼마의 돈을 받는 단순한 직업은 아니라고 말한다. 상대방 마음까지 어루만지고 세심하면서도 복잡미묘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가 편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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