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지도자의 반면교사 드골의 교훈(주섭일)
주섭일 주필·고문
민주당의 정풍파문을 지켜보면서 프랑스의 전대통령 드골을 다시 생각한다. 프랑스를 ‘행복공화국’으로 만들고 두 개로 분열된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해 모든 지도자들의 이상적 모델이 됐기 때문이다. 나치독일의 점령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그는 비시정권 편에 섰던 프랑스와 저항운동(레지스탕스)을 지지한 프랑스를 민주적이며 도덕적인 하나의 프랑스로 통합했고 알제리 전쟁시에는 독립과 반독립으로 분열된 두 개의 프랑스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를 도덕적 민주선진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드골이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숙청하는 방식을 썼지만 알제리 독립 때는 국민투표라는 민주주의 방식을 사용했다. 드골은 프랑스 제5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내각제를 거부하고 직선대통령제를 채택했다.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당 시스템이 국민을 분열시켜 국가를 큰 위험에 몰아넣는다. 제4공화국의 내각제에 참여한 정치인들은 애국심과 인격 그리고 가치관에 있어서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거리 이외에는 대표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정치인은 국민전체 이익과 사익(私益)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드골은 패거리정치가 나라를 망치고 사익을 위해 국민이익을 버리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당선후 총재사퇴와 탈당으로 지킨 대통령의 공정성.
그러나 드골은 다당제를 채택함으로써 독재자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좌파 사회당과 좌파인 공산당까지도 자유로운 정당활동을 허용해 현대적 민주주의체제를 세웠다. 그런데 그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거부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한다는 구실로 의회의 패거리정치인들에게 허리를 굽혀야 하는 불확실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통령이 의회에 정부의 책임을 져야하지만 의회를 해산시키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천명하며 ‘대통령은 의회의 여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으로부터 독립하는 국가원수임으로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라고 직선제 대통령의 의미를 해석했다.
드골은 대통령의 공정성과 정통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이는 당리당략을 우선하고 국민의 일부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전체를 대표해 전체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공정성은 총선 때만 되면 여당인 우파를 괴롭혔다. 드골이 이를 내세워 여당을 위한 선거운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운동에 나서 달라는 우파 지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국민은 내가 선거운동에 직접적 방법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국민이 나에게 위임한 임무는 내가 패거리정치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거에서 누구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없다. 대통령의 공정성은 비록 여당이라도 내 이름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엘리제 대통령궁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했지만 여당 지도부 회의를 열거나 여당을 위한 만찬과 같은 행사를 한번도 열지 않았다. 이는 공정성을 손상시켜 국민이익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드골정부의 초대 총리 미셀 드브레가 ‘우리는 여당의 논리를 대통령이 수용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드골은 국민통합을 희망했다. 당 내부에서 이 문제를 두고 토론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라고 후에 기술했듯 끝까지 드골은 패거리정치에서 초월한 전 국민의 대통령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여당의원들을 각료로 임명했음에도 당을 파당으로 보고 거리를 두어 대통령이 국민전체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임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당총재 사퇴는 말할 것도 없고 탈당까지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계승자들인 미테랑 전대통령과 시라크 현대통령이 당선 당일로 당총재직을 사퇴하는 전통은 바로 드골이 만든 것이다.
국민이 원하면 바로 권좌에서 떠난 용단이 비결
드골은 대통령이 의회차원의 정치투쟁에서 자유로워야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국가가 혼란과 위기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이상을 스스로 실천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시대를 종식시켰고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해 핵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인 독일과 화해해 유럽통합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고 고속도로, 에어버스로 유명한 항공산업, 초음속 여객기 콩코르드 개발, 자동차산업의 발전, 항만시설의 현대화, 첨단산업과 방위산업및 철강 등 기간산업의 공유화 및 가장 선진적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어 국민에게 행복을 안겨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 드골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과 세계가 가장 존경하는 대정치인으로 숭앙된다. 그럼에도 사망 30주년을 맞는 2001년 그의 기념관이나 동상 하나 없는 것은 박정희 기념관을 만든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의 유택(幽宅)도 파리에서 35km나 떨어진 시골 마을 코롱베 드제그리즈의 초라한 공동묘지에 한 시민으로 묻혔다는 사실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드골의 큰 정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내치와 외치를 잘 했고 국민이 떠나라면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난 데 드골의 비결이 있고 또 교훈이 있다. 정치위기를 맞은 여권 지도층과 대선 후보들은 마땅히 드골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주섭일 주필·고문
내일시론>
주섭일 주필·고문
민주당의 정풍파문을 지켜보면서 프랑스의 전대통령 드골을 다시 생각한다. 프랑스를 ‘행복공화국’으로 만들고 두 개로 분열된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해 모든 지도자들의 이상적 모델이 됐기 때문이다. 나치독일의 점령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그는 비시정권 편에 섰던 프랑스와 저항운동(레지스탕스)을 지지한 프랑스를 민주적이며 도덕적인 하나의 프랑스로 통합했고 알제리 전쟁시에는 독립과 반독립으로 분열된 두 개의 프랑스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를 도덕적 민주선진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드골이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숙청하는 방식을 썼지만 알제리 독립 때는 국민투표라는 민주주의 방식을 사용했다. 드골은 프랑스 제5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내각제를 거부하고 직선대통령제를 채택했다.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당 시스템이 국민을 분열시켜 국가를 큰 위험에 몰아넣는다. 제4공화국의 내각제에 참여한 정치인들은 애국심과 인격 그리고 가치관에 있어서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거리 이외에는 대표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정치인은 국민전체 이익과 사익(私益)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드골은 패거리정치가 나라를 망치고 사익을 위해 국민이익을 버리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당선후 총재사퇴와 탈당으로 지킨 대통령의 공정성.
그러나 드골은 다당제를 채택함으로써 독재자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좌파 사회당과 좌파인 공산당까지도 자유로운 정당활동을 허용해 현대적 민주주의체제를 세웠다. 그런데 그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거부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한다는 구실로 의회의 패거리정치인들에게 허리를 굽혀야 하는 불확실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통령이 의회에 정부의 책임을 져야하지만 의회를 해산시키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천명하며 ‘대통령은 의회의 여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으로부터 독립하는 국가원수임으로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라고 직선제 대통령의 의미를 해석했다.
드골은 대통령의 공정성과 정통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이는 당리당략을 우선하고 국민의 일부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전체를 대표해 전체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공정성은 총선 때만 되면 여당인 우파를 괴롭혔다. 드골이 이를 내세워 여당을 위한 선거운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운동에 나서 달라는 우파 지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국민은 내가 선거운동에 직접적 방법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국민이 나에게 위임한 임무는 내가 패거리정치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거에서 누구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없다. 대통령의 공정성은 비록 여당이라도 내 이름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엘리제 대통령궁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했지만 여당 지도부 회의를 열거나 여당을 위한 만찬과 같은 행사를 한번도 열지 않았다. 이는 공정성을 손상시켜 국민이익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드골정부의 초대 총리 미셀 드브레가 ‘우리는 여당의 논리를 대통령이 수용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드골은 국민통합을 희망했다. 당 내부에서 이 문제를 두고 토론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라고 후에 기술했듯 끝까지 드골은 패거리정치에서 초월한 전 국민의 대통령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여당의원들을 각료로 임명했음에도 당을 파당으로 보고 거리를 두어 대통령이 국민전체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임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당총재 사퇴는 말할 것도 없고 탈당까지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계승자들인 미테랑 전대통령과 시라크 현대통령이 당선 당일로 당총재직을 사퇴하는 전통은 바로 드골이 만든 것이다.
국민이 원하면 바로 권좌에서 떠난 용단이 비결
드골은 대통령이 의회차원의 정치투쟁에서 자유로워야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국가가 혼란과 위기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이상을 스스로 실천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시대를 종식시켰고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해 핵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인 독일과 화해해 유럽통합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고 고속도로, 에어버스로 유명한 항공산업, 초음속 여객기 콩코르드 개발, 자동차산업의 발전, 항만시설의 현대화, 첨단산업과 방위산업및 철강 등 기간산업의 공유화 및 가장 선진적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어 국민에게 행복을 안겨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 드골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과 세계가 가장 존경하는 대정치인으로 숭앙된다. 그럼에도 사망 30주년을 맞는 2001년 그의 기념관이나 동상 하나 없는 것은 박정희 기념관을 만든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의 유택(幽宅)도 파리에서 35km나 떨어진 시골 마을 코롱베 드제그리즈의 초라한 공동묘지에 한 시민으로 묻혔다는 사실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드골의 큰 정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내치와 외치를 잘 했고 국민이 떠나라면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난 데 드골의 비결이 있고 또 교훈이 있다. 정치위기를 맞은 여권 지도층과 대선 후보들은 마땅히 드골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주섭일 주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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