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논단
임재경
추구하는 용기와 사양하는 용기
한국시간으로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10월 13일)에 밝혀질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에서 유력한 후보에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는가 하면, 6·15
선언이 나온 이후에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더불어 노벨 평화상의 공동수상자로 선정될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무성하였던 까닭이다. 최근에는 부총리를 지낸 한나라당
국회의원 김 모씨가 “여당측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한국식 로비를 하고 있
다”고까지 발언, 노벨상과 관련된 구설마저 곁들인 판국이다.
김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면 수상자 개인의 영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와 겨
레 모두의 자랑거리가 될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들먹일 것까지는 없으려
니와, 교육 및 생활수준 등 어느 모로 보던 간에 “우리나라도 이제는 노벨상을 탈 때가 되지 않았
나”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해마다 단풍이 들 무렵 발표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을 접하고는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했던 일
종의 ‘노벨상 소외감’을 느껴온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웃 나라 일본이 물리학상 문학상
평화상 등을 심심치 않게 탔을 때 노벨상 소외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것은 사촌 밭 사는 데 배
아파하는 단순한 경쟁심리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그와 불가분의 결과인 남북 분단을
노벨상 불임의 간접적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의 불운(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만이 아니라 수상 대상을 구미 중심의 가치기
준으로 재단하는 노벨상 선발위원회의 백인종 내지 구미문명 우월주의, 그리고 반공주의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노벨상 소외감은 비단 한국에 국한될 일은 아닐 줄 안다. 이러한 노벨상의 성격은 일본
의 유가와 히데끼와 중국계 미국인 둘이 물리학상을 탄 것을 제외하면 50년대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전무(全無)하였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70년대 이후 제3세계의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백인 중심주의는 다소 누그러져 평화상 분야는 백
인과 비(非) 백인의 비율이 거의 반반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흑백인
종 차별의 대명사라 할 남아연방의 흑인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가 199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과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하자 구미의 매스컴이 그를 가리켜 “한국의 만
델라”라 표현한 점이다.
이를 확대해석하면 백인 사회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의 훌륭한 자격
자라는 암시나 다름없다. 김 대통령의 끈질긴 반군사독재 투쟁과 카리스마에 더하여 “한국의 만델
라”라는 신문의 표제는 그의 측근과 지지층을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여부로 무게가 달라질 민주투사나 인권운동가
차원의 인물은 이미 아니다.
그런 면에서 국가적 혹은 민족적 난제들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김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돕는 길”이라는 논리가 얼마든지 성립
할 수 있다.
우선 열의 하나, 김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받지 못하더라도 결코 낙담하거나 상심
할 필요가 없다. 평화상의 수상 공적에 남북화해가 결정적 주요 항목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노벨상 수상자 추천이 6·15 선언 이전에 마감되었다는 점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열의 아홉, 김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단독 지명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김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에 겸양의 “노 댕큐”(No! thank you)를
발하는 용기를 내야 할 걱이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전세계를 주름잡는 거대 미디어들을
앞에 놓고 행할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준비한 쪽에서는 맥빠지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제목을 “노벨상을 사양하는 변(辯)”으로 바꾸어도 그 메시지가 남
북한의 전 인민과 전 세계에 전달되는 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노벨 평화상을 사양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미리 입에 담는다면 다소 공리적이라는 비난
을 받기 쉽겠지만, 굳이 감출 까닭도 없다. 사사건건 김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발목을 잡는, 이를테
면 재벌과 파업을 불사하는 의료진과 같은 압력그룹에 대하여 불퇴전의 결의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
고 극히 일부의 언동이라 하겠으나 로비설을 잠재우는 데 그 이상의 탁효는 없을 것이다.
단순 소박 차원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노벨상을 사양해서는 안 된다는 쪽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노벨상은 올림픽 금메달과는 달리 한번 수상자가 결정되면 번복이 불가능한 상이다.
김 대통령이 사양하더라도 노벨상 문서와 역사서에는 “2000년 노벨평화상 : 한국의 김대중, 수상
사양”이라고 영원히 기록될 터이다.
내일신문>
임재경
추구하는 용기와 사양하는 용기
한국시간으로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10월 13일)에 밝혀질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에서 유력한 후보에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는가 하면, 6·15
선언이 나온 이후에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더불어 노벨 평화상의 공동수상자로 선정될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무성하였던 까닭이다. 최근에는 부총리를 지낸 한나라당
국회의원 김 모씨가 “여당측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한국식 로비를 하고 있
다”고까지 발언, 노벨상과 관련된 구설마저 곁들인 판국이다.
김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면 수상자 개인의 영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와 겨
레 모두의 자랑거리가 될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들먹일 것까지는 없으려
니와, 교육 및 생활수준 등 어느 모로 보던 간에 “우리나라도 이제는 노벨상을 탈 때가 되지 않았
나”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해마다 단풍이 들 무렵 발표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을 접하고는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했던 일
종의 ‘노벨상 소외감’을 느껴온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웃 나라 일본이 물리학상 문학상
평화상 등을 심심치 않게 탔을 때 노벨상 소외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것은 사촌 밭 사는 데 배
아파하는 단순한 경쟁심리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그와 불가분의 결과인 남북 분단을
노벨상 불임의 간접적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의 불운(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만이 아니라 수상 대상을 구미 중심의 가치기
준으로 재단하는 노벨상 선발위원회의 백인종 내지 구미문명 우월주의, 그리고 반공주의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노벨상 소외감은 비단 한국에 국한될 일은 아닐 줄 안다. 이러한 노벨상의 성격은 일본
의 유가와 히데끼와 중국계 미국인 둘이 물리학상을 탄 것을 제외하면 50년대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전무(全無)하였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70년대 이후 제3세계의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백인 중심주의는 다소 누그러져 평화상 분야는 백
인과 비(非) 백인의 비율이 거의 반반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흑백인
종 차별의 대명사라 할 남아연방의 흑인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가 199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과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하자 구미의 매스컴이 그를 가리켜 “한국의 만
델라”라 표현한 점이다.
이를 확대해석하면 백인 사회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의 훌륭한 자격
자라는 암시나 다름없다. 김 대통령의 끈질긴 반군사독재 투쟁과 카리스마에 더하여 “한국의 만델
라”라는 신문의 표제는 그의 측근과 지지층을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여부로 무게가 달라질 민주투사나 인권운동가
차원의 인물은 이미 아니다.
그런 면에서 국가적 혹은 민족적 난제들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김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돕는 길”이라는 논리가 얼마든지 성립
할 수 있다.
우선 열의 하나, 김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받지 못하더라도 결코 낙담하거나 상심
할 필요가 없다. 평화상의 수상 공적에 남북화해가 결정적 주요 항목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노벨상 수상자 추천이 6·15 선언 이전에 마감되었다는 점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열의 아홉, 김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단독 지명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김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에 겸양의 “노 댕큐”(No! thank you)를
발하는 용기를 내야 할 걱이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전세계를 주름잡는 거대 미디어들을
앞에 놓고 행할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준비한 쪽에서는 맥빠지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제목을 “노벨상을 사양하는 변(辯)”으로 바꾸어도 그 메시지가 남
북한의 전 인민과 전 세계에 전달되는 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노벨 평화상을 사양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미리 입에 담는다면 다소 공리적이라는 비난
을 받기 쉽겠지만, 굳이 감출 까닭도 없다. 사사건건 김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발목을 잡는, 이를테
면 재벌과 파업을 불사하는 의료진과 같은 압력그룹에 대하여 불퇴전의 결의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
고 극히 일부의 언동이라 하겠으나 로비설을 잠재우는 데 그 이상의 탁효는 없을 것이다.
단순 소박 차원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노벨상을 사양해서는 안 된다는 쪽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노벨상은 올림픽 금메달과는 달리 한번 수상자가 결정되면 번복이 불가능한 상이다.
김 대통령이 사양하더라도 노벨상 문서와 역사서에는 “2000년 노벨평화상 : 한국의 김대중, 수상
사양”이라고 영원히 기록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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