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대학교수 호사카 유지

“선비와 사무라이는 배다른 형제”

지역내일 2007-07-09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 받아들여 … 한·일 두 지배계층의 관련성 분석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호사카 유지 지음
김영사 / 9900원

한국으로 귀화한 한 일본인 대학교수가 조선과 일본의 지배계층인 선비와 사무라이의 공통점과 차이에 관련된 역사책을 펴냈다.
주인공은 세종대 호사카 유지(保坂祐二·사진) 교수. 그는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통치이념으로 활용했다”며 “18세기 조선의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는 형제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호사카 교수는 그동안 ‘일본 고지도에도 독도는 없다’ ‘일본에 절대 당하지 마라’ 등 잇단 화제작을 펴냈다. 동경대 공학부 출신인 그는 1986년 한 심포지엄에서 만난 한국인과 결혼했고 1988년부터 한국에 건너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는 다소 억양이 어색한 부분에 대해서는 ‘도쿄사투리’라고 둘러댔다.
호사카 교수의 부친은 기업을 운영하면서 한국에 기업인이나 대학교수 등 다양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호사카 교수도 재일교포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호사카 교수는 “70년대만 해도 재일교포 차별이 심해 절대 대기업이나 공직으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며 “주위에 한국인 친구들은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각종 차별에도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어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으로 귀하하면 다 한국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정부는 원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다”면서 “일본에서는 규정에는 없지만 귀화를 할 때 되도록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요구하는데 그것이 새로운 창씨개명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 선비와 사무라이가 비슷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士)는 조선에서 선비를, 일본에서 사무라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하지만 두 나라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두 지배계층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주군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리고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해야 한다. 부정부패를 증오하고 공정해야 한다.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한다. 나라와 가족을 위한 명분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무사도’에 들어간 사무라이의 덕목으로 선비의 생활과 다르지 않다.

- 선비와 사무라이는 배다른 형제인가.
사무라이의 사상적 중심은 손자병법이었다. 이 때문에 사무라이는 침략을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약육강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5세기 이후 100년의 전국시대동안 군웅할거하면서 강자만 살아남았다. 그 마지막이 임진왜란이다.
이때 성리학이 일본에 전해졌고 사무라이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 성리학은 어떻게 일본에 유입됐나.
조선의 대학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일본 학자들이 에도막부에 들어가 일본 지도층에 성리학의 뿌리를 내렸다. 새로운 문파가 형성됐고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과 에도막부가 평화스러운 관계를 이어갔다.
에도막부가 정식국교를 가진 외국은 조선뿐이었다. 네덜란드와 중국은 무역관계를 가진 곳에 불과했다.

- 일본에서 손자병법 대신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된 이유는.
사무라이에게 침략이나 배신은 도의에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도 사무라이의 특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공을 세운 사무라이에게 땅을 주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남는 땅이 없어 사무라이의 불만이 커졌고, 바다 건너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성리학은 통치이념으로 아주 유용했다. 사무라이들에게 없던 충(忠)과 효(孝)라는 개념을 심어줬고 천황과 왕을 가장으로 여기는 가부장적인 봉건제를 정착시킬 수 있도록 했다.

- 성리학이 일본에 평화를 가져온 것인가.
성리학에서의 충·효는 대가가 없는 것이다. 성리학을 들여놓은 에도막부는 사무라이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칼로 수련을 거듭했지만 피를 묻히지 않았다. 반란도 줄었고 침략도 없었다. 성리학 덕분에 일본은 유례없는 평화 시기를 맞았다.

- 조선통신사가 운영된 것도 성리학 때문인가.
성리학을 도입한 이후 일본은 조선을 성리학의 종주국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교류관계가 지속됐고 조선통신사를 영접하거나 수행하는 관료가 되기 위해 경쟁이 붙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전역에서 환대를 받은 것도 통치이념을 전수해준 나라였기 때문이다.
양국의 학자들은 선비와 사무라이는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일본을 ‘조선에 가까운 오랑캐’로 인식할 정도였다.

- 하지만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나.
조선은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과 사상을 이단시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에도막부는 전통 사상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상을 받아들였다. 일본 사상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 국학이 기틀을 잡고 성리학 외에 주자학 등이 꾸준히 연구됐다.
이 때문에 번(지방정부)에 따라 주류 학문이 달랐고, 조선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번이 있는 반면 멸시하는 번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평화시대를 누리던 일본이 다시 침략국가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 메이지유신 시대가 열리면서 사민평등 시대가 열렸다.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한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계급층인 사족(士族)으로 분류됐다. 새 지배계급인 백작이나 공작 등 귀족 계급이 바로 그것이다.

- 조선의 선비는 무인을 얕보았는데 사무라이는 다르지 않나.
임진왜란 전까지 사무라이는 낭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사무라이도 칼이 아닌 학문이 필요했고 벼슬살이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는 문무를 모두 겸비한 지배계층이 생겨나게 됐다. 어찌 보면 학문에 의존하던 선비들보다 실용적이었다. 무예연마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전쟁도 없었다. 조선의 지배계층인 양반은 문인과 무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에도시대 사무라이는 문과 무를 모두 겸비해야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조선에는 향교나 서당이 학문을 보급했지만 일본에서는 검도 도장을 중심으로 문무를 모두 가르치게 됐다. ‘문무양도’가 사무라이의 신조가 된 것이다.

- 한국은 아직도 학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한데.
한국의 역사는 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 문무를 모두 겸비하는 것보다는 문을 더욱 강조하고 사농공상이 유지되고 있다.
에도시대에도 성리학이 퍼지면서 사농공상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았다. 조선의 사는 문인과 무인으로 구분됐지만 일본 내에서의 ‘사’는 문·무를 모두 겸비하고 있었다. 또 상인들에게 특권을 주고 대상인을 사무라이와 동등하게 대우해줬다. 그러나 조선은 사농공상이 철저하게 유지됐다. 조선에서는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 교육열이 높고 대학 진학 등을 우선시하는 것도 이런 ‘선비문화’ 때문이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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