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회 교수의 이산가족 이야기

망향의 시, 이제 그만 썼으면…

지역내일 2001-03-26
"가을바람에 마음 놀란 나그네, 아득히 처자를 그려 편지를 쓴다. 암만 해도 못다 쓴 사연이 있는 것 같아 길 떠나려다 다시 봉함을 뜯어읽는다."
이 시는 중국의 장적이 쓴 추사(秋思)라고 하는, 널리 알려진 명편이다. 고향집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혹시 빠진 말이 있을까 길 떠날 무렵에 다시 개방하는 애틋한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혈육을 그리는 심정 누가 알까
예로부터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이라 하여, 여행중에 집안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은 데 비할 만하다고 했다. 일생을 객지로 떠돌며 수많은 방랑시련을 통해 고향을 그리고 가족을 그렸던 시성 두보를 생각해 보면, 혈육의 소식을 듣는 일이 인간사의 세상살이에 어떤 국면을 형성하는 것인지 쉽사리 짐작이 간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이 땅에는 가족이산의 세월이 반세기를 넘어섰는데도 편지 한 장 주고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1000만에 이른다. 그 덧없는 세월, 그 속절없는 사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장적과 두보가 명멸했을 것인가?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주효가 맛을 잃고 밤마다 고향과 가족을 꿈꾸는 통한의 체험이 없고서야, 어찌 그 가슴 밑바닥의 처연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한반도의 분단 역사상 요지부동으로 변동이 없던 이 혈육간 안부소식을 전하는 문제가, 춘삼월 봄바람에 버들강아지가 움을 트듯이 새로운 방향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제4차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우선 300명의 이산가족이 상대측 지역의 가족에게 서신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신교환, 문제해결에 새 걸음
이 합의사항의 실천은 겉보기에 단순한 남북간 화해협력의 한 진전으로 보일지 모르되, 그 내부에 자리잡은 실체적 의미는 결코 만만치 않다. 온 세계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간 이산가족 교환방문은, 그 외형에 비해 실제에 있어서는 상징적이고 단발적인 행사에 그친다. 그 행사를 수행하는데 따르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과 아직 완강히 서로 다른 두 체제사이의 한계가, 전체 이산가족에게 수혜가 되는 행사와는 거리가 멀게 만든다.
반면에 남북 이산가족 사이의 서신교환은, 그것이 잘 운영되기만 한다면 일평생의 갈증을 해소하고 모든 이산가족들에게 혜택을 나눠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사업이다. 그래서 이산가족 단체에서 십수년을 끈질기게, 봉함편지가 아닌 공개엽서라도 좋으니 이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남북한 당국에 간곡히 촉구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사업이야말로 남북을 가로막은 인위적 장벽에 작은 물구멍을 내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들을 북으로 보낸 100세대의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도봉구 방학동에 사는 유필귀 할머니는 "네 얼굴 한번 보려고 백살까지 버텨왔는데…, 동빈아! 내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 보자꾸나"라는 사연을 적어 그 아들에게 보냈다. 그러고 보니 아들 동빈씨도 벌써 77세 희수에 이른 노인이다.
지금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내는 서신만이 유일한 소통의 통로, 그것도 여러 사람의 부러움을 뒤로하고 선택된 소통의 통로이다. 1,2,3차 이산가족 상봉신청때 컴퓨터 추첨에서 탈락한 것은, 당첨하는 것보다 탈락하는 것이 당연한 엄청난 경쟁률이어서 신세 한탄꺼리도 못되는 형편이다.

신분도 고하도 없는 민족정서
그런가 하면 헌법기관이자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평화통일 자문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김민하 수석부의장도 북한에 있는 둘째형 성하씨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뜻밖의 반가운 소식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50여년만에 어머님께 처음 편지를 쓰는 제 가슴은 지금 높뛰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 아들을 잊지 못하는 어머니…. 여기에 무슨 신분의 차이가 있을 것이며 무슨 제도와 체제와 이념의 구분이 있을 것인가. 일찍이 김소월이 '고향집'이란 시에서 그 고향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적 화자를 통해, "북두칠성 자주 도는 저 하늘 그 아래 두고온 내 고향집이 눈에 어립니다"라고 노래했을 때, 그것이 우리 민족정서의 한 핵심을 짚은 것이었음을 우리는 이 시대에 와서 다시금 깨우칠 수밖에 없다.
부디 바라건대 이번의 서신교환이 이 땅의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명편의 시를 생산하는 일이 무익하다 여겨지도록, 이산가족 문제해결에 큰 걸음으로 확대되었으면 한다.
일천만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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