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17. 조선왕조의 대표적 이궁, 창덕궁
지세에 따라 자연스레 배치한 이궁(離宮)
지역내일
2001-03-23
(수정 2001-03-23 오후 2:58:56)
창덕궁(昌德宮)은 태종 5년(1405)에 지어진 이궁(離宮)이다. 태종은 기존의 경복궁을 두고도 이궁인
창덕궁을 세울 것을 고집, 결국 그 뜻을 이룬다. 태종은 재위 중에 인정전을 다시 짓고 금천교를 놓
고 돈화문을 세우는 등 창덕궁 조영에 힘을 쏟았다.
창덕궁의 지세는 경복궁과 같은 넓은 평지가 아니고 뒤에 구릉을 두고 좌우로 평지가 열린 모양이
다. 이같은 대지의 형상에 따라 전각의 배치도 경복궁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경복궁이
전조후침(前朝後寢), 즉 전면에 정전을 두고 후면에 침전을 배치한 것과는 달리, 마치 여염집의 건축
처럼 지세에 따라 적절히 전각을 배치한 것이다.
돈화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교를 지나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정전인 인정
전(仁政殿)이 나타난다. 인정전 오른쪽 문으로 나가면 왼쪽으로 편전인 선정전(宣政殿)과 그 뒤편으
로 침전들이 자리한다.
건축학자들은 이를 ‘움직이는 축의 설정’ ‘율동적인 구성’ ‘극적 공간의 연출’ 등의 미적 기
법이라고 풀이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동현 전 소장은 “이는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특한
궁궐 배치이며, 자연과 어우러진 이런 아름다움 때문에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
다”고 설명한다.
음양론과 복술이론에 좌우된 궁궐 건축 000
우리 전통 음악은 몇 개의 곡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곡을 이룬다. 풍수와 지리가 합쳐져서 풍수
지리사상이 되고 음양과 오행이 합쳐져서 음양오행사상이 되는 것 역시 이런 이치다.
도성이나 궁궐을 짓는 데에는 전통적으로 ‘예법(禮法)’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양 도
읍을 건설할 때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사직단과 종묘를 둔 것은 주례에서 규정한 기본
개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왕들은 예법에 규정된 기본질서 외에 왕권의 안녕과 기복을 원했고, ‘술법’
(術法 : 음양과 복술에 관한 이론)의 유혹에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술법은 일반 살림집은 물론 도성
의 입지나 형국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창덕궁을 지은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나서도 창덕궁 옆에 수강궁(壽康宮) ― 성
종 15년(1484) 수강궁 옛터에 세워진 궁이 창경궁이다 ― 을 지어 거처했다. 창덕궁으로 완전히 이어
(移御 : 왕의 거처를 옮김)한 세조는 궁내 여러 전각의 이름을 고쳐 짓고 후원(後苑)에 새로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다.
온갖 실정으로 재위 11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도 인정전과 선정전을 모두 청기와로 할 것을
명(命)하는 등 창덕궁에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적이 동문으로 쳐들어와” 000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창덕궁, 창경궁이 전소(全燒)된 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1605년(재
위 38년) 4월 궁궐의 재건을 위해 국초와 성종조 궁궐 영건에 대한 기록을 올리도록 명한다. 그 이듬
해에는 ‘종묘궁궐영건도감’이 조직되었고, 선조 41년에 공사에 착수할 것을 정했다. 그때까지만 해
도 재건할 궁궐은 당연히 정궁이었던 경복궁이었다.
그러나 1607년 이후 공사대상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선조가 그해 2월 건국 초
한양에 대한 술가(術家)들의 의견을 상고하면서부터라고 짐작된다. 1607년 2월13일 왕은 비망기(공식
회의가 아니라 측근에 따로 명을 내림)를 내려 이렇게 전교했다.
“건국 초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지을 때 반드시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것과 술사들
이 지형을 살펴보고 한 말들이 있을 것이다. 실록을 상고하여 빠짐없이 써서 들이도록 하라.”
잘 알려진 대로 건국초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계룡산 아래 신도안으로 정해졌던 도읍터는 하 륜의 반대로 공사착공 1년 뒤에 취소됐고, 하 륜의 건
의로 무악(지금의 연세대학교 언저리)으로 옮기려 했으나 다시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한
양으로 결정되었으나 하 륜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건방(乾方 : 자하문쪽)이 낮고 물과 샘물이 마
른 약점이 있다”며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 정종수. <도읍과 풍수="">. 1994
경복궁 터에 대한 논쟁은 세종 때까지 계속됐다. 일부 술사들은 북악산이 북한산의 주맥이 아님을 들
어 경복궁 터 자체가 정궁이 자리잡을 곳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세종 15년 윤팔월 스무아흐레날의 《실록》에 의하면 ‘경복궁은 임금이 포로가 되고 제후국이 멸망
하는 땅’이라는 점괘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있다. 더욱이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의 기록에
는 “임란 직전 도성에 검은 옷을 입은 적이 동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였는
데, 실제로 임진년에 왜군들은 동대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왔다.
경복궁 대신 270년 동안 정궁으로 쓰여 000
이런 사회적 혼란기에 선조는 결국 술법가들의 의견에 승복, 궁궐 재건의 대상을 창덕궁으로 했을 가
능성이 높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파당에 따른 정치권력의 대립 속에 왕권 수호를 위한 과격한 정책이 추진되던 17
세기는 이러한 술법이 크게 대두되고 구체적으로 궁궐건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결
국 임란 이후에는 이궁인 창덕궁이 270여년 동안 조선조의 정궁 노릇을 한 셈이다.
1912년 일제는 창덕궁과 후원을 일반 백성에게 관람시키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침전에 불이 나서 희
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일제는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복구하고 강녕전
을 헐어다가 희정당을 복구하는 등 경복궁의 많은 침전을 헐어 창덕궁 부속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창덕궁은 1995년부터 원형을 되찾아가고 있다. 95년에는 일제가 변형시킨 인정전 회랑(廻廊)을 헐고
새로 건립했으며 1997년에는 진선문을 복원했다. 현재는 옛 규장각 영역이 복원중이다.
낙선재와 후원 영역의 빼어난 아름다움 000
창덕궁 침전 동쪽에 있는 낙선재는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라 단청을 입히지 않은 소박하고 아름다
운 건물들이 많다. 뒤뜰의 화계나 꽃담, 괴석 등도 대단히 아름답다.
창덕궁 후원을 흔히 ‘비원(秘苑)’이라 하는데, 비원이란 이름은 광무(光武) 8년(1904) 7월 15일 기록
에서부터 보인다. 그 이전에는 금원(禁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등으로 불렸고, 《동국여지비고(東
國輿地備考)》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어 있다.
약 9만여평에 이르는 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는 휴식처이기
도 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
적인 명원(名苑)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도읍과>
창덕궁을 세울 것을 고집, 결국 그 뜻을 이룬다. 태종은 재위 중에 인정전을 다시 짓고 금천교를 놓
고 돈화문을 세우는 등 창덕궁 조영에 힘을 쏟았다.
창덕궁의 지세는 경복궁과 같은 넓은 평지가 아니고 뒤에 구릉을 두고 좌우로 평지가 열린 모양이
다. 이같은 대지의 형상에 따라 전각의 배치도 경복궁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경복궁이
전조후침(前朝後寢), 즉 전면에 정전을 두고 후면에 침전을 배치한 것과는 달리, 마치 여염집의 건축
처럼 지세에 따라 적절히 전각을 배치한 것이다.
돈화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교를 지나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정전인 인정
전(仁政殿)이 나타난다. 인정전 오른쪽 문으로 나가면 왼쪽으로 편전인 선정전(宣政殿)과 그 뒤편으
로 침전들이 자리한다.
건축학자들은 이를 ‘움직이는 축의 설정’ ‘율동적인 구성’ ‘극적 공간의 연출’ 등의 미적 기
법이라고 풀이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동현 전 소장은 “이는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특한
궁궐 배치이며, 자연과 어우러진 이런 아름다움 때문에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
다”고 설명한다.
음양론과 복술이론에 좌우된 궁궐 건축 000
우리 전통 음악은 몇 개의 곡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곡을 이룬다. 풍수와 지리가 합쳐져서 풍수
지리사상이 되고 음양과 오행이 합쳐져서 음양오행사상이 되는 것 역시 이런 이치다.
도성이나 궁궐을 짓는 데에는 전통적으로 ‘예법(禮法)’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양 도
읍을 건설할 때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사직단과 종묘를 둔 것은 주례에서 규정한 기본
개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왕들은 예법에 규정된 기본질서 외에 왕권의 안녕과 기복을 원했고, ‘술법’
(術法 : 음양과 복술에 관한 이론)의 유혹에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술법은 일반 살림집은 물론 도성
의 입지나 형국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창덕궁을 지은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나서도 창덕궁 옆에 수강궁(壽康宮) ― 성
종 15년(1484) 수강궁 옛터에 세워진 궁이 창경궁이다 ― 을 지어 거처했다. 창덕궁으로 완전히 이어
(移御 : 왕의 거처를 옮김)한 세조는 궁내 여러 전각의 이름을 고쳐 짓고 후원(後苑)에 새로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다.
온갖 실정으로 재위 11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도 인정전과 선정전을 모두 청기와로 할 것을
명(命)하는 등 창덕궁에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적이 동문으로 쳐들어와” 000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창덕궁, 창경궁이 전소(全燒)된 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1605년(재
위 38년) 4월 궁궐의 재건을 위해 국초와 성종조 궁궐 영건에 대한 기록을 올리도록 명한다. 그 이듬
해에는 ‘종묘궁궐영건도감’이 조직되었고, 선조 41년에 공사에 착수할 것을 정했다. 그때까지만 해
도 재건할 궁궐은 당연히 정궁이었던 경복궁이었다.
그러나 1607년 이후 공사대상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선조가 그해 2월 건국 초
한양에 대한 술가(術家)들의 의견을 상고하면서부터라고 짐작된다. 1607년 2월13일 왕은 비망기(공식
회의가 아니라 측근에 따로 명을 내림)를 내려 이렇게 전교했다.
“건국 초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지을 때 반드시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것과 술사들
이 지형을 살펴보고 한 말들이 있을 것이다. 실록을 상고하여 빠짐없이 써서 들이도록 하라.”
잘 알려진 대로 건국초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계룡산 아래 신도안으로 정해졌던 도읍터는 하 륜의 반대로 공사착공 1년 뒤에 취소됐고, 하 륜의 건
의로 무악(지금의 연세대학교 언저리)으로 옮기려 했으나 다시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한
양으로 결정되었으나 하 륜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건방(乾方 : 자하문쪽)이 낮고 물과 샘물이 마
른 약점이 있다”며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 정종수. <도읍과 풍수="">. 1994
경복궁 터에 대한 논쟁은 세종 때까지 계속됐다. 일부 술사들은 북악산이 북한산의 주맥이 아님을 들
어 경복궁 터 자체가 정궁이 자리잡을 곳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세종 15년 윤팔월 스무아흐레날의 《실록》에 의하면 ‘경복궁은 임금이 포로가 되고 제후국이 멸망
하는 땅’이라는 점괘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있다. 더욱이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의 기록에
는 “임란 직전 도성에 검은 옷을 입은 적이 동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였는
데, 실제로 임진년에 왜군들은 동대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왔다.
경복궁 대신 270년 동안 정궁으로 쓰여 000
이런 사회적 혼란기에 선조는 결국 술법가들의 의견에 승복, 궁궐 재건의 대상을 창덕궁으로 했을 가
능성이 높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파당에 따른 정치권력의 대립 속에 왕권 수호를 위한 과격한 정책이 추진되던 17
세기는 이러한 술법이 크게 대두되고 구체적으로 궁궐건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결
국 임란 이후에는 이궁인 창덕궁이 270여년 동안 조선조의 정궁 노릇을 한 셈이다.
1912년 일제는 창덕궁과 후원을 일반 백성에게 관람시키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침전에 불이 나서 희
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일제는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복구하고 강녕전
을 헐어다가 희정당을 복구하는 등 경복궁의 많은 침전을 헐어 창덕궁 부속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창덕궁은 1995년부터 원형을 되찾아가고 있다. 95년에는 일제가 변형시킨 인정전 회랑(廻廊)을 헐고
새로 건립했으며 1997년에는 진선문을 복원했다. 현재는 옛 규장각 영역이 복원중이다.
낙선재와 후원 영역의 빼어난 아름다움 000
창덕궁 침전 동쪽에 있는 낙선재는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라 단청을 입히지 않은 소박하고 아름다
운 건물들이 많다. 뒤뜰의 화계나 꽃담, 괴석 등도 대단히 아름답다.
창덕궁 후원을 흔히 ‘비원(秘苑)’이라 하는데, 비원이란 이름은 광무(光武) 8년(1904) 7월 15일 기록
에서부터 보인다. 그 이전에는 금원(禁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등으로 불렸고, 《동국여지비고(東
國輿地備考)》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어 있다.
약 9만여평에 이르는 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는 휴식처이기
도 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
적인 명원(名苑)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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