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 문화유산> 15. 조선의 법궁, 경복궁(1)

엄격한 규범에 따라 가장 장엄하게 지어진 으뜸 궁궐

지역내일 2001-03-09 (수정 2001-03-09 오후 4:14:22)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법궁(法宮)으로 가장 장엄하게 지어진 으뜸 궁궐이다.
태조 4년에 지어진 경복궁에는 이치와 원칙을 중시하는 초기 성리학의 정신, 곧 조선의 개국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경복궁 설계를 담당했던 이는 개국공신 정도전이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이상국가인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치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고 주나라의 궁궐건축 제도를 경복궁의 설계
에 적용하려 했다.
건물 배치를 보면 광화문을 정문으로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왕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
殿),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 남북선상에 일직선으로 배
치되어 있다. 사정전 동쪽에는 세자의 거소인 동궁전(東宮殿), 서쪽에는 왕실의 도서관인 수정전(修
政殿:원래는 집현전이었음)이 동서축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또한 크게 앞부분에 정전과 편전이 놓이고 뒷부분에 침전과 후원이 자리잡은 이른바 ‘전조후침(前
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정전과 침전이 좌우에 놓이거나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다
른 궁들과 대조를 이루는데, 이 또한 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
다.

세종 때 집현전 설치로 법궁체제 완비
실록은 태조 이성계 재위중에 건축된 경복궁의 규모는 390칸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시
궁역에는 승려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의 전통이 남아 있어 승려의 수가 많았
고 이들 가운데는 숙련된 건축기술자들(일종의 탁발 행위로 건축현장에 나가 일하는 승려들)이 많았
기 때문이었다.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점차 정치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경복궁 내부에는 건축상 많은 변
화가 일어난다. 태종 때는 경회루를 크게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장소를 마련하였으며,
거기서 파낸 흙으로 아미산(蛾眉山)을 조성했다. 세종 때에는 동궁 후궁(後宮) 혼전(魂殿) 등과 후원
(後苑 : 현 청와대 일원) 및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까지 완비하여 ‘법궁체제’를 완성했다.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글 두편이 있으니, 태조 때 정도전이 사정전에 붙인 작명문과 태종
때 하 륜이 경회루에 바친 기문이다.(두 사람 모두 임금의 정책보좌역이었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어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습니다. … 이 전(殿)은 모든 정무가 복잡하게
이르면 모두 전하께 아뢰어 소칙을 내려 지휘하는 곳이니, 더욱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신
은 청하건데, 그 이름을 思政殿이라 하소서.

정도전의 글은 비록 신하가 왕에게 바친 작명문이지만 상당히 엄한 훈계의 뜻을 담고 있다. 그 반
면, 왕권이 확립된 태종 때 경회루에 바친 하 륜의 기문을 보자.

… 경회(慶會)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 시원하게 추녀 끝을
트이게 함은 사방으로 보고 들어 총명(聰明)함이요, 사닥다리가 엄하니 등급의 차별이요, 멀리 보아
빠뜨리지 않으니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요
… 때를 맞추어 여기서 노는 것은 문무(文武)의 늦추었다 버티었다 함이 알맞은 것이니, 오르내릴 때
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에서 행하면 이 루의 유익함이 참으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태조 때 창건한 경복궁은 세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궁다운 궁궐이 되었으며 이후 100여년 뒤인 명
종 8년(1553)까지 거듭 발전하여 조선 전기에 이룩된 궁정 문화를 모두 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270년 동안 폐허로 방치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 경복궁은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로 화한다. 선조 25년(1592) 4월30일 새벽,
임금은 도성을 지키겠다는 백성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임진강을 건넜다. 서울 사대문은 굳게 닫혀
백성들이 피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를 안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궁성에 불이 났다. 왕의 피난 행렬이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임금의
개인 재물을 두는 곳)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져갔다. 행렬이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
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두 곳에 공사 노비의 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불을 질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 '
― 《선조 수정 실록》

선조는 환도한 뒤에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으나, 일부 신하들의 만류로 뜻을 이
루지 못했다. 결국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재건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경복궁 복원에 엄청난 시일
과 재화, 인력이 필요한데다 경복궁 터가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임란 전까지 경복궁에서는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가 사정전 뜰
에서 왕의 친국(親鞫 : 친히 신문함)을 받고 사약을 받았다. 창덕궁에 머물던 성종은 이런 저런 이유
를 대며 경복궁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약 270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던 경복궁이 중건된 것은 고종 때인 1867년에 이르러서였다. 경복궁 복
원사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의지로 시행됐다. 복원된 경복궁의 규모는 7225칸반, 전각은
256칸에 이르렀다. 그러나 1895년 궁 안(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
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 다음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경복궁은 다시 주인 없는 빈 궁궐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394동의 전각 철거돼
복원된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1915년에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주년기념 물
산공진회(오늘날의 박람회)로 경복궁 앞쪽의 전각들은 거의 철거됐다.
1916년에는 길이 128.3m, 높이 22.5m의 총독부청사를 근정전(건물높이 20m, 좌우회랑의 길이 116.5m) 앞
에 지어 경복궁의 어느 곳에서도 훤히 트인 전망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는 경
복궁에서 394동, 4524칸의 전각을 철거했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경복궁은 지난 90년 문화재청의 침전권역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사
업에 들어갔다. 94년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이 복원되었고 95년에는 교태전 주변 행각이 복원되어 일반
에게 공개되었다. 96년에는 왕세자의 처소인 동궁 일원이 복원됐다. 경복궁 복원공사에는 궁궐건축기
법을 전승한 인간문화재 대목장과 단청장, 소목장들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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