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카네이션이 사라지는 날
지난 주말과 주초의 거리 풍경가운데서 여느 때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노인네들이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달아준 사랑의 꽃이었다. 다른 나라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미풍의 하나가 우리 전래의 부모 공경이었는데 그것도 세태의 변화를 반영하여 그전과 같지 않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평소에 데면데면하다가 1년에 한번 천 원짜리 꽃 한 송이 달아주는 것이 무얼 그리 대견하냐고 대들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서너 세대 뒤 자식 없는 노인층이 자식을 둔 이들보다 많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지구상의 몇 몇 나라는 사멸의 과정을 밟는 꼴이다.
끔찍한 상상을 해본 것은 2005년 우리나라 여성의 출산율이 1.08명으로 전해의 1.16보다도 현저하게 낮아져 세계 최저수준에 근접하였다는 보도(<내일신문> 5월 9일자 1면 참조)가 나온 까닭이다. 여성 한 사람이 평생 아기 하나 만을 낳는 추세가 50년 백년 계속된다면 결국 절대 인구가 줄어든다는 심각한 국면이 벌어진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만연하는 무자식 무의탁 노인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노동 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마침내 사회의 존립기반이 위태로운 상태에 도달한다.
하지만 임신 가능한 여성들을 상대로 하여 “나라 위해 아이를 많이 낳자!”라는 구호를 백번 천번 외치고 큼직한 현수막을 관공서 건물 마다 내 붙인다고 하여 출산율이 높아질 세상은 이미 아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그들이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라는 자각은 물론이고 더구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관헌(官憲)국가적 발상과 요구에는 오히려 코웃음을 칠 정도다. 그런 점에서 구미 여러 나라에 임신중절 시술의 합법화 운동이 일반화 된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일은 임신중절의 합법화를 공개적 정치 이슈로 내걸고 있는 구미의 여성 출산율이 우리보다 높은 것인데 이를테면 미국은 2.05, 영국은 1.74, 프랑스는 1.90에 이르며 출산율 저하로 한 동안 고민했던 독일만 해도 1.37에 이르고 있다.
한국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가정을 갖는 일 못지않게 자아실현이 중요하다는 남녀평등 사상의 바탕에 사회경제적으로 아이 나서 기르고 남부럽지 않게 가르치기가 힘든 현실이 겹친 결과다. 고도로 상업화한 양육 관련 산업(의료업 포함)은 아이 기르는 지출을 개별 부모의 소득에 맞추어 상대화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각종 사교육비 부담은 공납금 이상으로 학부모를 짓누르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출산을 기피하는 새 세대 여성을 비난하거나 타이르는 식의 가부장적 행태는 백해무익한 짓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 볼 때 현재와 같은 출산율의 저하는 경제성장면에서 중국을 포함한 제3세계 일부가 부러워하는 그 ‘성공의 대가로 지불해야하는 제물’(victim of success)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권 출범이후 국민적 의제로 등장한 이른바 양극화 현상도 따지고 들어가면 출산율 저하에 가서 맞닿는다. 이점은 압축 성장정책의 업적을 정치적 자산으로 일관하여 내거는 보수 야당이 깊이 반성하고 대안을 제시할 의무를 진다.
이와 관련하여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있다. 서울시장 선거에 여성이 여당 후보로 등장한 것도 이채롭거니와 교육문제가 도시 개발 및 교통문제를 누르고 우선 과제로 격상된 것은 적어도 출산율 장려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 현상이다. 여당후보의 서울시 육아 대책 및 어린이 사교육비 부담절감을 위한 일련의 정책이 얼마만큼의 실효를 거둘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가임여성들 전반에 일상생활과 아이 낳아 기르는 일과 떼려야 땔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큰 예산을 드리지 않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서울 시내 한 백군데 쯤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이 기회에 주문하고 싶다. 필자가 들은 바로는 서울에 고작 세 곳이라니 전국 합쳐 열을 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2천개소, 우리와 인구수가 비슷한 프랑스는 1천개에 달한다.
어린이이가 있는 가정에 속상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속상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과 웃음이 따르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섭리다. 천원 짜리 빨간 카네이션의 값진 효과를 업신여길 수 없는 것도 모두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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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지난 주말과 주초의 거리 풍경가운데서 여느 때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노인네들이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달아준 사랑의 꽃이었다. 다른 나라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미풍의 하나가 우리 전래의 부모 공경이었는데 그것도 세태의 변화를 반영하여 그전과 같지 않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평소에 데면데면하다가 1년에 한번 천 원짜리 꽃 한 송이 달아주는 것이 무얼 그리 대견하냐고 대들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서너 세대 뒤 자식 없는 노인층이 자식을 둔 이들보다 많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지구상의 몇 몇 나라는 사멸의 과정을 밟는 꼴이다.
끔찍한 상상을 해본 것은 2005년 우리나라 여성의 출산율이 1.08명으로 전해의 1.16보다도 현저하게 낮아져 세계 최저수준에 근접하였다는 보도(<내일신문> 5월 9일자 1면 참조)가 나온 까닭이다. 여성 한 사람이 평생 아기 하나 만을 낳는 추세가 50년 백년 계속된다면 결국 절대 인구가 줄어든다는 심각한 국면이 벌어진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만연하는 무자식 무의탁 노인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노동 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마침내 사회의 존립기반이 위태로운 상태에 도달한다.
하지만 임신 가능한 여성들을 상대로 하여 “나라 위해 아이를 많이 낳자!”라는 구호를 백번 천번 외치고 큼직한 현수막을 관공서 건물 마다 내 붙인다고 하여 출산율이 높아질 세상은 이미 아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그들이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라는 자각은 물론이고 더구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관헌(官憲)국가적 발상과 요구에는 오히려 코웃음을 칠 정도다. 그런 점에서 구미 여러 나라에 임신중절 시술의 합법화 운동이 일반화 된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일은 임신중절의 합법화를 공개적 정치 이슈로 내걸고 있는 구미의 여성 출산율이 우리보다 높은 것인데 이를테면 미국은 2.05, 영국은 1.74, 프랑스는 1.90에 이르며 출산율 저하로 한 동안 고민했던 독일만 해도 1.37에 이르고 있다.
한국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가정을 갖는 일 못지않게 자아실현이 중요하다는 남녀평등 사상의 바탕에 사회경제적으로 아이 나서 기르고 남부럽지 않게 가르치기가 힘든 현실이 겹친 결과다. 고도로 상업화한 양육 관련 산업(의료업 포함)은 아이 기르는 지출을 개별 부모의 소득에 맞추어 상대화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각종 사교육비 부담은 공납금 이상으로 학부모를 짓누르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출산을 기피하는 새 세대 여성을 비난하거나 타이르는 식의 가부장적 행태는 백해무익한 짓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 볼 때 현재와 같은 출산율의 저하는 경제성장면에서 중국을 포함한 제3세계 일부가 부러워하는 그 ‘성공의 대가로 지불해야하는 제물’(victim of success)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권 출범이후 국민적 의제로 등장한 이른바 양극화 현상도 따지고 들어가면 출산율 저하에 가서 맞닿는다. 이점은 압축 성장정책의 업적을 정치적 자산으로 일관하여 내거는 보수 야당이 깊이 반성하고 대안을 제시할 의무를 진다.
이와 관련하여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있다. 서울시장 선거에 여성이 여당 후보로 등장한 것도 이채롭거니와 교육문제가 도시 개발 및 교통문제를 누르고 우선 과제로 격상된 것은 적어도 출산율 장려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 현상이다. 여당후보의 서울시 육아 대책 및 어린이 사교육비 부담절감을 위한 일련의 정책이 얼마만큼의 실효를 거둘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가임여성들 전반에 일상생활과 아이 낳아 기르는 일과 떼려야 땔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큰 예산을 드리지 않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서울 시내 한 백군데 쯤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이 기회에 주문하고 싶다. 필자가 들은 바로는 서울에 고작 세 곳이라니 전국 합쳐 열을 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2천개소, 우리와 인구수가 비슷한 프랑스는 1천개에 달한다.
어린이이가 있는 가정에 속상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속상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과 웃음이 따르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섭리다. 천원 짜리 빨간 카네이션의 값진 효과를 업신여길 수 없는 것도 모두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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