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사기피해 이후 10년
김현동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처장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와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간에는 2년 전부터 연변의 동북아그룹이 주도하여 매일 1회 국경 버스가 다니고 있다.
이 버스는 국경을 통과하기 때문에 짧은 거리지만 약 8~9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두 도시를 왕래하는 직행 교통편이라 러시아로 돈 벌러 나온 조선족 동포들이 주로 이용하고 근래 들어서는 이곳을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우리가 일하는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실이 연길과 우수리스크 두 도시에 각각 자리잡고 있어 양 사무국 실무자들은 한달에 한번은 이 교통편을 이용한다. 이 버스를 타면 우리 동포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지난 12월 말 러시아에서 연길시로 출장을 갈 때였다. 연말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선족 동포 10여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맟침 톰스크에서 일을 하다 3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는 50대 후반의 조선족 동포와 같이 앉게 되었다.
이분은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며 10년을 일하다 이번에는 아예 귀국하는 길이라 했다. 10년을 같이 일하던 아내는 일주일 전 먼저 중국으로 돌아갔단다. 이 동포는 영하 67도까지 내려가는 사하공화국 노천시장에서 3년 동안 장사를 했고, 그래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지금은 두 아이 모두 대학을 가고 이제 결혼 시키는 일만 남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자, 힘이 남았을 때 자식들 결혼자금을 만들기 위해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갈 계획이란다. 아내는 벌써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모은 돈 16만 위안(한화 2000만원) 중 8만 위안을 지불하고 한국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고, 본인도 길림에 도착하는 즉시 나머지 8만 위안을 낸다는 것이다. 아마 한달이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로 입국, 3개월 후에는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다. 곧 한국의 정책이 바뀌어 조선족 동포의 자유왕래와 취업이 보장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면서도 침통한 심정을 달랠 수가 없었다.
연변에 도착해서 한번 더 확인해보았지만 한국에 가려면 10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건 여전히 상식이었다. 동포 사회의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서 남한 사람들은 ‘한국놈’이라 불린다. ‘00놈’이란 표현은 예전엔 일본 사람들에게나 쓰던 말이다. 1996년 조선족 사기피해 이후 10년이 흘렀지만 1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야 한국에 갈 수 있는 이들의 처지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부산 에이펙회의에서 호금도(후진타오) 수상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선족의 한국 자유왕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함으로써 그동안 중국 핑계를 대왔던 외교통상부의 논리는 무너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인력시장의 수급 조절’ 운운하는 노동부의 논리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북경올림픽 때까지 남한사회가 조선족 동포에게 진 빚을 풀지 못한다면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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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동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처장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와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간에는 2년 전부터 연변의 동북아그룹이 주도하여 매일 1회 국경 버스가 다니고 있다.
이 버스는 국경을 통과하기 때문에 짧은 거리지만 약 8~9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두 도시를 왕래하는 직행 교통편이라 러시아로 돈 벌러 나온 조선족 동포들이 주로 이용하고 근래 들어서는 이곳을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우리가 일하는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실이 연길과 우수리스크 두 도시에 각각 자리잡고 있어 양 사무국 실무자들은 한달에 한번은 이 교통편을 이용한다. 이 버스를 타면 우리 동포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지난 12월 말 러시아에서 연길시로 출장을 갈 때였다. 연말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선족 동포 10여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맟침 톰스크에서 일을 하다 3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는 50대 후반의 조선족 동포와 같이 앉게 되었다.
이분은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며 10년을 일하다 이번에는 아예 귀국하는 길이라 했다. 10년을 같이 일하던 아내는 일주일 전 먼저 중국으로 돌아갔단다. 이 동포는 영하 67도까지 내려가는 사하공화국 노천시장에서 3년 동안 장사를 했고, 그래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지금은 두 아이 모두 대학을 가고 이제 결혼 시키는 일만 남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자, 힘이 남았을 때 자식들 결혼자금을 만들기 위해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갈 계획이란다. 아내는 벌써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모은 돈 16만 위안(한화 2000만원) 중 8만 위안을 지불하고 한국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고, 본인도 길림에 도착하는 즉시 나머지 8만 위안을 낸다는 것이다. 아마 한달이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로 입국, 3개월 후에는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다. 곧 한국의 정책이 바뀌어 조선족 동포의 자유왕래와 취업이 보장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면서도 침통한 심정을 달랠 수가 없었다.
연변에 도착해서 한번 더 확인해보았지만 한국에 가려면 10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건 여전히 상식이었다. 동포 사회의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서 남한 사람들은 ‘한국놈’이라 불린다. ‘00놈’이란 표현은 예전엔 일본 사람들에게나 쓰던 말이다. 1996년 조선족 사기피해 이후 10년이 흘렀지만 1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야 한국에 갈 수 있는 이들의 처지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부산 에이펙회의에서 호금도(후진타오) 수상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선족의 한국 자유왕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함으로써 그동안 중국 핑계를 대왔던 외교통상부의 논리는 무너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인력시장의 수급 조절’ 운운하는 노동부의 논리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북경올림픽 때까지 남한사회가 조선족 동포에게 진 빚을 풀지 못한다면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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