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법정공방 국보법 사건 ‘무죄’

지역내일 2006-01-20
간첩 누명 함주명씨 22년만에 무죄 … 대학교수들 11년 재판 끝에 혐의 벗어
민애청 사건 강효식씨 항소심만 6년 걸려 … 지난해 법원 잇따라 무죄 선고

지난해는 오래 기간 재판이 진행된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한해였다. 대표적인 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고문·조작수사로 16년간 간첩혐의로 복역했던 함주명씨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함씨가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를 받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누명을 벗는데는 무려 22년이 걸렸다.
한국사회이해라는 책을 발간한 두 명의 대학교수가 11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무죄선고를 받았으며 민족통일애국청년회사건에도 무죄가 선고됐다.
남북 관계의 변화 등 시대가 달라지면서 이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강정구 교수 사태에서 보듯이 검찰은 국보법 위반에 엄한 법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법원이 국보법 사건 판결에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많이 반영하는 만큼 검찰도 국보법 사건에 대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함주명(75)씨가 22년이 지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작간첩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무죄가 선고된 것은 함씨가 처음이다.
함씨의 재심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4부(이호원 부장판사)는 지난해 7월 15일 “함씨가 법정에서 진술내용을 모두 부인하고 있어 증거능력이 없고 45일간 불법구금과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며 “피고인의 자백은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함씨의 무죄선고는 과거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 위한 국가기관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를 법원이 인정하고 과거사 진상규명에 한발짝 다가간 사례가 됐다.

◆국가가 만들어낸 고정간첩으로 16년간 억울한 옥살이 = 북한에 살고 있던 함씨는 6·25전쟁 이후 월남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남공작원을 지원했고 1954년 4월 남파됐다. 함씨는 남파직후 자수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30년간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83년 2월 함씨는 서울시내에서 기관원들에게 갑자기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대공분실에는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각종 고문도구가 함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45일간의 고문 끝에 함씨는 고정간첩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함씨는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항고했으나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98년 8·15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16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함씨의 막내아들은 ‘간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두 번이나 결혼식을 치르는데 실패하는 등 함씨와 가족들의 수난은 이어졌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99년 자수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변호사 13명이 함씨에 대한 고문 등의 혐의로 이씨를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의 수사결과 이씨의 고문사실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함씨는 법원에 2000년 9월 재심을 청구했고, 지난해 법원은 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에서도 ‘시대흐름으로 볼 때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며 법원의 무죄판결에 공감하고 상고를 포기했다. 함씨의 억울함을 검찰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함씨의 재심사건을 맡은 검찰 관계자는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에 의한 간첩행위는 본인의 자백에 기초한 증거가 있어야 유죄 인정이 가능하다”며 “자백 자체가 고문의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는 인정이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는 것을 검찰 수사에서 밝힌 마당에 상고를 할 수 없었다”며 “함씨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법원에서 인정될것”이라고 말했다.

◆학문의 자유 막은 국가보안법 = 지난해 1월에는 이적성 논란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 94년 기소됐던 경상대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교수들에 대해 11년만에 대법원이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학문의 자유와 교수의 교권을 침해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담 대법관)는 북한 체제를 고무·찬양하는 내용의 대학교재를 집필한 혐의(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 등)로 기소된 경상대 정진상·장상환 교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정 교수 등은 경상대 사회과학분야의 일반교양 교재로 ‘한국사회의 이해’를 공동집필한 후 이를 강의해 왔으나 검찰은 94년 11월 이 책자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1·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정 교수 등을 기소했던 검찰 출신 변호사는 “7년 동안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고 그 동안 사회가 변하니까 유죄가 나기 어려웠던 것”이라며 “당시 재판이 이뤄졌으면 분명히 유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음란물에 대한 기준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다”며 “국가보안법은 음란물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진폭이 있다”고 말해 유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애청은 무죄, 아주대 자주대오는 유죄 =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와 관련된 논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일부 단체의 경우 이적단체라는 굴레를 벗었지만 법원은 재판부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담 대법관)는 지난 2003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찬양·고무 등)로 기소된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전 회장 한대웅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및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일부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서울고법 형사2부(전수안 부장판사)는 지난해 4월 같은 혐의로 기소된 강효식씨에 대해서도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민애청은 국가 존립 등 기본 질서에 해악을 줄 명백한 위험이 있는 이적단체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선고 이유를 박혔다.
그러나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대학내 주사파 지하조직에 가입한 혐의(국가보안법)로 구속기소된 최 모(28)씨에 대해서는 대법원과 하급심의 판단이 엇갈렸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유죄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되돌려 보냈다.
최씨는 ‘아주대 자주대오’에 가입한 혐의로 2001년 구속 기소됐고 재작년12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조직이 실존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 3부(주심 이용우 대법관)는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명칭은 아니더라도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적 학생회’를 건설하기 위해 어떤 조직체를 구성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사실상 유죄를 선고했다.

/김선일 이경기 오승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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