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훌쩍 넘어버린 이산의 세월. 아흔 여섯의 노모(성란기)와 일흔 셋의 아들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무이 접니다. 은현이가 왔습니다. 알아보겠습니까”
“아이고 와 자슥을 모르겠노”
이미 말라버렸음직한 그들은 눈물샘은 뜻하지 않았던 상봉의 기쁨과 53년 세월 속에 묻혔던
이산의 한을 토해버렸다.
노씨는 지난 47년 해방공간에서 잠시 활동하다 일본으로 돌아간 아버지(노차갑·63년 작고)
를 따라갔다. 곧 돌아온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와 두 동생, 젖먹이 아들을 고향 창녕에 남겨
둔 채.
돌아올 수 없는 길이였다. 노씨는 50 여년을 조총련에 속해 있으면서 민족교육에 몸바쳤다.
동포들에게 조국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노씨는 가족과 고향이 그릴울때 마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곱씹었던 대의멸친(大義滅親)을
떠올려며 교포 후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노모와 두 동생은 노씨를 잊어야 했다. ‘빨갱이’가 돼버린 그는 고단한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 한 장조차 남기지 않고 장남의 흔적을 없앴지만 사법기관의 감시는 언제나 떠날 줄 몰
랐다.
하지만 천륜마저 버리진 못했다. 노모는 은현씨를 가슴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장손 태수(20
살 때 아버지를 찾으려 도일한 뒤 월북, 현재는 평양에 거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눈에
밟혔다.
“이제야 죽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모든 한을 풀었다”며 아들의 손을 다시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무이 조금만 더 사십시오. 태수도 곧 볼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 통일의 그날이 올 겁니
다”
노씨는 어머니 얼굴를 어루만지며 희망 하나를 또다시 심었다.
●유선태 기자 youst@na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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