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드라마가 할 수 있는 일(박태웅 2005.12.07)

지역내일 2005-12-07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일
박태웅 / 엠파스 부사장

이 대화를 한번 보자.
여 : 둘 영국에서 만났어?
남 : 왔었어. 방학하고 해외여행 겸해서 온 거겠지.
여 : 그런데 호텔이랑 비행기표는 왜 네가….그건 무슨 얘기야? 그걸 왜 네가 해 준거야?
남 : 왜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되는데? 난…. 먼 타국땅에서 너무나 황당한 일에 휘말려 있었고. 그래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필요했어…. 그 친구가 돈 때문에 곤란에 처해있다면 나한테 넘치는 그걸로 해결봐 줄 수 있는 거라면 해주는 게 도리아냐? 더 설명이 필요해?
여 : 그런데 왠 짜증이야, 너.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냐? 내가 네가 나온 사진 하나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면 안되는 고작 그런 위치밖에 안돼?
남 : 난 네가 신경쓰는 거 싫어. 넌 이 따위 신경쓰지 말고 건강 되찾을 궁리나 하라구.
여 : 나 같은 거 건강 따위 신경쓸 필요 없잖아? 난 지금 건강해. 너야말로 상관마.
남 : 건강하다구? 팔뚝이 모기다리만 해져서 건강하니 상관말라구? 주위에서 다들 얼마나 마음 졸이며 널 지켜보고 있는 지나 알아? 대체 뭐가 문제야? 뭐가 그렇게 괴로워 밥 하나 제대로 못 먹냐구?
여 : 내가 뭘 괴로워하는지 넌 알 필요 없어.
남 : 뭐라고?
여 : 네가 찍힌 사진 한장 궁금해 하는 것도 마땅찮아 하는 녀석이 내가 말라죽든 굶어죽든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드라마가 된대서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만화 ‘궁’의 한 대목이다. 스타감독인 황인뢰PD가 윤은혜, 김정훈, 송지효 등 젊은 스타들을 총동원해 찍고 있어 방영 전부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원작 만화를 집어 들고 읽다가, 끊임없이 나오는 위와 같은 대화에서 그만 숨이 탁 막혔다. 우선 이 글은 절대로 이 만화에 대한 흠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하겠다. ‘궁’은 좋은 만화다. 설정도 기발하고 그림도 볼만하다.
답답하고 무서운 것은 한국의 드라마에서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지옥같은 소통의 부재’가 여기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남과 여는 서로를 꽤 아끼고 있지만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엇나간다. 이 둘은 마치 들을 귀가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 같다.
한국의 수많은 드라마 속에서 대화는 대개 다섯 마디를 채 넘기지 못한다. 홈드라마에서조차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짜증을 낸 채로 장면을 넘긴다. 오직 말을 할뿐, 아무도 듣지 않는다.
소통의 부재의 역사는 유구하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는데, 서로를 애틋하게 좋아했지만 말을 안 해서, 결국 딴 사람과 결혼한 다음에 달을 보고 울었다는 노래는,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다. 이 노래가 유행하던 무렵엔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 노래에 실제로 공감하기도 했다. 요즈음은 다행히 ‘작업’은 하고들 산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흔히 한국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로 둘을 지적한다. 존댓말과, 군대가 그것이다. 기수가 하나만 차이가 나도 아래위를 따지고, 존대 여부를 따져, 종종 처음 보는 사이에도 멱살 드잡이가 일어난다. 그저 ‘you’ 하나로 모든 사람을 불러대고, 열댓 살 소년이 환갑이 넘은 아저씨더러 친구라고 여길 수 있는 ‘비존대어’ 사회를 보면 그저 부러울 밖에. 모든 신체 건장한 청년이 의무적으로 다녀오는 군대는 ‘까라면 까’의 일방통행을 이 청년들의 영혼 깊숙이 심어 내보낸다. 군대서 축구한 얘기를 자랑스레 해대는 ‘마초들의 천국’은 이렇게 확대재생산된다.
한국 드라마들은 대개 이런 지옥을 다지는데 이바지해왔다.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 주눅이 든 어머니, 두 마디도 듣기 전에 짜증을 내며 말을 가로막는 남자, 팩하니 말을 던지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리는 여자…. 어느 채널에서건 금세 볼 수 있는 전형들이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가 몇 편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봐야지 느낄 수 있는 법이다. 한번도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고함지르기를 멈추고 경청하기를 바라는 것은 기적이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이후 한국사람들의 축구 보는 안목을 단숨에 몇 배나 높여 놓았듯이, TV 드라마도 그런 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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