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시민이 세우는 도시계획<351호/ 정석>

지역내일 2000-09-18
"시민이 세우는 도시계획"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계획을 세운다. 방학을 맞는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그리는 생활
계획표에서부터 휴가계획, 결혼계획, 노후계획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계획을 세우면서 살아간다. 개인이 세우는 계획이 한 사람의 꿈이고 약속이라면, 도시계획은 도시의 미래에 대한 꿈이고, 그 꿈을 이루어나가기 위한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계획은 소중한 것이고, 바르게 세워져야 하며, 또한 잘 지켜져야 한다.

도시계획은 누가 세우는가? 도시계획을 세우는 일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장의 몫이다. 그런데
때로는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도시계획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시정부가 세운 도시계획이
지나치게 과도한 개발을 허용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던 시민들이 새로운 도시계
획을 직접 수립한 뒤 이를 시민투표에 부쳐 가결시켰던 일이 1989년 미국 시애틀에서 있었
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1984년 시애틀시는 기존의 도시계획을 크게 바꾼다. 민간이 건설하는 사무소 건물에 보육시
설, 소매점, 임대주택을 포함하거나 일반인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나 소공원을
조성할 경우, 법규가 허용하는 정도 이상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보너스를 주는 이른바 '인센
티브 죠닝'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이후 시애틀시는 폭발적인 개발붐을 맞게 된다. 원래
30층을 넘지 못할 건물이 이런저런 보너스를 받은 결과 50층, 60층까지 올라갔고 도시전체
의 개발밀도도 껑충 뛰었다.

이러한 과도한 개발 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1988년 11월에 시
민들은 마침내 '시민대안계획(Citizens Alternative Plan)'을 세우기에 이른다. 우리말로 모자 또는 뚜껑을 뜻하는 캡(CAP)으로 불렸던 시민대안계획은 매년 새로운 개발의 총량을 제한하고, 도심부 전역의 용적률을 낮추며, 최고 건물높이를 정해둠으로써 지나친 고층개발을 막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건설경기의 위축을 우려하던 개발업자들의 엄청난 물량공세와 반대 캠페인이 뒤따랐지만 시
민대안계획은 1989년 5월의 시민투표에서 62%의 찬성으로 가결되어 시애틀의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풀뿌리 민초들이 승리함으로써, 폭발
적으로 분출되던 개발욕구에 '뚜껑'을 씌우고 제어하게 된 것이다.

도시계획의 입안이나 변경에 관한 시민투표제도를 가지지 못한 우리로서는 조금은 먼 이야
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없진 않다. 최근에 새롭게 개정된 도시계
획법에 주민으로 하여금 도시계획의 입안을 제안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 신설되었기 때문이
다. 아직은 지구단위계획의 수립이나 변경 등으로 주민제안의 폭이 제한되어 있지만, 우리
시민들이 맘먹기에 따라서는 도시계획을 바로 세우는 일에 한 몫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의 꿈이 소중하듯 도시의 꿈도 소중하다. 도시의 꿈이 실현되고 지켜지기 위해서는 도
시계획이 바로 세워져야 하고, 도시계획을 바로 세우는 일에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좋은 도
시란 무엇인가? 도시를 아끼고 지킬 줄 아는 좋은 시민들이 사는 곳, 바로 그곳이 좋은 도
시인 것이다.
/정석(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설계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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