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이 깨끗이 빠져나가라”
기지 문화 확산 … 한때 지역경제 좌지우지
“한국 경제력 뛰면서 미군 경제력 줄었다”
해방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던 미군. 주한미군이 주둔한 지방자치단체는 모두 저마다의 미군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군감축과 한강이남 후퇴, 미군공여지 활용 등을 놓고 정부와 미군측은 다각도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는 아직 마음이 무겁다. 미군기지가 이전한 뒤 토지 활용방안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있기 때문이다.
전국 25개 지방자치단체에 76개의 미군기지가 있다. 자치단체는 미우나 고우나 미군기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동두천시의 경우 지역경제의 절반을 미군기지로 인한 간접효과를 누려왔다.
그러나 미군 공여지로 인한 그동안의 피해는 천문학적 액수를 기록한다. 재산세 종합토지세를 부과할 수도 없었고, 개인 재산권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50년만에 이전하는 미군기지로 공여지가 있는 25개 지자체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공여지를 무상으로 양여받아 공원 등 공공용지와 지역경제 거점 단지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해방과 함께 발을 들여놓은 미군을 광복 60주년을 맞아 미군 공여지가 있는 지역의 속사정을 들어본다.
“처음엔 초콜릿을 줬어. 그리고 달러를 줬지. 이젠 그들이 줄게 없어. 깨끗하게 땅이나 빨리 내놨으면 좋겠어.”
전체 행정구역 면적의 42%가 미군 공여지인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 앞 상가 주인의 말이다. 그는 미군의 행적에 대해 “공적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도움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60~70년대 전국이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이곳 동두천은 호황을 누렸다. ‘돈두천’이라고 불리고 ‘지나가던 개도 1달러는 안문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돌았다.
속칭 ‘양공주’가 등장하고 부대찌개가 날개 달린 듯 팔렸다. ‘양공주’ 중 일부는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동두천시 보산동 캠프 케이시는 동아시아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던 미2사단 사령부였다. 지금은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로 옮겼지만 미군의 숫자나 군무원들은 여전했다.
캠프 케이시의 군무원으로 있다 퇴직한 김모씨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동두천 미군은 지역에서 환영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민주화 바람이 불고 미군 관련 사고가 늘어나면서 미군측이 부대원 단속을 하기 시작하면서 외출을 꺼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 외출이 줄어들더라도 보산동 관광특구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관광특구 상인회 정인근 회장은 “미군에 대한 시각이 바뀌면서 미군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동두천 지역은 여전히 미군 특수를 누리고 있다”고 밝혔다.
‘미군 특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미군기지 이전이 가시화되면서부터다. 정 회장은 “미군만 평택으로 이전하고 기지는 그대로 남아있어 골칫덩이”라며 “지금처럼 미군들이 절반 정도 빠진 상태라면 영업도 안되고 규제만 남아있기 때문에 차라리 미군과 기지가 빨리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미군의 월급은 130여만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한달 동안 기지 주변 클럽 등에서 쓰는 돈은 60여만원으로 과거처럼 미군 특수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미군도 징병제였던 60년대 부유층 자녀들이 파견군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에는 한국 물가 등과 비교했을때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봤다.
그러나 70년대부터 모병제로 바뀌면서 ‘돈을 쓰는’ 미군들이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미군은 지역에서 ‘원조군’이라는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도심 한 가운데 미군기지가 있는 인천 부평도 상황은 마찬가지.
“미군부대라고는 하지만 안에 고물 창고, 빵공장 같은 것만 있는 것 같던데 지역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빨리 이전했으면 좋겠어요.”
부평미군부대(일명 캠프마켓) 옆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조용환(53)씨는 미군부대의 조속한 이전을 희망했다. 대부분 부평시민들이 그렇지만 미군부대가 더 이상 지역발전에 기여하는 부분이 없고 오히려 걸림돌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씨는 “거의 매일 동네를 통해 미군부대내로 커다란 고철을 실은 트럭, 빵 차가 오간다”며 “도심 한가운데 알짜배기 땅에 고물상 빵공장을 운영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지적했다.
미군부대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우성아파트 주민들은 더욱 미군부대의 이전을 바란다. 미군부대 터였다가 지난 2002년 4월5일 인근 주민들에게 개방된 ‘부영공원’ 때문. 부영공원은 잘 보존된 나무 등으로 인해 주민들에게 더 없는 휴식·운동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인근 주민들은 “미군이 옮겨가면 더 없이 좋은 녹지·공원이 생길 것”이라며 기대에 부풀어있다.
그러나 미군부대가 존재했기에 지금의 부평이란 도시도 생겼다. 조용환씨는 “과거 신촌(지금의 현대쇼핑몰 앞 상권)에는 술집과 양공주가 많았다”며 “부평에서 돈 번 사람들은 미군의 떡고물도 부자된 사람들이 많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던 30여년전 그는 미군으로부터 초콜렛과 담배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나마 미군부대로부터 나오는 갖가지 물자 덕에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풍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산곡동의 한 상인은 “그때는 미군이 고마운 존재였고 미군부대에 다닌다면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미 공군이 위치한 전북 군산시. 미성동 아메리카타운의 한 자영업자는 “미 공군기지가 처음 들어설때만 해도 아주 살만했다. 그런데 국내 물가가 오르고 필리핀 여성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미군들의 외출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아메리카타운에는 일반상가 65곳, 특수관광유흥음식점 15개 등이 영업하고 있다. 최근들어 미군측이 아메리카타운 출입통제령을 내려 영업이 어려운 실정이다. 적어도 21세기의 한국에서는 미군이 지역경제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기지 문화 확산 … 한때 지역경제 좌지우지
“한국 경제력 뛰면서 미군 경제력 줄었다”
해방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던 미군. 주한미군이 주둔한 지방자치단체는 모두 저마다의 미군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군감축과 한강이남 후퇴, 미군공여지 활용 등을 놓고 정부와 미군측은 다각도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는 아직 마음이 무겁다. 미군기지가 이전한 뒤 토지 활용방안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있기 때문이다.
전국 25개 지방자치단체에 76개의 미군기지가 있다. 자치단체는 미우나 고우나 미군기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동두천시의 경우 지역경제의 절반을 미군기지로 인한 간접효과를 누려왔다.
그러나 미군 공여지로 인한 그동안의 피해는 천문학적 액수를 기록한다. 재산세 종합토지세를 부과할 수도 없었고, 개인 재산권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50년만에 이전하는 미군기지로 공여지가 있는 25개 지자체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공여지를 무상으로 양여받아 공원 등 공공용지와 지역경제 거점 단지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해방과 함께 발을 들여놓은 미군을 광복 60주년을 맞아 미군 공여지가 있는 지역의 속사정을 들어본다.
“처음엔 초콜릿을 줬어. 그리고 달러를 줬지. 이젠 그들이 줄게 없어. 깨끗하게 땅이나 빨리 내놨으면 좋겠어.”
전체 행정구역 면적의 42%가 미군 공여지인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 앞 상가 주인의 말이다. 그는 미군의 행적에 대해 “공적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도움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60~70년대 전국이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이곳 동두천은 호황을 누렸다. ‘돈두천’이라고 불리고 ‘지나가던 개도 1달러는 안문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돌았다.
속칭 ‘양공주’가 등장하고 부대찌개가 날개 달린 듯 팔렸다. ‘양공주’ 중 일부는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동두천시 보산동 캠프 케이시는 동아시아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던 미2사단 사령부였다. 지금은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로 옮겼지만 미군의 숫자나 군무원들은 여전했다.
캠프 케이시의 군무원으로 있다 퇴직한 김모씨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동두천 미군은 지역에서 환영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민주화 바람이 불고 미군 관련 사고가 늘어나면서 미군측이 부대원 단속을 하기 시작하면서 외출을 꺼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 외출이 줄어들더라도 보산동 관광특구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관광특구 상인회 정인근 회장은 “미군에 대한 시각이 바뀌면서 미군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동두천 지역은 여전히 미군 특수를 누리고 있다”고 밝혔다.
‘미군 특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미군기지 이전이 가시화되면서부터다. 정 회장은 “미군만 평택으로 이전하고 기지는 그대로 남아있어 골칫덩이”라며 “지금처럼 미군들이 절반 정도 빠진 상태라면 영업도 안되고 규제만 남아있기 때문에 차라리 미군과 기지가 빨리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미군의 월급은 130여만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한달 동안 기지 주변 클럽 등에서 쓰는 돈은 60여만원으로 과거처럼 미군 특수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미군도 징병제였던 60년대 부유층 자녀들이 파견군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에는 한국 물가 등과 비교했을때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봤다.
그러나 70년대부터 모병제로 바뀌면서 ‘돈을 쓰는’ 미군들이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미군은 지역에서 ‘원조군’이라는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도심 한 가운데 미군기지가 있는 인천 부평도 상황은 마찬가지.
“미군부대라고는 하지만 안에 고물 창고, 빵공장 같은 것만 있는 것 같던데 지역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빨리 이전했으면 좋겠어요.”
부평미군부대(일명 캠프마켓) 옆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조용환(53)씨는 미군부대의 조속한 이전을 희망했다. 대부분 부평시민들이 그렇지만 미군부대가 더 이상 지역발전에 기여하는 부분이 없고 오히려 걸림돌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씨는 “거의 매일 동네를 통해 미군부대내로 커다란 고철을 실은 트럭, 빵 차가 오간다”며 “도심 한가운데 알짜배기 땅에 고물상 빵공장을 운영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지적했다.
미군부대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우성아파트 주민들은 더욱 미군부대의 이전을 바란다. 미군부대 터였다가 지난 2002년 4월5일 인근 주민들에게 개방된 ‘부영공원’ 때문. 부영공원은 잘 보존된 나무 등으로 인해 주민들에게 더 없는 휴식·운동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인근 주민들은 “미군이 옮겨가면 더 없이 좋은 녹지·공원이 생길 것”이라며 기대에 부풀어있다.
그러나 미군부대가 존재했기에 지금의 부평이란 도시도 생겼다. 조용환씨는 “과거 신촌(지금의 현대쇼핑몰 앞 상권)에는 술집과 양공주가 많았다”며 “부평에서 돈 번 사람들은 미군의 떡고물도 부자된 사람들이 많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던 30여년전 그는 미군으로부터 초콜렛과 담배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나마 미군부대로부터 나오는 갖가지 물자 덕에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풍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산곡동의 한 상인은 “그때는 미군이 고마운 존재였고 미군부대에 다닌다면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미 공군이 위치한 전북 군산시. 미성동 아메리카타운의 한 자영업자는 “미 공군기지가 처음 들어설때만 해도 아주 살만했다. 그런데 국내 물가가 오르고 필리핀 여성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미군들의 외출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아메리카타운에는 일반상가 65곳, 특수관광유흥음식점 15개 등이 영업하고 있다. 최근들어 미군측이 아메리카타운 출입통제령을 내려 영업이 어려운 실정이다. 적어도 21세기의 한국에서는 미군이 지역경제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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