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 김가진 일가의 4대에 걸친 나라사랑

지역내일 2005-05-27 (수정 2005-06-03 오후 1:04:33)
동농과 그 후손들의 나라사랑은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큰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임정의 안팎살림을 맡은 일꾼들이다. 그들의 외아들 김자동은 임정기념사업회장으로 독립정신 계승에 매진하고 있다. 동농의 차남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관계됐고, 그의 아들 김석동은 임정 광복군에서 최연소 대원이었다. 동농의 후손들은 사회민주화에 나섰다. 김자동의 큰 딸 김진현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노조위원장이고, 그의 남편은 곽태원 전국사무금융노련 위원장이다. 둘째 딸 김선현은 1987년 이후 한국과 호주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웨스트팩 은행 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1대>
동농 김가진 (1846~1922)
종1품 개화파 관료에서 무장독립투쟁 꿈 꾼 공화주의자로 변신

동농 김가진은 1846년(헌종 12년)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동농은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응균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이른바 서얼이었다.
동농의 과거 응시가 불가능한 서얼 출신들과 교류하며 세월을 보냈다. 동농은 1877년(고종 14년) 11월 서얼 중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어지던 규장각 검서관에 진출했다. 동농은 5년간 하급관리로서 한직을 돌아야 했다.
동농은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 주사(6품)에 발탁되어 고종의 측근으로 부상하는 한편 대 러시아 비밀외교를 보좌했다.

갑오경장 주역 참여
독립문에 글씨 남겨
조선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비로소 적서차별을 타파했다. 동농은 1886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문과에 응시, 급제했다. 동농은 1887년 5월부터 4년간 주차 일본공사로 일본에 상주하며 반청자주외교를 펼쳤다. 이 때 동농은 이른바 ‘동양 삼국 공영론’을 받아들였으며, 일본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다.
1894년 박정양 김윤식 유길준과 함께 갑오경장의 주역으로 참여해 각종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 때 동농은 ‘군주주도형 입헌군주제’를 꿈꾸었다. 이 시기 이조참판 병조참판 공조판서를 맡아 정경의 반열에 올랐다.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됐을 때는 독립문의 한자및 한글 글씨를 직접 썼다.
이후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참의, 중추원 부의장, 충청남도 관찰사를 거쳐 1907년 11월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동농은 1907년 11월 남궁억 장지연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만들었다. 대한협회는 애국과 실력배양을 표방했지만 일제의 억압으로 점차 정치적 성격을 상실했다. 동농은 1908년 7월 2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대한협회는 일제 침략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개화지식인의 모임이었다. 의병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주장하자, 대한협회는 국민대회를 열어 이를 규탄했다. 대한협회는 1910년 경술국치 후 해체됐다.

3·1운동 후 근대적 민주사회 지향
실의에 빠져 칩거하던 동농에게 3.1운동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농은 항일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았다. 대동단은 봉건적 사회지배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민주사회를 지향했다. 대동단은 19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지하유인물 배포와 같은 항일활동을 했다. 대동단 사건으로 투옥된 사람이 30명에 달했다.
대동단은 동농과 의친왕 이 강(고종의 다섯째 아들)의 상해망명을 계획한다. 두 사람은 사돈 사이다. 동농이 아들 김의한과 함께 1919년 10월 10일 상해에 도착하자 이동녕 김 구 등이 그를 환영했다. 동농의 망명은 국내외에 파문을 일으켰다. 현지 언론이 대서특필 했다. 당시 일제는 국제외교무대에서 ‘임정은 하층민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대신을 지낸 사람이 임정에 참여한 것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북로군정서 고문 추대
1921년 임정 안에는 다양한 노선이 대립했다. 동농은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해 북간도 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동농이 1922년 7월 4일 사망하자 임정은 어려운 형편에도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만국공묘에 안장했다. 임정 국무위원 전원 이름으로 부고를 냈고, 홍 진 국무위원회 주석이 식사를 했다.
동농은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김의한 김용한 김정원(여) 김각한 김영원(여) 3남2녀를 두었다.

<2대>
성엄 김의한 (1900~1964, 1990년 독립장 추서)
수당 정정화 (1900~1991, 1982년 애족장 서훈)
임정 안팎살림 묵묵히 떠맡았던 일꾼 국내잠입 여섯 차례

김의한(1900~1964)은 동농 김가진의 큰아들이다. 그의 부인 정정화(1900~1991)는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2남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두 사람은 1910년 결혼해 외아들 김자동을 두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해로 망명하자 정정화는 대담한 결심을 한다. 1920년 1월 시어머니에게는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와, 친정아버지가 준 800원을 갖고 서울 의주 봉천 천진 남경을 거쳐 열흘 만에 상해에 도착했다.

한 밤 중 압록강에 거룻배 띄워 탈출
대개 혼자 몸인 임정 요인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부엌살림은 정정화의 몫이었다. 쪼들리는 살림에 애가 탄 정정화는 1920년 3월 임정의 비밀통신연락망인 ‘연통제’를 이용해 국내에 잠입했다.
20일 동안 모금한 약간의 돈을 갖고 한 밤 중 압록강에 거룻배를 띄워 조선을 탈출했다. 상해에 도착한 후에야 이 사실을 안 임정요인들은 정정화의 담력에 감탄을 했다.
정정화는 1921년 늦은 봄 역시 돈을 구하러 조선에 잠입했다. 1922년 6월 3차 잠입 때는 이미 임정의 비밀연락망이 붕괴되어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다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서울 체류 중 동농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정화는 이후에도 세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30년 여섯 번째 잠입을 했을 때 민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임정 간판을 들고 7년 떠돌이 생활
1930년대 들어 임시정부는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국내와도 단절됐다. 백범 김 구는 애국단을 조직해 침략원흉들의 저격에 나섰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1932년 4월 29일 일제는 일왕의 생일인 이른바 천장절 행사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었다. 이곳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침략원흉들을 응징했다.
당시 상해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임정을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임정 요인들은 임시정부의 간판을 들고 1939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7년동안 중국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김의한은 임정 국무원 비서직을 맡아 비서장 차이석과 함께 살림을 맡았다. 임정의 안살림은 정정화가 맡았다. 정정화는 혼자 100명이 넘는 식구들의 식사를 차리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살았다.

해방, 그리고 개인자격 귀국
“왜적이 항복! 이것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군 유격대를 국내에 투입할 계획을 세우던 백범은 이렇게 탄식했다.
미군정은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허용했지만 개인자격이었다. 김의한 일가를 포함해서 중경에서 살던 임정 가족은 1946년 1월 하순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김의한 일가는 3월 초순 동농의 묘소를 참배했다. 김의한 정정화는 몸 어느 구석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들어있는지, 그 많은 눈물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이 날의 참배가 마지막 성묘가 되고 말았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김의한의 납북
1948년 봄 단정 수립을 반대하던 한독당은 4월 19일 남북협상에 나섰다. 백범을 따라 김의한도 협상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남북협상은 실패했고, 5월 5일 이들이 귀경했을 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단독정부의 부통령으로 선출된 성재 이시영은 정정화에게 감찰위원회 위원을 제안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정정화는 이 자리를 거절했다.
1950년 6.25는 김의한 가족을 갈라놓았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서울을 철수하던 북한군은 김의한을 비롯해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 김규식 엄항섭 최동오 등을 북으로 끌고 갔다.
1.4후퇴 때 노모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 남았던 정정화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부역죄 혐의를 쓰고, 일본경찰 출신들에게 모욕을 당했다. 정정화는 한 달 만에 무죄나 다름없는 집행유예로 나왔다.

큰 상처 남긴 ‘부역죄’ 사건
이 사건은 정정화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칠흑 같은 밤, 압록강에 거룻배를 띄우던 담력과 격랑의 역사를 온 몸으로 부딪쳐 나갔던 패기를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을 지탱한 힘인 근면, 성실함은 여전했다.
후손들은 정정화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이타심이 강했다고 회고했다. 중국에서 함께 살던 사람을 찾아다니며 보살폈다. 운명하기 전까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틈만 나면 신문이나 책을 손에 쥐었다.
김의한은 북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1964년 10월 9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자택에서 운명했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모셔졌다.
1982년 정부의 독립유공자 발굴사업으로 정정화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0년에는 납북된 김의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정정화는 1987년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한 ‘녹두꽃’을 집필했다. 이 책은 1998년 ‘장강일기’로 이름을 바꿔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정정화의 일대기는 ‘치마’ ‘아, 정정화’ 등의 이름으로 연극무대에 올려졌다. 정정화는 1991년 92세로 사망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3대>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석동 (광복군 활동·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임정 ‘대표손자’로서 독립정신 계승에 매달려

김자동(77)은 1929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김씨는 어린 시절을 피난민 보따리와 임시정부 그늘에서 보냈다. 백범,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 안에서 자랐다. 임정의 ‘대표 손자’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김자동은 1949년 9월 서울 법대에 진학했지만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6.25를 미군부대에서 통역원으로 보낸 김자동은 195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4년간 재직했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받아쓰는 기사가 싫어 사표를 냈다.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사가 창간되자 다시 기자로 나섰다. 민족일보는 남북협상과 교류, 중립화 통일, 민족자주통일 추진 등을 주장한 진보적 신문이었다. 5·16 쿠데타 직후인 5월19일 지령 9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됐다. 몇 해 전 김자동은 민족일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진상규명에 뛰어들었다.
김자동은 무역회사에 근무하기도 하고 개인사업을 했지만 사업은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커밍스)’ ‘레닌의 회상(크루프스카야)’ ‘모택동 전기 1~4’ ‘고요한 돈 강’ 등을 번역했다.
김자동은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독립정신을 계승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김자동 김숙정 부부는 김진현 김선현 김준현(남) 김미현 3녀1남을 두었다.
광복군에서 활동한
동농 차남의 아들 김석동
동농의 둘째 아들인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1928년 자살했고 부인도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 김석동은 중국으로 와서 김의한 일가와 함께 살았다.
1939년 2월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유주에서 창설될 때 김석동은 최연소 대원이었다. 이 조직은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거쳐 광복군으로 발전했다.
김석동은 해방 후 귀국할 때까지 줄곧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4대>
사회운동에 헌신한 동농 후손들

김자동의 자녀들은 인생을 지탱하는 힘으로 ‘정직’이나 ‘진실’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어려서부터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컸다고 했다.
김자동의 첫째딸 김진현(49)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노조위원장이다. 1984년 입사해서 10년 이상을 노조상근자로 보냈다.
김진현은 “어려서부터 집안 분위기가 내 이익만 챙기지 않으며, 생각한 것은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노조활동 과정에서 고비도 많았지만 ‘정직’과 ‘원칙’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노조활동을 계기로 만난 곽태원씨와 결혼했다. 곽씨는 현재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다.
김자동의 둘째딸인 김선현(47)은 대학 졸업 후 호주계 웨스트팩 은행에서 근무했다. 1987년 이 은행에 노조가 만들어지자 은행은 노조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은행이 김선현을 ‘투사’로 만들었다. 김선현은 위원장을 맡아 6년 동안 민족차별, 남녀차별, 권위주의와 싸웠다.
1994년 은행 퇴직 후 섬유기계 수출업을 하다 1999년부터 아버지가 세운 (주)재이스 경영을 맡았다. 한 해 매출 49억 원인 회사를 지난해에 매출 540억 원으로 키웠다. 재이스는 품질과 납기관리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고 있는 현대기아자동차 협력업체다.
“기업은 노사 모두에게 행복하고 즐겁고, 안정적인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김선현은 정밀가공과 변속기 분야에서 ‘좋은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셋째이며 외아들인 김준현은 (주)재이스에서 일하고 있으며, 3녀 김미현은 전업주부다.

/신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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