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못 잊을 내 인생 최악의 날
2001년 1월 16일 오전 11시 45분경. 순천의 모 오피스텔 천정 텍스 작업을 하던 김병록 씨(54세)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3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둔중한 신음만 흘릴 뿐, 그는 통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이 사고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전신을 압박해 오는 숨 막히는 통증도 마치 남의 일인 양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인부들의 우왕좌왕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큰 공사를 앞두고 재수 없게 다치다니!’
그는 곧 근처의 성가롤로 병원에 실려 갔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김병록 씨의 요추 1번이 심하게 골절돼 있었다. 이틀 뒤, 그는 여섯 개의 금속 나사못을 이용하여 척추뼈를 고정한 뒤 뼈융합을 시키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해 3월 15일에 3억짜리 전기공사를 맡기로 돼 있었거든요. 그 일을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래, 아파서 죽겄는데도 하루라도 빨리 나갈 욕심에 수술할 때 무통제 주사, 수술 뒤의 진통제를 일절 거부했어요. 근데 담당의사가 최하 5개월은 입원해야 되고 퇴원 후에도 한 2년 동안은 일을 못할 거라고 하는 거예요.”
돈을 벌기는커녕 당분간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게 생겼으니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장해 판정도 6급 5호가 나왔다. 공단에서 조사가 나와 평균 임금을 물었을 때 멋모르고 “한 5만 원 적어 놓으쇼!” 하고 대답한 게 실책이었다. ‘노동법’에 무지한 탓에 그저 임금을 싸게 이야기하는 게 좋은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70~80만 원은 받았어야 할 휴업 급여를 50~60만 원밖에 못 받았다.
“지금 당장 현장에 가도 기술이 필요한 일은 15만 원 받거든요. 93년 대우전기 공사부 대리 할 때도 월급이 3백이었어요. 직장생활 했던 기록도 다 남아 있구요. 근데 내가 다칠 때는 이걸 몰랐어요. 억울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만 할 줄 알았지 노동법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거죠. 노무사 찾아가 보니까 소송 과정이 복잡하더라구요. 그래서 ‘에이, 괜히 골치 아픈 일에 메이느니 하루 빨리 나아서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 낫겠다.’하고 마음을 접었죠.”
“제 고향은 지금 한창 홍길동 생가를 짓고 있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예요. 제 아버지는 우리 8남매 키우느라 평생 뼈 빠지게 일만 하신 분이죠. 낮에 농사일 하시고 밤에는 공사장에 야간 경비 서시고 잠도 한두 시간 밖에 못자요. 그렇게 고생하셔서 악착 같이 자식들 공부시키셨어요. 저야 야간고등학교 간신히 마쳤지만 내 밑에 동생들은 다 대학 나왔거든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저 장성중학교 갈 때 논 두 마지기 팔아서 교복이랑 가방이랑 등록금이랑 자전거랑 마련해 주셨어요.”
야간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광주로 나온 그는 친척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운영하는 자동차 부속품 가게에서 먹고 자며 일을 거들었다. 학비 대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월급이 따로 있었겠는가. 비록 주경야독하는 신세지만, 급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독한 놈’ 소리를 들어가며 밤 한두 시까지 책과 씨름하는 모범 청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자동차 부품 회사를 다니던 그는 70년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와 황학동에서 청과물도매를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부인 김경자 씨.
“지금은 저렇게 건장해졌지만, 처녀 적에는 아주 날씬하고 다리가 예뻐서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렸지요. 제가 그때 청과물을 오래 하지는 않았는데 아마 저 사람 만나려고 서울에 올라왔던가 봐요.”
1975년에 결혼한 두 사람이 이듬해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 농장이었다. 5만4천여 평에 달하는 그 거대한 농장의 소유주는 당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병록 씨의 고종사촌 형으로,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씨의 부검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젖소 50~60두에 닭 3만 마리, 사료 공장까지 거느린 그 농장에 오는 관리인마다 한 몫 잡아서 나가곤 했다니, 사촌 되는 이가 김병록 씨에게 관리를 맡긴 이유를 알만 하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고 부지런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한 김병록 씨는 10원 한 장 허투루 돌리지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했다. 76년부터 82년까지 7년 동안 일한 대가로 손에 쥔 것은 일금 3백만 원과 위염.
83년에 광양에 내려와 부인 김경자 씨는 만두집을 열고, 김병록 씨는 83년부터 89년까지 고창기계시스템 기술관리과장, 90년부터 대우전기 공사부 대리, 96년부터 금호전력 공사과장 등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아직까지 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다. 슬하에 둔 자식은 하나뿐이지만 일곱이나 되는 동생들 치다꺼리에 돈 모을 겨를이 없었던 것.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남의 농장과 가겟방을 전전하며 자란 아들 재일 씨가 구김살 없이 성장해 준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지금까지 한 54년 살아오면서 느끼는 건 사람이 불량기도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의 것은 10원 한 장 건드리지 않고 사기성 없이 곧이곧대로 산 결과가 이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돼지 한 3천 두 기르는 후배가 있어요. 내가 회사 생활할 때 한 팔년 데리고 있었던 얘거든요. 남보다 기술도 빨리 전수해 주고 반장 주임도 막 시켜 주고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봉게 32평짜리 아파트도 사놓고 그랬더라구요. 저요? 그 회사 나올 때 305만 원 갖고 내려왔어요. 팔잔가 봐요, 허허….”
김병록 씨가 요추 골절로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안 그래도 복잡했던 가정은 더욱 엉망이 됐다. 9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집안의 경제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부인 김경자 씨가 광양에서 십여 년간 해 오던 ‘신포우리만두’ 체인점은 IMF의 된서리와 잇단 오토바이 사고로 간판을 내린 지 오래였다. 전국을 떠돌며 음악을 하던 아들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97년에 얻은 손녀 유림이는 쑥쑥 자라는데 그 밑감당을 어떻게 다 할 것인가.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암담함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에서 보내 준 광주재활훈련원 소개 책자에 그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는 7개월여의 병원 생활을 끝나자마자 광주재활훈련원 산업설비과에 입교했다.
“나보다 더 심한 장해를 입고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동기생들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어요. 마정용 선생, 김창현 선생 등 도움을 주려는 분들도 많았구요. 제가 원래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그런데 재활훈련원에서 학과 수업과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어요.”
한 가지, 훈련 기간 동안의 가족들 생계 문제가 걱정거리였다.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훈련원에 취업 허가를 얻어 전기공사며 보일러공사 일을 다녔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으나 그걸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온수온돌기능사, 공조냉동기계기능사, 보일러취급기능사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공부에 몰두했다. 얼마나 공부에 몰두했던지 선생들마저 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가 이처럼 무리를 하면서까지 열심을 부리는 이유가 있었다. 훈련원을 마치는 대로 창업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김병록 씨 같은 산재 노동자를 위해 자립점포 임대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마침내 2003년 12월 1일, 김병록 씨는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늘푸른 설비건설(062-953-4616)’이라는 멋진 간판을 올렸다. 사무실 인테리어는 물론 가게 공터를 이용해서 다섯 식구가 생활할 가건물도 그의 손으로 직접 했다. 때마침 음악 활동을 정리하고 돌아온 아들이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뒤늦게 신학대를 졸업한 아내도 광양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을 개시했다.
‘산재’라는 비싼 수업료는 물었지만 그는 새로 얻은 인생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몸의 한쪽 마비되지 않을 정도로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하며, 젊은 날 제 하고픈 일 마음껏 하다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아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하며, 어차피 몸뚱이 굴려 일할 것이라면 남 눈치 보는 일 없이 자기 사업을 하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부인 김경자 씨가 ‘일은 너무 많이 해주고 돈은 너무 조금 받는’ 실속 없는 남편을 타박해도 그는 입술 끝이 눈가에 닿게 하회탈처럼 웃는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키는 아들 녀석만 보면 찌푸린 마음도 비 개인 아침처럼 활짝 펴진다는 것을 알기에.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2001년 1월 16일 오전 11시 45분경. 순천의 모 오피스텔 천정 텍스 작업을 하던 김병록 씨(54세)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3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둔중한 신음만 흘릴 뿐, 그는 통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이 사고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전신을 압박해 오는 숨 막히는 통증도 마치 남의 일인 양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인부들의 우왕좌왕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큰 공사를 앞두고 재수 없게 다치다니!’
그는 곧 근처의 성가롤로 병원에 실려 갔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김병록 씨의 요추 1번이 심하게 골절돼 있었다. 이틀 뒤, 그는 여섯 개의 금속 나사못을 이용하여 척추뼈를 고정한 뒤 뼈융합을 시키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해 3월 15일에 3억짜리 전기공사를 맡기로 돼 있었거든요. 그 일을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래, 아파서 죽겄는데도 하루라도 빨리 나갈 욕심에 수술할 때 무통제 주사, 수술 뒤의 진통제를 일절 거부했어요. 근데 담당의사가 최하 5개월은 입원해야 되고 퇴원 후에도 한 2년 동안은 일을 못할 거라고 하는 거예요.”
돈을 벌기는커녕 당분간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게 생겼으니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장해 판정도 6급 5호가 나왔다. 공단에서 조사가 나와 평균 임금을 물었을 때 멋모르고 “한 5만 원 적어 놓으쇼!” 하고 대답한 게 실책이었다. ‘노동법’에 무지한 탓에 그저 임금을 싸게 이야기하는 게 좋은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70~80만 원은 받았어야 할 휴업 급여를 50~60만 원밖에 못 받았다.
“지금 당장 현장에 가도 기술이 필요한 일은 15만 원 받거든요. 93년 대우전기 공사부 대리 할 때도 월급이 3백이었어요. 직장생활 했던 기록도 다 남아 있구요. 근데 내가 다칠 때는 이걸 몰랐어요. 억울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만 할 줄 알았지 노동법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거죠. 노무사 찾아가 보니까 소송 과정이 복잡하더라구요. 그래서 ‘에이, 괜히 골치 아픈 일에 메이느니 하루 빨리 나아서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 낫겠다.’하고 마음을 접었죠.”
“제 고향은 지금 한창 홍길동 생가를 짓고 있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예요. 제 아버지는 우리 8남매 키우느라 평생 뼈 빠지게 일만 하신 분이죠. 낮에 농사일 하시고 밤에는 공사장에 야간 경비 서시고 잠도 한두 시간 밖에 못자요. 그렇게 고생하셔서 악착 같이 자식들 공부시키셨어요. 저야 야간고등학교 간신히 마쳤지만 내 밑에 동생들은 다 대학 나왔거든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저 장성중학교 갈 때 논 두 마지기 팔아서 교복이랑 가방이랑 등록금이랑 자전거랑 마련해 주셨어요.”
야간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광주로 나온 그는 친척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운영하는 자동차 부속품 가게에서 먹고 자며 일을 거들었다. 학비 대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월급이 따로 있었겠는가. 비록 주경야독하는 신세지만, 급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독한 놈’ 소리를 들어가며 밤 한두 시까지 책과 씨름하는 모범 청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자동차 부품 회사를 다니던 그는 70년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와 황학동에서 청과물도매를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부인 김경자 씨.
“지금은 저렇게 건장해졌지만, 처녀 적에는 아주 날씬하고 다리가 예뻐서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렸지요. 제가 그때 청과물을 오래 하지는 않았는데 아마 저 사람 만나려고 서울에 올라왔던가 봐요.”
1975년에 결혼한 두 사람이 이듬해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 농장이었다. 5만4천여 평에 달하는 그 거대한 농장의 소유주는 당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병록 씨의 고종사촌 형으로,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씨의 부검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젖소 50~60두에 닭 3만 마리, 사료 공장까지 거느린 그 농장에 오는 관리인마다 한 몫 잡아서 나가곤 했다니, 사촌 되는 이가 김병록 씨에게 관리를 맡긴 이유를 알만 하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고 부지런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한 김병록 씨는 10원 한 장 허투루 돌리지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했다. 76년부터 82년까지 7년 동안 일한 대가로 손에 쥔 것은 일금 3백만 원과 위염.
83년에 광양에 내려와 부인 김경자 씨는 만두집을 열고, 김병록 씨는 83년부터 89년까지 고창기계시스템 기술관리과장, 90년부터 대우전기 공사부 대리, 96년부터 금호전력 공사과장 등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아직까지 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다. 슬하에 둔 자식은 하나뿐이지만 일곱이나 되는 동생들 치다꺼리에 돈 모을 겨를이 없었던 것.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남의 농장과 가겟방을 전전하며 자란 아들 재일 씨가 구김살 없이 성장해 준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지금까지 한 54년 살아오면서 느끼는 건 사람이 불량기도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의 것은 10원 한 장 건드리지 않고 사기성 없이 곧이곧대로 산 결과가 이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돼지 한 3천 두 기르는 후배가 있어요. 내가 회사 생활할 때 한 팔년 데리고 있었던 얘거든요. 남보다 기술도 빨리 전수해 주고 반장 주임도 막 시켜 주고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봉게 32평짜리 아파트도 사놓고 그랬더라구요. 저요? 그 회사 나올 때 305만 원 갖고 내려왔어요. 팔잔가 봐요, 허허….”
김병록 씨가 요추 골절로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안 그래도 복잡했던 가정은 더욱 엉망이 됐다. 9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집안의 경제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부인 김경자 씨가 광양에서 십여 년간 해 오던 ‘신포우리만두’ 체인점은 IMF의 된서리와 잇단 오토바이 사고로 간판을 내린 지 오래였다. 전국을 떠돌며 음악을 하던 아들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97년에 얻은 손녀 유림이는 쑥쑥 자라는데 그 밑감당을 어떻게 다 할 것인가.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암담함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에서 보내 준 광주재활훈련원 소개 책자에 그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는 7개월여의 병원 생활을 끝나자마자 광주재활훈련원 산업설비과에 입교했다.
“나보다 더 심한 장해를 입고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동기생들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어요. 마정용 선생, 김창현 선생 등 도움을 주려는 분들도 많았구요. 제가 원래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그런데 재활훈련원에서 학과 수업과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어요.”
한 가지, 훈련 기간 동안의 가족들 생계 문제가 걱정거리였다.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훈련원에 취업 허가를 얻어 전기공사며 보일러공사 일을 다녔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으나 그걸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온수온돌기능사, 공조냉동기계기능사, 보일러취급기능사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공부에 몰두했다. 얼마나 공부에 몰두했던지 선생들마저 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가 이처럼 무리를 하면서까지 열심을 부리는 이유가 있었다. 훈련원을 마치는 대로 창업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김병록 씨 같은 산재 노동자를 위해 자립점포 임대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마침내 2003년 12월 1일, 김병록 씨는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늘푸른 설비건설(062-953-4616)’이라는 멋진 간판을 올렸다. 사무실 인테리어는 물론 가게 공터를 이용해서 다섯 식구가 생활할 가건물도 그의 손으로 직접 했다. 때마침 음악 활동을 정리하고 돌아온 아들이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뒤늦게 신학대를 졸업한 아내도 광양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을 개시했다.
‘산재’라는 비싼 수업료는 물었지만 그는 새로 얻은 인생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몸의 한쪽 마비되지 않을 정도로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하며, 젊은 날 제 하고픈 일 마음껏 하다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아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하며, 어차피 몸뚱이 굴려 일할 것이라면 남 눈치 보는 일 없이 자기 사업을 하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부인 김경자 씨가 ‘일은 너무 많이 해주고 돈은 너무 조금 받는’ 실속 없는 남편을 타박해도 그는 입술 끝이 눈가에 닿게 하회탈처럼 웃는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키는 아들 녀석만 보면 찌푸린 마음도 비 개인 아침처럼 활짝 펴진다는 것을 알기에.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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