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넷째 주.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쇼팽의 편지>라는 타이틀의 듀오 연주회 열렸다. 주인공은 한국인 지문 날인을 거부했다가 영주권을 박탈당했던 재일교포 3세 최선애 씨(45)와 첼리스트인 남편 미야케 스스무 씨(43)였다. 최씨의 피아노 독주 혹은 두 사람의 듀오 연주가 한 곡씩 끝날 때마다 쇼팽이 프랑스에서 조국 폴란드를 그리워하며 쓴 편지를 비롯해 문익환 목사, 정경모 씨의 시가 낭독됐다.
이날의 콘서트는 1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영주권을 회복한 최씨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선택>의 한국 초연을 앞두고 열렸다.
“제게 한국과 일본은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와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죠. ”
최씨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인권 회복 운동에 평생을 바친 고 최창화 목사다. 아버지의 재일 한국인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을 지켜보던 소녀에게 한국인이라는 건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고 생각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아버지는 ‘최’라는 성을 ‘사이’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지 않게 하려고 학교를 찾았다. ‘최’라고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그에게 “사이라고 해도 좋잖아”라고 대꾸하는 선생들을 겪으며 어느새 그의 마음속에는 ‘최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라는 의문이 자리 잡았다. 이윽고 대학교 2학년이던 해, 그와 여동생은 외국인 등록 때 해야 되는 지문 날인을 거부할 것을 결심했다.
“우리는 일본 사회에서 받는 굴욕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음을 깨달은 거예요. 내가 이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자식들은 이 괴로움을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결국 미국 인디애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던 1986년, 영주권 박탈과 재입국 불허 처분을 받은 그는 이후 180일 체류만 가능한 신규 입국자 자격으로 일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문 날인 거부 재판에서 이미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에는 재입국 불허 취소 소송과 영주권 확인 소송을 걸어 ‘일본국’을 법정으로 불러냈다. 1989년에 시작된 소송은 고등법원에서의 승소, 국가의 상고, 대법원에서의 패소로 지루하게 이어지며 근 10년을 끌었다.
그동안 “차별은 거부한다. 그러나 일본은 내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그의 호소에 1만 명 이상의 지문 날인 거부자와 유보자, 그를 지원하는 일본인 친구들이 늘어나 있었다. 1999년에는 국회가 외국인 등록법을 개정하면서 최씨 한 사람만을 위해 ‘특별 영주자로 간주한다’는 부칙을 신설했다. 마침내 영주권을 박탈당한 지 14년 만인 2000년 4월, “40세가 되어서야 손에 쥔 영주 허가 인장은 세 살 때부터 갖고 있던 영주권과는 무게가 달랐다”.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한 연극 <선택>은 지문 날인을 거부하던 20대 대학생 때부터 영주권을 되찾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수기 <내 나라를="" 찾아서="">를 일본 극단이 무대에 올린 것. 미국 유학 시절 만나 일본인이라 안 된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남편 미아케 스스무가 극 중 주인공의 애인으로 출연하고 첼로 연주로 무대 음악을 맡았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향 일본을 그리워하고 다시 갈 수 있을지 안타까워하던 시절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제 결단을 이해해주고 모든 법정 소송을 옆에서 지켜보며 응원해준 사람이죠. 두 딸은 엄마의 사연을 잘 알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 공부에 관심이 많습니다.”
연극 <선택>의 한국 공연은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해 기획되었지만 최씨 부부가 한국을 방문한 시기는 마침 독도 문제로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망언이니 역사 왜곡, 독도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재일교포들은 어느 편도 들 수 없어 곤란해진다.
“시마네현 의회를 비롯해 일본의 우익단체에 대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최씨는 많은 일본인과 재일교포들이 독도를 둘러싼 양국 간의 문제가 감정적인 싸움으로 치닫지 않고 이성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건 그의 콘서트에서 낭독된, 재일통일운동가 정경모 씨의 시가 말하는 ‘선한 싸움’을 지켜온 이로서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다.
/오진영 기자 ojy@naeil.com·사진 이의종 기자선택>내>선택>선택>
이날의 콘서트는 1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영주권을 회복한 최씨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선택>의 한국 초연을 앞두고 열렸다.
“제게 한국과 일본은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와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죠. ”
최씨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인권 회복 운동에 평생을 바친 고 최창화 목사다. 아버지의 재일 한국인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을 지켜보던 소녀에게 한국인이라는 건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고 생각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아버지는 ‘최’라는 성을 ‘사이’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지 않게 하려고 학교를 찾았다. ‘최’라고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그에게 “사이라고 해도 좋잖아”라고 대꾸하는 선생들을 겪으며 어느새 그의 마음속에는 ‘최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라는 의문이 자리 잡았다. 이윽고 대학교 2학년이던 해, 그와 여동생은 외국인 등록 때 해야 되는 지문 날인을 거부할 것을 결심했다.
“우리는 일본 사회에서 받는 굴욕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음을 깨달은 거예요. 내가 이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자식들은 이 괴로움을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결국 미국 인디애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던 1986년, 영주권 박탈과 재입국 불허 처분을 받은 그는 이후 180일 체류만 가능한 신규 입국자 자격으로 일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문 날인 거부 재판에서 이미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에는 재입국 불허 취소 소송과 영주권 확인 소송을 걸어 ‘일본국’을 법정으로 불러냈다. 1989년에 시작된 소송은 고등법원에서의 승소, 국가의 상고, 대법원에서의 패소로 지루하게 이어지며 근 10년을 끌었다.
그동안 “차별은 거부한다. 그러나 일본은 내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그의 호소에 1만 명 이상의 지문 날인 거부자와 유보자, 그를 지원하는 일본인 친구들이 늘어나 있었다. 1999년에는 국회가 외국인 등록법을 개정하면서 최씨 한 사람만을 위해 ‘특별 영주자로 간주한다’는 부칙을 신설했다. 마침내 영주권을 박탈당한 지 14년 만인 2000년 4월, “40세가 되어서야 손에 쥔 영주 허가 인장은 세 살 때부터 갖고 있던 영주권과는 무게가 달랐다”.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한 연극 <선택>은 지문 날인을 거부하던 20대 대학생 때부터 영주권을 되찾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수기 <내 나라를="" 찾아서="">를 일본 극단이 무대에 올린 것. 미국 유학 시절 만나 일본인이라 안 된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남편 미아케 스스무가 극 중 주인공의 애인으로 출연하고 첼로 연주로 무대 음악을 맡았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향 일본을 그리워하고 다시 갈 수 있을지 안타까워하던 시절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제 결단을 이해해주고 모든 법정 소송을 옆에서 지켜보며 응원해준 사람이죠. 두 딸은 엄마의 사연을 잘 알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 공부에 관심이 많습니다.”
연극 <선택>의 한국 공연은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해 기획되었지만 최씨 부부가 한국을 방문한 시기는 마침 독도 문제로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망언이니 역사 왜곡, 독도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재일교포들은 어느 편도 들 수 없어 곤란해진다.
“시마네현 의회를 비롯해 일본의 우익단체에 대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최씨는 많은 일본인과 재일교포들이 독도를 둘러싼 양국 간의 문제가 감정적인 싸움으로 치닫지 않고 이성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건 그의 콘서트에서 낭독된, 재일통일운동가 정경모 씨의 시가 말하는 ‘선한 싸움’을 지켜온 이로서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다.
/오진영 기자 ojy@naeil.com·사진 이의종 기자선택>내>선택>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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