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⑪ 부산 남구 대연동 준 미용실 원장 김혜연씨

슬픈 절름발이의 청춘

지역내일 2005-01-26
김혜연 씨(51세)를 만나러 가던 날, 부산에는 눈이 몹시 내렸다. 4~5년 만의 큰 눈이라 했다.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는 혜연 씨의 손길은 부산했지만, 무슨 말 끝에 눈 내리는 창밖을 흘낏 내다보는 눈길에서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졌다. 곱상한 외모로만 보면 큰 걱정 없이 귀하게만 자랐을 것 같은데, 그이는 자신의 젊은 날을 ‘이상은 너무 높았고 현실은 너무 슬픈 절름발이의 청춘’이라 불렀다.
혜연 씨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밝히지 말아 달라고, 자기는 ‘훌륭한 아버지의 빛을 가리는’ 못난 딸이었을 뿐이라고, 그이가 마지막까지 솔직히 드러내기를 꺼리던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 그이 아버지는 의사였고, 이북 출신인 아버지가 전후 이남에 내려와 의사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이의 삶은 어긋났기 때문에. 그건 아버지의 잘못도, 그이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양식 있는 의사였고, 이남에서 어렵사리 자리를 잡는 힘든 과정에서도 딸 넷 아들 하나를 훌륭히 키워 냈다. 다만 전쟁 이후 북과 남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의 현실이 그들 가족을 시련에 빠뜨렸을 뿐이었다.
최대의 시련은 아버지가 이북에서 취득한 의사자격증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병원을 개업하려면 다시 의사자격증을 따야 했다. 아버지는 한 1년 통도사에 들어가 의사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집의 방 하나를 터서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어머니 혼자 장사를 하며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거둘 수는 없었다. 실향민 처지다 보니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이미 중학교에 다니는 큰딸의 학업을 중단시킬 수 없었던 아버지는 고민 끝에 당시 중학교에 막 합격한 둘째 딸 혜연 씨를 불러 앉혔다. ‘혜연아, 딱 일 년만 쉬자. 내년에는 중학교 꼭 보내줄게. 넌 공부를 잘하니까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교복까지 맞춰놓고 들떠 있던 혜연 씨에게 아버지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독서와 사색을 즐기던 재간둥이 딸, 초등학교 시절 전교 부회장까지 했던 ‘잘난이’, ‘까불이’ 둘째 딸은 그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게 일을 하고,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이 자존심 강한 소녀는 행여 친구들의 눈에 띌세라 바깥출입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반감 때문에 명랑 쾌활하던 성격도 비비꼬여 갔다.
아버지의 공부는 3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자격증은 나왔지만 당장 개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한지의사’라 해서, 자격증을 딴 후 10년 동안 무의촌에서 근무를 해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머니마저 떠난 뒤, 공부하는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여전히 혜연 씨의 몫이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슴은 쿵 떨어지고
“동생들 도시락 싸주고 살림 살아 주다가 이십대가 됐어요. 집에 빚도 좀 있고, 동생들은 밑에서 차고 올라오고 이러니까 나는 계속 밀려난 거지예. 나중에 아버지가 개업하고 인제 나를 밀어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엄마 아버지 도움 안 받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내가 오기가 너무 나버린 거지.”
그 ‘오기’의 힘이었을까. 혜연 씨는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혼자 검정고시 공부를 한 끝에 2년 만에 중졸, 고졸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는 간호사가 되어 서독으로 날아가겠다며 간호보조학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간호사나 광부로 취업하여 서독에 가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혜연 씨가 자격을 갖추었을 때는 그 서독 루트마저 끊겨 있었다. 되풀이되는 좌절로 몸과 마음이 멍든 그이는 결국 소개로 만난 남자와 석 달 만에 결혼해 버렸다.
“일단 내 마음이 정상적이지가 않고 틀어져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절름발이만 장애자가 아니라 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짜 장애자였던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세상 물정도 모르고 도망치듯 한 결혼이 오죽했겠어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혼이었어요.”
나이·학력·직업·재산 모든 것을 속이고 결혼한 남편은 바깥으로만 돌았다. 자기 집이라던 집은 달세집이었고, 42kg의 약한 몸으로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건만 ‘아이고, 어려운 집에 와서 고생한다.’ 하며 다독여 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밥때가 돼도 반찬값 쥐어주는 이가 없었다. 지참금으로 가져온 돈을 몇 달 만에 홀랑 마셔버린 남편은 툭하면 사업자금 얻어오라 닦달했고, 시댁 어른들마저 그이를 ‘언젠가는 갈 아이’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반복되는 술, 여자, 구타… 남편 월급으로 먹고 살 거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버려야 했다. 아들 재홍의 첫돌이 지나자 친정에 들어가 살면서 미용 학원에 등록했다. 악착같이 기술을 배웠고, 친정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변두리에 방 하나 달린 미장원을 얻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슴이 쿵 떨어지고 가위 잡은 손이 덜덜 떨렸어요. 경험도 부족하고 기술이 너무 딸려서 도대체 못하겠더라고요. 오는 손님마다 혀를 차고 가는데, 달리 피해 갈 길이 있나요. 욕을 먹더라도 버티는 수밖에. 한번 내려준 손님을 다시 만나기 힘든 택시기사가 그때만큼 부러울 적이 없었어요. 정말 마루타처럼 내 손에 머리를 맡기고 기술의 폭을 넓혀 주신 손님들께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죠.”
그래도 시간은 약이었다.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며 한 장소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단골도 생기고 생활도 조금씩 안정돼 갔다. 조금씩 저축한 돈으로 24평짜리 아파트도 하나 분양받았다. 그 아파트에 입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중도금을 붓고 있을 무렵, 남편에게 다시 새 여자가 생겼다. 혜연 씨는 분양받은 아파트를 깨서 그 여자에게 주고라도 이혼만은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남편이 택한 건 그 여자였다.

아들아, 우린 감동적인 자서전을 쓰고 있는 중이란다
위태위태하게 유지해 오던 결혼 생활이 깨지고, 하나뿐인 아들은 팔뼈가 부러져 입원하고,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가맹점 계약을 했던 미용 프랜차이즈 업체에 사기를 당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 캐피탈에서 빌린 돈으로 새 미용실을 열고 다시 일어서려 발버둥친 지 두 달 만에 오토바이 노상강도를 당해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면,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5천만 원의 빚만 떠안은 채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면, 당신의 입에서는 무슨 말이 터져 나올 것인가.
‘감사합니다.’
땅 속으로 껴져 버리고만 싶은 암담한 절망 속에서 김혜연 씨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의식이 있는 시간 내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문처럼 그 말만을 수없이 되뇌었다.
“안 그러면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으니까요.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말았으면…, 누군가 내 영혼을 데려가 내일의 해를 보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죠.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쿵쾅거리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까요.”
그 ‘주문’의 효력이었을까. 석 달 동안 멈추지 않았던 설사와 울렁증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이의 마음은 여전히 캄캄한 굴속을 헤매었다. 도대체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캐피탈 직원들의 빚독촉은 인정사정이 없었고, 그이의 팍팍한 삶에 반딧불 같은 희망을 켜 주던 아들은 고3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아이한테만은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주아주 힘든 밤엔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곁에 누운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이다음에 너는 아주 큰사람이 될 거거든. 근데 먼 훗날 자서전을 썼을 때 감동적인 이야기가 너무 없으면 읽는 사람이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우린 지금 그 자서전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쓰고 있는 중이란다.”
‘엄마, 지금 아주 힘들어.’라는 말을 김혜연 씨처럼 멋지게 해 낼 수 있는 엄마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기막힌 실패담을 털어놓으면서도 멀쩡했던 혜연 씨의 눈빛이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촉촉이 젖어든다. 과외 한번 시켜 보지 못하고 거의 방치해 두다시피 했다는 ‘어미의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아들 재홍은 수능 시험을 앞두고 실시한 모의고사에서 ‘전국 석차 2% 이내, 전교 석차 2등’이라는 결과로 혜연 씨의 ‘안타까운 모정’에 화답했다. 그러나 시험 문제가 유난히 쉽게 출제돼 상위권 학생들의 혼란이 극을 달했던 2000년, 아들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의대에 낙방하고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죽고 싶다는 것은 뭔가를 하고 싶다는 또 하나의 욕구일’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던 김혜연 씨의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여성 가장들에게 창업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친구의 말을 들은 뒤부터. 거듭된 실패에 심신이 지쳐 있던 그이는 별 기대도 없이 공단의 담당자를 찾아갔다. 결과는 대만족. 기대 이상의 지원에 힘을 얻은 혜연 씨는 99년 부산 남구 대연동에 ‘준 미용실’을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운이 트이려고 그랬는지 손님은 끊이지를 않았고, 4년 만에 5천만 원이 넘는 빚을 모두 청산했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요즘도 준 미용실의 매출은 꾸준한 편. 동네에 미용실이 다섯 개나 있지만, 월 3백 만 원 이상 순수익을 올리는 곳은 그곳 하나뿐이다.
“내 인생이지만 참 특별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극적으로 반전한 케이스도 또 드물 거구요. 이 모든 것이 근로복지공단에서 지원을 해 준 덕분이죠. 사실 빚을 청산했을 뿐 사업은 이제 시작인 셈이지요. 얼마전에 생전 처음 엄마한테 한약하고 패물을 해 드리면서 ‘엄마, 낳아 줘서 고마워.’ 그랬어요. 철모르던 시절에는 엄마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지만 애 낳고 살아 보니까 엄마 아버지가 이해가 되더라구요.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강인한 정신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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