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2004년 근로자연극제에서 국무총리상 수상한 ‘Actor 2002’ 대표 김석진

“연극에서 사람살이의 참맛을 배워요”

지역내일 2005-03-02 (수정 2005-03-18 오전 8:25:38)
아마추어 연극의 모범답안 ‘김장하는 날’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가면 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가도 있다. 연극에 대한 열정과 끼로 뭉친 직장인 극단 ‘Actor 2002’의 연습실 말이다. 신입단원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는 논현동 지하 연습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25평 남짓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단원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이방인에겐 다소 썰렁하게 느껴지는 지하실의 냉기도, 낯선 이의 방문도 아랑곳없이 십여 명의 단원 모두가 연습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떤 놈이야! 도대체 어떤 우라질 놈이 이런 짓을 한 거야!”
“계십니까? 김치국 선생 계십니까? 아무도 안계세요?”
“어, 이것들이 진짜로 왔네! 진짜로….”
“뭐해요? 누가 왔나 본데 문 안 열어 주구….”
“열어 주지 마! 열어 주지 마!”
신입단원들과 그들의 연기지도를 맡은 선배가 서너 명씩 패를 지어 연습을 진행하는데,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대사들과 후배들의 발성과 액션을 지도하는 선배들의 코멘트가 뒤섞여 흡사 경매장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시골 이장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연습실 구석구석을 돌며 후배들의 연습을 지켜보는 김석진 씨(36세)의 눈길에는 연극과 사람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실려 있다. Actor 2002의 대표로서 극단을 이끌어 온 그는 직장에서는 이벤트 업무를 총괄하는 기획팀장이지만 연극으로 만난 단원들 사이에서는 ‘대박 김’이나 ‘김 작가’로 통한다.
실제로 김석진 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단원들과 똘똘 뭉쳐 역량을 쌓은 끝에 2004년, 극단을 창단한 지 햇수로 3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창작극 ‘김장하는 날’이 근로자연극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과 작품상을 거머쥔 것.
“사실 2003년도에도 근로자연극제에 출품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좀 시도를 했던 부분이 뭐냐면 보통 한 극단에 한 작품씩 출품을 하잖아요. 근데 저희는 두 작품을 했어요. ‘불 좀 꺼 주세요’하고 ‘하녀들’이라는 기존 극이죠. 결국은 두 작품 다 미역국을 먹었지만 그걸 준비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것이 참 많았죠. 하여간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2004년도에 창작극을 출품해서 최고상을 타게 된 거죠.”
몇 개월 동안 머리 속에서 궁굴리기만 하다가 ‘맘먹고 쓰기 시작한 지 4일 만에’ 탈고했다는 ‘김장하는 날’에는 전북 정읍이 고향인 김석진 씨의 어린 날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장하는 날, 일손을 거들기 위해 모여든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걸쭉한 입담과 구수한 사투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난한 시골 농가의 가정사를 통해 우리 시대 가족과 이웃의 의미를 묻는 이 작품은 연극제 심사위원들에게 ‘아마추어 연극이 지향해야 할 답안을 보는 듯했다’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실험하고 도전하는 연극의 매력
김석진 씨가 연극을 시작한 것은 1996년. 이벤트 학원에서 만난 후배의 소개로 ‘셰익스피어 1986’이라는 직장인 극단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연극에는 문외한이었던 그가 ‘정통 셰익스피어극’을 지향하는 그 극단에 들어간 것은 연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는 게 좋아서였다. 그런데 몇 차례의 공연에 스텝이나 배우로 참여하면서 차츰 연극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공연을 준비하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진정한 사람의 관계와 인간의 삶에 대해 배우게 돼요. 연극이라는 게 음악회처럼 개인이 나와서 발표하는 게 아니잖아요. 전체적인 조화와 팀워크가 필요한 작업이죠. 직장인들이 없는 시간 쪼개서 공연을 준비하고 무대에서 연기를 해보는 것도 상당히 유익한 경험이지만, 이것도 작은 사회집단이다 보니 연습하면서 서로들 싸우기도 많이 싸우거든요.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되는 게 바로 연극의 매력이 아닐까요.”
연극의 ‘맛’을 알고 연극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면서 갈등도 생겨났다. ‘맥베드’, ‘로미오와 줄리엣’, ‘시저는 죽기를 거부했다’ 등의 공연에 참여하면서 그가 얻은 결론은 ‘셰익스피어극은 내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추어 집단이 만드는 연극이라면 좀 더 새롭고 실험적인 연극에 도전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002년, ‘셰익스피어 1986’을 박차고 나온 김석진 씨가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몇몇 사람들과 만든 직장인 극단이 바로 Actor 2002였다.
이들의 ‘온라인 연습실’이라 할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Actor2002
)의 회원은 350명이지만 실제 연습에 상시적으로 참여하는 인원은 25~30명 선. 구성원의 연령과 직업도 다양해서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신입단원 중에는 10대의 고등학생도 있고, 가정이 있는 40대 직장인도 있으며,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연수원에 다니는 이도 있다. 그러나 결혼해서 가정을 가졌거나 40대에 진입한 단원들의 충성도는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Actor 2002를 이끌어가는 주축은 사실상 20~30대 직장인들이라고 봐야 한다.
바쁜 직장인들이 연극을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기 연습일은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매년 무대에 올리는 정기 공연과 워크숍 공연, 근로자연극제 시기가 다가오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 다니랴 연극하랴 정신없이 돌아치는 세월이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이 ‘연극 폐인’들은 연습이 없는 날이면 인터넷 카페에 모여 회포를 풀어야 직성이 풀린다니 담배보다 더 끊기 힘든 게 연극의 매력인가. ‘직장 일과 병행하는 게 힘들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뜻밖에도 김석진 씨는 ‘병행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제가 직장에서 공연이나 콘서트, 지역축제 쪽 일을 많이 하는데요. 연극하고 이벤트가 무대 음향이나 조명 등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공부가 많이 돼요. 예를 들어서 이천 도자기축제를 기획한다고 하면 그 축제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단막극 형식으로 만들어서 극을 공연하기도 하거든요. 바로 그런 부분들이 상통이 되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를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김석진 씨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공부’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공부에 포한이 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본래 그가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는 이벤트 쪽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 입시를 칠 무렵에는 아예 이벤트학과라는 게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방송연예 쪽 학과로 방향을 튼 그는 연거푸 세 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에라!’ 하는 심정으로 해병대에 자원했다가 제대 후 1년 동안 서울의 한 이벤트 학원을 다녔다. 결국은 그 학원이 복덩이였다. 원대로 이벤트 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도, 연극을 알게 된 것도 다 학원에서 맺은 인연 덕분이니 말이다. 그러나 취직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막상 이 업계에 들어와 보니까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았어요. 이벤트라는 분야가 굉장히 광범위해서 다양한 방면의 지식이 필요했고, 아이템도 계속 개발해야 했지요. 결국 98년도에 방통대 방송정보학과에 입학했는데 이쪽 일의 특성 때문에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대요. 지역 문화관광축제 쪽 일을 하다 보면 지방 출장이 잦은데 한번 가면 보름씩, 한 달씩 있다 오거든요. 툭하면 시험도 못 치르고, 작년 2월에야 겨우 졸업했어요.”
10년 세월을 이벤트 일에 쏟아 부은 그의 연봉은 3500만 원. 메이저급 회사와 비교하면 많다고 할 수 없는 액수지만 어차피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다.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집안 대소사를 위해 붓고 있는 ‘6남매’ 곗돈과 부모님 용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그밖에 기본적인 생활비와 차량 유지비, 연극 활동에 소요되는 비용을 제하고 남는 돈은 ‘언제 할지 모르는’ 결혼을 위해 저축하고 있다.
이벤트 분야에 십년 세월을 쏟아 부은 그는 한때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공연, 콘서트, 지역축제, 스포츠이벤트를 전문으로 하는 (주)아트카오스의 기획팀장이다.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행사의 프로그램 기획부터 실제 행사 진행까지 총괄적으로 대행하는 일이 그의 일이다. 겨울에는 다소 일이 뜸한 편이지만 행사가 많은 봄가을에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 4, 5월에 진행할 서울약령시축제와 명동축제의 기획서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그는 이벤트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환상은 금물’이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우선 일이 상당히 힘들어요. 현장에 나가면 조명 같은 거 다 들고 다녀야 하고, 지방출장이나 밤샘도 잦아요. 또 프로젝트 하나 만들려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짜내고 기획서를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지하게 힘든 직업이죠. 이벤트 업종에 대한 인식도 낮아서 어디 가서 이벤트 한다고 하면 거리에서 풍선이나 불어주고 도우미 아가씨 춤추는 걸 연상하잖아요. 시장을 모르기 때문이죠. 사실 이벤트 분야는 엄청 방대하거든요. 예를 들어 올림픽이나 월드컵, 국제회의나 포럼, 전국체전 같은 것도 이벤트가 되는 거거든요.”
물론 비전은 있다. 김석진 씨가 이 업계에 입문할 때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벤트 관련 학과가 전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속속 개설되고 있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지방자치제도가 안착되면서 각 지자체에서 지역 특색에 맞는 관광 상품을 앞 다투어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실내용은 매우 조악한 수준이다. 현재 전국에 1천 개가 넘는 지역 축제가 있지만, 너무나 산발적이고 소모적인 운영에 프로그램도 천편일률적이다. 장기적으로 김석진 씨가 지역 특색을 제대로 살린 축제 개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쌈바 축제’ 하면 ‘브라질’ 이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그런 세계적인 축제가 없어요.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축제는 많지만 프로그램을 보면 다 그게 그거 같잖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축제 문화를 새롭게 바꿔 보고 싶은 생각이 있죠. 굳이 거창하게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의 이름은 ‘대박 김’. ‘대한민국 간판급 축제 개발’이라는 대박을 터트릴 날이 언제가 됐든 그 야심과 젊음, 배짱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인터뷰 중에 그가 힘주어 강조하던 ‘쟁이 정신’과, ‘한 프로젝트를 원만히 진행하고 난 뒤의 만족감, 성취감’은 묘하게도 연극쟁이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연극과 이벤트, 보통사람이라면 어느 하나도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울 이 두 마리 토끼를 김석진 씨가 결코 놓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쟁이의 기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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