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 장벽 허무니 대한민국은 ‘여성시대’

초등학교에서 국가고시까지 여풍지대를 가다

지역내일 2005-01-10
수서에 사는 백정희씨는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다. 같은 부모 밑에서 나온 딸(고 2)과 아들(중 2)이 달라도 참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던 딸 지유가 중학교 다닐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달라졌다. 이번 학기에도 아들은 여학생을 또 ‘극복하지’(?) 못했던 거다.
“딸은 목표를 세우면 정말 무섭게 집중하거든요. 예를 들어 수행평가 점수도 점수지만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요. 자기가 가진 능력을 100% 발휘하는데, 아들은 ‘점수 좀 깎이지 뭐’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 여학생을 이길 턱이 있나요.(웃음)”
지유가 중학교 다닐 때 전교 10등 안에 들락날락 하던 남학생 2명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남고에 가더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더란다. 남녀공학에서 남학생이 1등을 하면 ‘인간승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나. 그래서 백씨는 얼마 전 반 엄마모임에서 아들 둔 엄마들끼리 “남녀공학에서는 경쟁이 안 되니 고등학교는 꼭 남고로 보내자”고 약속했다.
학교에서만 이런 현상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풍이 감지되고 그 바람이 거센 만큼 세상이 변하는 소리가 들린다. 암탉이 울어야 하는 시대, 남성보다 뛰어난 날갯짓으로 새 하늘을 여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살펴봤다.

지난 2004년 한해 치러진 주요 국가고시 수석은 모두 여성이 차지했다. 사법·외무·행정·기술고시뿐 아니라 변리사·공인회계사·세무사·감정평가사 등 주요 국가자격시험 8개를 모두 휩쓴 것이다.
여성 합격자 비율도 매우 높아졌다. 외시의 경우 수석은 물론이고 최고령·최연소 합격까지 여성들이 차지하면서 전체 합격자 20명 중 35%(7명)를 기록했다. 전통적으로 남성 영역었던 기술고시에서도 2003년 11.5%보다 무려 9%가 높아진 20%를, 행시는 40%에 육박하는 합격률을 보였다. 공인회계사 여성 합격자 비율도 2002년 17.2%, 2003년 21.6%에 이어 2004년 24.1%로 나타났다.
특히 이번 사법시험에서 여성 합격률은 24.4%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1993년 6.3%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가히 격세지감이다.
사법연수원 성적도 여성들이 월등하다. 지난해 초 수료한 33기 사법연수원생 가운데 여성은 17.4%. 그런데 판·검사 임용에서 여성 비율은 44.6%나 됐다. 여성 연수원생 30명이 검사를 신청했는데 전원 다 임용됐을 정도. 성적순으로 결정되는 판·검사 임용 비율은 여성들이 연수원 성적 상위권에 포진해 있음을 반증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법무부의 한 여성 검사는 자신이 88학번으로 90년대 중반에 임관한 여덟 번째 여성 검사인데 벌써 1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10년 새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실제로 20대 검사를 놓고 보면 59명 중 여성이 52.5%(31명)로 남성을 앞질렀다.

성차별 없는 곳에서
‘실력으로 한판 붙어봐’

여성들이 이렇게 두각을 나타나게 된 이유는 뭘까.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 여성들이 공부를 잘하게 된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먼저 국가고시는 성차별적 환경이 개입할 수 없어 여성들이 약진한다는 분석이다. 수석 합격자들은 공통적으로 “일반 기업체보다는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 고시를 택했다”고 말한다.
변리사 자격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김미정씨(26)는 “일반 기업에 입사해 결혼·출산·육아를 병행하면서 직장 다닐 여건이 못 되는 것 같아 커리어도 쌓을 겸 고시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아 활로를 개척하기가 녹녹치 않음을 반증하는 얘기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정구향 박사는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많아졌지만 국가고시만큼 공정하게 평가되는 전문직 시험은 없다. 그러니 우수한 여성 인력이 많이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아직도 여성이 1등 하는 것이 화젯거리가 되느냐”고 반문하는 함인희 교수(이화여대 사회학)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시험이 과거에는 소수만 뽑고 기회도 일부에게만 폐쇄적으로 제공됐다면 이제는 다수를 선발하고 그 기회도 훨씬 개방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한다.
여기에 ‘시험’이 요구하는 집중도와 치밀함 등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점이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여학생들의 약진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당연한 결과”라는 김상용 교수(부산대 법대)는 “법대 시험은 사례형 문제기 때문에 책을 외운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여학생들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상당부분 존재해 그 지표면은 굳어 있지만 좀 덜 굳은 부분을 여성들이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차별을 제거하는 법과 제도가 좀 더 개선된다면 아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여성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짐작컨대 10년 안에 각종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가 반을 넘어가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결정적 특질. 남성보다 꼼꼼하고 성실한, 여성의 강력한 ‘무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강세였던 기술고시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은 박정민씨(30)의 말이다.
“고시는 그야말로 누가 ‘은근과 끈기’를 갖고 ‘진득하게’ 공부하느냐에 성패가 갈린다. 남자들은 음주가무 등 유혹이 많아 서너 시간 공부하고 샛길로 빠지는 일이 많다. 반면에 여자들은 새벽별 보고 도서관에 앉아 새벽달 볼 때까지 공부한다. 게다가 꼼꼼하니까 실수도 덜 한다.”
박씨는 “고시에 도전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수적으로 적어서 그렇지 지금보다 여성들이 더 많이 응시한다면 여성 합격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학습 성취도 높은 여학생
초등학교부터 상위권

국가고시 수석을 할 정도니 좀 특별한 여성이지 않겠나, 너무 일반화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잠깐 마포의 한 초등학교 교실로 자리를 옮겨 보겠다. 송정희 교사는 5학년 반 편성 자료로 쓰기 위해 성적을 집계하다가 깜짝 놀랐다. 정원 35명 중 5등까지 남학생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
“국어와 수학을 놓고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국어는 발표력이나 독서능력에서 남학생이 여학생을 따라가지 못한다. 예전에는 여학생들이 수학을 못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과학도 남학생들이 실습하는 건 좋아하지만 결과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걸 보면 여학생들이 훨씬 더 잘한다.”
이 같은 현상은 중학교로 그대로 이어진다. N중학교 현영림 교사는 “여학생이 언어·사회·음악·미술에서 4~5점, 수학에서 1점 더 높게 나타날 정도로 전 과목에서 여학생 성적이 더 우수하다”고 전언. 이 학교의 경우 전교 5등까지 남학생은 1명이었고 전부 여학생이라고 한다. 학년 전체로 보면 전교 20등 안에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두 교사의 ‘심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물증’이 있으니 초·중·고교에서의 여·남학생 학습 성취도와 수학능력시험 결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우리나라 학생의 2002년 학력수준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초·중·고교 전 교과에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학습 성취도가 높았다.
초·중학교는 국어·사회·영어에서 남녀간 차이가 비교적 크고 수학 과학에서는 차이가 적었으며, 고등학교는 수학을 제외한 전 교과에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높았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의 학습 성취도를 비교하면 모든 영역에서 여학생이 뛰어났다. 읽기, 쓰기 영역에서는 그 차이가 더 컸다.
그렇다면 전국 단위의 성적 평가 비교를 할 수 있는 대입 수능 성적은 어떨까. 2003년, 200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역별 남녀 평균을 비교해 보면, 언어·수리·사회탐구·과학탐구·외국어영역에서 자연계열 여학생들이 강세를 보였다(표 참조). 물론 전체적인 수능 석차 상위권에는 남학생들의 비율이 더 높지만 상위권에 드는 여학생들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남녀공학 남학생 ‘남고’가 부러워

송 교사는 여학생들의 약진 원인을 과거 평가방식과는 달라진 교육환경에서 찾는다. 사지선다형 시험으로만 평가하던 방식에서 종합적인 사고능력을 키우고 지식 이외의 영역을 요구하는 수행평가를 말함인데, 송 교사는 “7차 교육과정은 폭넓은 능력을 평가하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더 두각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녀공학인 J고등학교의 K교사도 “내신 성적은 수능처럼 광범위하거나 종합적이기 보다는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중심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성실성이 요구된다. 거기에다 수행평가, 실기평가까지 보태지면 남학생들은 아마도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S고등학교 G교사는 “학교시험 성적은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더 높다. 한 반에서 상위 10을 놓고 보면 남자 여자 절반씩이어야 하는데, 7:3으로 여학생이 더 많다”고 한다.
이렇게 남녀공학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한테 치이다’ 보니 남자 고등학교 보내기 붐도 일고 있다.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들 중에는 일부러 남자고등학교로 배정받을 수 있도록 이사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목동에 사는 S씨는 “예전 같으면 아들 둔 엄마들이 S중학교 거쳐 특목고 보내겠다고 이사했다면 이제는 5,6단지 근처로 이사한다. 그 이유는 아들을 남고인 Y고등학교에 보내려는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한다.
서울의 한 중학교 엄마들의 모임에서 나온 에피소드. 남학생 엄마들이 “왜 우리 아들들이 지지부진하게 됐느냐” “고등학교 가면 잘 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등 여학생들에 ‘치이는’ 하소연과 푸념이 이어지자 한 엄마가 이렇게 말했단다. “앞으로는 똑똑한 며느리를 보면 되지. 아들은 부드럽고 자상한 성격으로 잘 키우고 말야.”
‘이제까지 남자들은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
현영림 교사는 80년대 중·고교 시절을 보냈던 요즘 30~40대와 자식 세대인 요즘 10대 여학생들 분위기는 굉장히 다르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여자를 금기하는 직업군이 분명 있어 웬만큼 의지가 굳지 않고서는 개척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훌륭한 역할 모델들이 속속 나오고 있지 않은가. 전투기 조종사, 사법시험 수석 합격, 보고 자라는 것이 ‘여자니까 못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병곤 성공회대 대우교수는 학교 밖의 이러한 문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남자든 여자든 차별하지 않는 학교 밖의 양성평등문화가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해서 학교 안에서도 그대로 투영되니까 여학생들이 뛰어난 능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최근호는 ‘약삭빠른 여학생, 멍청한 남학생’이라는 제하의 커버스토리에 이런 기사를 실었다. 독일에서는 2년 전부터 여학생 대학진학률이 더 높게 나오고 있다는 것. 유급당한 학생은 대부분 남학생이며 여학생은 숫자 면에서 남학생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그렇다는 것.
기사는 여학생들의 우수한 성적이 뛰어난 적응력 때문인 반면 남학생들은 저항적이고 적응력도 떨어져 자연히 성적이 나쁘다고 진단했다. 덧붙여 현대 사회가 점점 더 여성적인 요소를 요구하는데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남학생들은 급격하게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맺고 있다.
취재를 하며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머지않았다 싶었다. 취재 중 만난 한 교수님의 말이 이를 정리해준다.
“활화산 터지듯 여성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성들 영역이야 좁아지겠지만. 솔직히 나도 남자지만, 이제까지 남성들은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나.”

/신민경 기자 mkshin@naeil.com
사진 이의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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