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⑩ 타워 크레인 기사 박영미 씨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는 게 행복이지, 부자 되고 싶은 맘은 없어요”

지역내일 2005-01-19
“무슨 일 하세요?” 무심코 물었던 사람들은 박영미씨의 대답을 듣고 어김없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공중을 향해 수직으로 솟은 타워 크레인, 그 꼭대기에 여자가 앉아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영미씨가 타워 크레인을 배운 것은 1996년, 스물다섯 살 때였다. 여고를 졸업하고 몇 군데 직장을 옮겨다니다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었다. 출근길에 공사현장을 지나다 허공중에 홀로 떠있는 크레인 조종석에 눈이 갔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혼자 조용히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원래도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을 차례로 잃고 남동생 둘과 어렵게 살면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지던 때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당시 한양건설이 운영하던 직업훈련원의 크레인 기사 과정에 들어갔다. 한양직업훈련원의 크레인 기사 과정은 1기당 4개월씩, 1년에 세 차례 진행되었다. 기당 훈련생이 100명, 그 중에 여성은 두세 명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97년 초에 처음 크레인에 올랐다. “대학 교육시설 짓는 현장이었어요. 처음 일주일간은 신나고 재밌었어요. 하고 싶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됐으니까. 근데 그 뒤로 한 달간 내내 울고 다녔어요. 너무 힘들어서. 당장 그만두겠다고 소장한테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소장이 자리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한 달 버티고, 또 1년 버티고…. 그러다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 영미씨는 서른네살, 9년차 고참 기사이다. “어이, 기사님! 치마 입고 올라가지? 그래야 우리도 일할 맛이 나잖아.” 크레인을 오를 때 밑에서 현장 아저씨들이 간혹 그렇게 흰소리를 해도 “아저씨가 꽃 팬티 입고 일하면 나도 치마 입을게요.”하고 능청스레 받아넘길 만큼 관록이 붙었다.

가장 무서운 건 안전사고
요즘 영미씨가 일하고 있는 곳은 용인 운전면허시험장 맞은편의 아파트 건설 현장이다. 건설 경기가 나빠서 8개월이나 놀다 작년 2월에 겨우 잡은 일자리다.
“크레인 기사는 현장별로 계약을 해요. 다섯 달 짜리 공사면 다섯 달, 1년 짜리 공사면 1년, 그렇게 계약을 하고 월급제로 일하죠. 옛날엔 대형 건설회사들이 중기부를 따로 두고 기사를 정규직으로 채용했지만 지금은 거의 다 크레인임대업체에 하청을 줘요. 그러니까 저희는 크레인임대업체와 계약을 하고, 원청 현장을 따라 다니는 거죠.”
영미씨가 말하는 ‘옛날’은 IMF 이전을 뜻한다. 그때는 지방에 가서 일할 때면 회사가 숙소도 잡아주고 숙박비도 보조했다. 또 중간에 쉬는 달이 있어도 50%의 임금이 나왔다. 지금은 지방 공사 때도 숙식을 기사가 알아서 다 해결해야 한다. IMF 때 근로조건이 여러모로 악화되었는데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
크레인 기사는 해가 뜨면 작업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작업을 끝낸다. 현장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영미씨는 7시쯤 집을 나선다. 7시 40분쯤 주위가 환해지자 영미씨는 마스트 안쪽의 사다리를 타고 조종석으로 올라간다. 크레인의 높이는 보통 60~70 미터, 높을 땐 100미터를 넘기도 한다. 수직의 사다리를 타고 조종석까지 가는 일이 무섭진 않을까?
“보통 사람들한텐 무섭죠.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워요. 어느 정도 높이를 넘어서면 감각이 없어져서 무섭지 않은데, 10미터쯤이 제일 무섭게 느껴지는 높이에요. 저는 무섭진 않은데 힘들어요. 두 손에 의지해 60, 70미터를 오르내리는 그 자체가 굉장히 힘들어요.”
영미씨가 무서움을 느낄 때는 따로 있다. 보통 한번에 1~2톤씩 작업을 하는데, 자재 무게 때문에 조종석이 앞으로 쑤욱 기울어질 때가 있다. 또 자재를 내려놓을 때 반동으로 조종석이 뒤로 쏠리기도 한다. 60미터 상공에서 바닥을 향해 몸이 기울어질 때, 정말 무섭다.
그러나 제일 무서운 건 역시 사고다. 영미씨 동기생 중 두 명이 일 시작한 지 1년만에 사고로 죽었다. 내가 죽는 사고도 있지만 남을 죽이는 사고도 있다. 우리 나라 건설 현장의 ‘안전 불감증’은 크레인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선진국에선 크레인 작업을 할 때 반드시 지상에 신호수를 두게 되어 있다. 작업 반경 안에 사람이 오가더라도 조종석에선 식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선 현장 인부들이 알아서 한다. 크레인의 안전관리에 관한 제도나 법규가 아예 없기 때문에 산업안전관리공단이 비계 관련 조항에 근거해 안전관리를 하고, 그마저도 눈 가리고 아옹이다.
특히 한 대의 크레인으로 주변의 몇 개 동을 작업하기 위해 고안된 설치 방식인 ‘와이어 브레이싱’(건물과 건물 중간에 크레인을 세우고 와이어로 크레인을 묶어 균형을 잡게 하는 방식)은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 나라에서만 쓴다고 한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부산·경남을 덮쳤을 때 하룻밤새 무려 63대의 타워 크레인이 쓰러졌다. 모두 ‘와이어 브레이싱’ 크레인이었다.
조종석의 넓이는 0.3평, 제대로 기지개 한번 켜기가 힘들다. 수백 가지나 되는 크레인 기종 가운데 힘을 많이 써야 하는 기종에 걸리면 1시간 가까이 레버를 붙잡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허리와 목, 무릎 디스크가 크레인 기사들의 직업병이다. 여자기사들은 변비나 방광염에도 잘 걸린다. 소변보러 내려오는 걸 피하기 위해 물을 최대한 안 마시고, 오줌이 마려워도 참기 때문이다. 급할 때 쓰는 응급책을 나름대로 고안해내지만, 급한 나머지 조종석에서 일을 보고 그걸 아래로 던졌다가 해고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가끔씩 일어난다.
일단 한번 올라가면 점심 때 말고는 내려오는 일이 거의 없다. 몹시 힘든 날엔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일이 까마득해 점심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 점심때만큼은 꼭 내려와서 몸을 푼다.
일을 마치고 일어서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루 종일 조종석에 앉아 상체만 쓰니까 하체가 힘을 못쓰는 것이다. 그래서 크레인 기사들은 대부분 오래 걷질 못하고, 걷는 걸 싫어한다.

좋은 사람들 만난 것이 가장 큰 보람
“월급은 얼마나 돼요?”
영미씨가 크레인 기사라는 걸 알고 놀랐던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묻는다. 그리곤 또 놀란다. “어머, 그거 괜찮은 직업이네요!” 영미씨의 월급은 232만 5000원이다. 크레인기사노조가 단체협상에서 체결한 가이드라인이 바로 그 액수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받냐?”며 놀라는 사람들을 보면 말수 적은 영미씨도 참을 수가 없어진다. “저희는 상여금도 없고, 퇴직금도 없어요. 게다가 한 현장의 일이 끝났다고 바로 새로운 현장과 계약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자리 못 잡으면 몇 달이고 놀아야 해요. 지방에서 작업할 땐 숙박비도 나가죠. 4대 보험도 되는 회사 있고, 안 되는 회사 있고.”
특이하게도 크레인 기사는 남자든 여자든 초보든 고참이든 임금에 차등이 없다.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 것은 좋게 보이지만, 경력이나 숙련도를 인정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된다. 그 때문인지 현재 전국적으로 3,000명 가량 되는 크레인 기사들 중 30대 중반이 가장 많다. 평생 직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미씨 월급이 200만원을 넘어선 것도, 업주와 ‘표준근로계약서’라는 걸 작성하게 된 것도, 일요일날 쉬고 연월차 휴가를 낼 수 있게 된 것도, 여름이면 40도를 넘어가는 찜통 같은 조종석에 에어컨이 설치된 것도 다 타워크레인노조가 생긴 뒤 최근 1,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크레인일 하면서 가장 보람차고 기쁜 일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이다. 영미씨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사람”이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영미씨의 남편 김성점씨도 물론 “좋은 사람”인데, 노동조합 모임에서 만났다. 어디가 좋았냐고 물었더니 영미씨와 남편의 대답이 똑같다. “착하잖아요!” 일찍 부모를 잃고 살아온 영미씨에게 씩씩하고 속 깊은 남편은 큰 의지가 된다.
재작년 봄 결혼할 당시 두 사람은 빈털털이였다. 영미씨는 그간 모아두었던 돈을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 당해서, 남편은 몇 년 전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거덜난 뒤로 아직 그 빚을 다 갚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자취방이 그대로 신혼집이 되었다. 지금도 두 사람 월급 가운데 한 사람 것은 빚 갚는데 다 들어간다.
“만원짜리 한 장이 없어 쩔쩔 맬 때도 있다”지만, 영미씨가 사는 집을 들여다보면 왠지 마음이 놓인다. 방 두 개 짜리 반지하 신혼집은 새 집은 아니어도 깔끔하고 단정하다. 자그마한 출입문 앞쪽에 솜씨 좋게 나무를 잇대어 방충망을 튼튼하게 둘러쳐 놓았고, 출입문과 앞집 담벼락 사이에 있는 한뼘 마당에는 친구들이 놀러오면 삼겹살을 구워먹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야외용 그릴(?)이 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 문구가 맞기는 맞는 말이다. ‘사는 곳의 가격’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영미씨가 사는 곳은 그이가 건강하고 씩씩하고 낙천적인 사람임을 말해준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요? 일단 빚을 얼른 갚아야죠. 내년이면 다 끌 수 있어요. 그리고 사실은 지금 임신 3개월이예요. 원래는 임신 8개월 때까지 버틸 계획이었지만, 지금 현장이 이번 달이면 끝나는 데다 다음 현장도 잡혀 있지 않아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아이 건강하게 낳은 담에는 다시 열심히 일해서 내 집도 마련해야죠. 저는 부자 되고 싶은 맘은 없어요. 빚 없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 수만 있으면 행복하죠.”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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