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⑨ 안산재활훈련원 생활지도교사 박준현씨

“늦은 밤, 누군가 창가에 놓고 간 비타민 한 병에서 보람을 찾죠.”

지역내일 2005-01-12 (수정 2005-01-12 오후 1:11:22)
안산재활훈련원 생활지도교사 박준현 씨(34세)는 바쁘다.
일하랴, 공부하랴, 훈련생들과 쑥덕공론해서 봉사활동 다니랴,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바쳐도 모자랄 판이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프로그램 만들 궁리부터 한다. 정식 근무시간은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은’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출퇴근 시간을 무시하고 산 지 오래다. 때로는 잠 한 숨 못 자고 뛰어다니는 날도 있다. 대체 그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일까.
“성격인 거 같애요. 봉사활동이든 뭐든 전적으로 나를 던지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못 갖거든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해야 되는 것이 있으면 저는 늘 해야 되는 것을 선택하는 쪽입니다. 아니다 싶은 건 가능하면, 바꿔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요.”
박준현 씨는 안산재활훈련원에서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발마사지, 요가, 일본어, 영어회화, 컴퓨터 기초 및 워드 자격증반, 영화 감상 등의 다양한 야간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이끌어 온 인물이다. 직업 훈련을 위한 정규 프로그램은 물론 주간에 이루어지지만 컴퓨터 게임이나 음주 등으로 무료하게 흘려보내기 쉬운 야간의 내실을 채우는 것도 훈련생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팔을 걷어붙인 것.
산재의 아픔을 딛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훈련생들의 모임 다울자원봉사단도 그가 주도해서 만들었다. ‘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조금씩 주위에 알려지면서 다울팀은 지난 해 말 안산시장상, 경기도 도지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될 거라는 예상은 못했어요. 그냥 이들 스스로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한 거죠. 훈련생들은 ‘나는 왜 이럴까’, ‘나만 왜 이렇게 불행할까’ 하면서 자기를 부정하려는 성향이 강한데, 장애라는 현실을 수용하고 뭔가 새롭게 해보려는 의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역사회에는 여러분보다 더 어려운 분들도 많이 있다. 한번 보자’라는 취지로 중증 장애인시설에 가서 목욕도 시키고 말벗도 하고 빨래도 해 주는 봉사를 시작했죠.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어요. 이분들이 다 해 낸 거죠.”
그는 자기 이름이 두드러지는 걸 두려워하는 듯 한껏 몸을 낮춘다. 안산재활훈련원 관리부장 고종석 씨는 박준현 씨가 ‘기획력이 뛰어나고, 사회에서 상처받은 훈련생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일관되고 설득력 있게 이끈다’며 칭찬이 대단하다.
무엇보다 그는 굉장히 부지런하다. 안산재활훈련원에 입사한 2003년 12월부터 지금까지 그가 해온 일을 보면 일중독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야간 프로그램이나 봉사단 조직 외에도 ‘알콜릭 치료 모임’, ‘집단상담’, ‘소셜 드라마(심리사회극)’, ‘어울림마당’ 등 굵직굵직한 기획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은 각 대학의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해서 해결해 나간다. 그런데도 그는 원광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익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에 비하면 지금은 몸을 많이 사리는 편이란다.
주말도 반납하고 밤 11시까지 일한 결과, 입사 1년 만에 팀장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야, 니가 자꾸 프로그램을 만드니까 내 일이 많아지잖니’ 하는 원망을 들을 때마다 그의 고민은 깊어졌다.
“사업도 중요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실천가 역할도 중요하지만 원만하게 합의를 도출하고 결과를 이끌어내는 조정자 역할도 중요했던 거죠.”
99년, 그는 보따리를 싸들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더 공부하고 싶다는 오랜 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일찌감치 점찍어둔 곳은 중앙대 대학원. 사회복지 쪽에서는 알아주는 그 학교에 가기 위해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2000년 가을, 고대하던 대학원에 합격하기까지 전세방은 월세방이 되고 모아 둔 돈도 바닥이 났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하면서 공부하는 데는 이골이 났어요. 어머니 따라 건설현장에 다니며 못 빼고 노가다하면서 돈을 벌었거든요. 집이 가난하진 않았는데 아버님이 인문고, 대학 진학을 굉장히 반대하셨어요. 팔남매 중에 제가 유일하게 대학생입니다. 다 제 고집으로 간 거죠. 독립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항상 저를 압박했어요. 대학 때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지요.”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 박준현 씨가 온 몸으로 뿜어내는 ‘악착같음’도 어쩌면 주어진 삶의 조건에 패배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생존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조교 생활, 노숙자 야간 상담을 거치며 어렵사리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산재의료 분야에 대한 관심에 이끌려 당시 비정규직이었던 안산재활훈련원 생활지도교사가 되었다.
훈련원 생활지도교사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훈련생들의 야간 생활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생활지도교사 업무는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여 대상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일반적인 지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산재 노동자들이 요양을 마치고 이곳에 들어오면 1년 동안 생활관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들의 집단생활이 별 잡음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제 일이지만, 저는 단순한 통제자의 입장에서 나아가 이들이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돼서 적극적으로 주간의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그러려면 충분한 인간적 신뢰가 형성돼야 하는데 통제자 입장에서는 쉽지가 않았어요. 훈련원에서 술 마신다고 벌점을 주면 그동안 쌓은 인간적 신뢰가 와르르 무너지죠.”
술에 취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훈련생의 넋두리에 질려, 길에서 술 취한 사람만 봐도 무의식중에 얼굴을 돌리기도 했다.
상담을 거부하며 돌아서는 훈련생들이 야속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불신도 진심으로 쌓아올린 인간적인 정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훈련생들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커피 한 잔을 나누노라면 ‘선생님, 서운해요. 왜 나한테 벌점 줬어요’라는 투정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제 와이프하고 얘기했는데 잘 풀렸어요’라는 말로 바뀔 때도 있다는 것을 이제 박준현 씨는 안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친 날이면, ‘선생님은 팔이 잘려 나가 간호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뼈를 깎아 내는 고통을 아세요?’ 하고 묻던 어느 훈련생의 눈물 가득한 눈망울을 떠올린다. ‘몇 년이 지나는데도 사람들이 제 잘려나간 팔만 보는 것 같아 싫고 손만 보고 우는 엄마가 싫다’던 그의 아픔이 몸보다는 마음의 상처에서 온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이 오늘도 그를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늦은 밤, 누군가 창가에 놓고 간 비타민 한 병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그는 내일도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 땀나게 뛰어다닐 것이다. 허구한 날 뭐가 그리 바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작업하러 갑니다!’ 하고 응수하며.

“혼자 사는 남자의 방이
지저분할 거라는 편견은 버리세요.”

현관문 앞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던 박준현 씨가 문득 돌아보며 경고하듯 말한다. 그 표정이 지나치게 엄숙해서 거의 농담처럼 들렸다. 그런데 아이보리색 천으로 리폼한 천소파와 홈시어터 장비가 마주보고 있는 거실이 시야에 툭 터지는 순간, ‘야’ 하는 탄성이 절로 새나왔다. 아직 페인트 냄새가 가시지 않은 집안에는 이렇다 할 가구 한 점 보이지 않건만, 거실창에 드리운 화사한 커튼이며, 구석구석 깔끔하게 정리된 물건들이 마치 신혼집에 온 느낌을 준다. 집안 어딘가에 우렁각시라도 숨겨 놓은 것일까.
“제가 방 꾸미는 것 참 좋아하거든요. 저 커튼은 첫 월급 타서 제가 산 거예요. 대충 성격이 나오죠? 결혼하면 신부가 좀 피곤해하지 않을까요? 집은 저만의 안식처니까 가능하면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애쓰죠.”
책장에 가득한 책들은 그의 손때가 묻은 보물 1호. 박준현 씨에게 책은 일기장에 가깝다. 그는 책을 사면 맨 앞장에 그날의 상황이나 심경을 메모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책이든지 첫 장을 펼치면 그 책을 사던 날의 느낌을 생생히 되새김질할 수 있다. 다양한 책들 가운데 비봉출판사의 『자본론』이나 『영국노동당사』 같은 책들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쪽이 진보적 색채가 좀 강합니다. 자본론도 스터디에서 본 거예요. 사회정책 쪽을 공부하면 노동시장, 계급 쪽 책을 많이 보게 돼요. 저희 세미나 팀에 민주노동당이나 NGO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어요. 정말 모든 걸 다 바쳐서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죠. 저는 아직까지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요. 다만, 훗날 지역사회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뭘까 하는 고민은 하지요.”
담배나 술을 즐기지 않는 그는 야간 근무의 피로를 영화로 푼다. 스트레스가 격심한 날은 근무가 끝나자마자 극장으로 직행한다. ‘광적’으로 영화를 좋아하지만, 복잡한 영화는 별로다. 머리 쓰는 건 일과 공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프 온리’나 ‘노트북’처럼 그냥 보는 것만으로 휴식이 되는 멜로영화가 좋다.
그는 작년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한 달 전 이 사택으로 이사 왔다. 일과 결혼을 생각해서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동안 월급에서 등록금, 월세 내고 활동하는 데 쓰고 나면 저축할 여유가 별로 없었어요. 이젠 저축도 늘리고 조금씩 결혼 준비를 하려고 해요. 얼마 전에 정규직으로 전환돼서 연봉도 올랐어요. 야간 수당까지 해서 2600~2700 정도 되는데 연봉 1300~1400 받던 익산 시절 생각하면 거의 ‘횡재’한 거죠.”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각별해졌다는 그는 집에 자주 내려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고향집 칠순 노모 옆에 붙들어두려고 한다. “어머니는 칠순이 넘으셨는데 지금도 아파트 청소 하세요. 평생을 그렇게 일하셨죠. 그런 게 참 마음이 아파요. 직장 들어오면서 그동안 가슴에 맺혔던 것들을 최우선으로 풀려고 애를 썼습니다. 고향집 모든 공과금을 제 앞으로 돌려놓고, 용돈도 드리고, 가능하면 하루 한 번씩 전화하고 2개월에 한 번은 꼭 내려가려고 하죠.”
‘어머니께서 기뻐하시겠네요.’ 했더니 픽 웃으며 도리질을 한다. “어머니 기뻐하는 건 결혼하는 거예요. 장가가고 애 낳고 이게 당신이 원하는 삶 아니겠습니까. 그동안은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진짜 효도는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는데 아버님 돌아가신 후 진지하게 결혼을 고민하게 됐어요. 저도 이제 삼십대 초반이라 우기기엔 좀 민망한 나이잖아요. 그래서 일단 연애와 돈 모으기를 올해 최대목표로 잡았습니다. 이 얘기 부각 좀 시켜 주세요!”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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