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10월에 동탄 신도시에 38평 아파트를 분양받았어요. 중도금 때문에 퇴직금 중간정산을 신청해야 해서.”
잔업이 끝나는 8시에 광명시 소하리 공장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신운식씨는 조금 늦게 나왔다. 집이 있는 안양시 박달동으로 차를 몰면서 늦은 이유를 말해주길래, 올해 35살인 그의 나이를 감안해 “우와, 내 집 마련하셨나 보네요.” 지레짐작 축하인사를 건넸다가 뒷통수를 한 대 세게 맞았다. 30살이 되던 해인 99년에 지금 살고 있는 32평 아파트를 샀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서른에 집 장만하면 성공한 거라고.”
신운식씨는 대학입시 때 지원서를 두 장 냈다. 한 장은 아들이 꼭 대학가기를 바랐던 아버지를 위해 의례적으로, 한 장은 ‘두고 보세요. 나중에 대학 나온 사람보다 더 잘 살 테니.’ 하는 다부진 마음을 실어 인천직업훈련원(지금은 직업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대학에는 원서만 내놓고 시험도 치러 가지 않았다. ‘남들이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학력의 차이를 상쇄해 버릴 만큼 기반을 닦으면 된다.’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는 인천직업훈련원에서도 “전망이 밝아 보이는” 전자과를 택했고,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갔다. ‘전자 관련 기술이 있으면 군대에서도 관련 업무를 맡아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과 기대대로 그는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제대한 뒤 93년 12월에 기아자동차에 입사해 마침내 서른에 내 집을 장만하는 데 성공했다. 수재인 큰아들에 견주어 작은 아들이 번듯한 대학 못나온 것을 내내 아쉬워하던 아버지도 이제는 주변에 작은 아들 자랑을 많이 하고 다닌다. “대학 안 다닌 거, 저는 조금도 아쉽지 않아요.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가면 되죠. 필요하다면 저는 언제라도 합니다.”
신운식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간판이나 포장에 동요되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실속을 추구하는 그의 ‘깍쟁이’ 같은 이력을 ‘서울내기’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택시회사 사장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고 ‘나도 커서 택시회사를 운영해야지’하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는 걸 보면 그는 타고난 현실주의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실속파로서의 내공을 쌓은 결정적 시기는 고등학교 때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1등으로 입학했다가 꼴찌로 졸업했다. 이른바 ‘노는 애’가 되었던 것이다.술 먹고 담배 피고 ‘어깨’ 친구들과 술집을 드나들며 패싸움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절대로 넘지 않는 ‘깍쟁이’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친구들이 사고 친 거를 수습하러는 다녔죠. 그렇지만 내가 사고를 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대신에 그는 ‘노는’ 비용을 마련하려고 건축현장 일당 잡부에서 구로동 주변 이런 저런 공장의 임시 공원, 지하철 ‘푸시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다 해보았다.
그렇게 만난 세상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세상과는 다른, 살아서 펄펄 뛰는 진짜 세상이었다. 말하자면 신운식씨는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배운 셈인데, 그 가운데서도 남대문 새벽시장 상인들이 드나들던 당구장에서 일할 때 그분들과 부대끼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앉아서 떼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한 만큼 돈을 번다는 것, 하자고 맘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은 카니발과 리오 두 차종만 생산한다. 입사 11년차, 차체 2부 소속인 신운식씨는 여러 라인을 경험하고 지금은 리오 완성차 라인에서 최종 불량 수정 작업을 하고 있다. 일부 정시 근무 부서도 있지만 생산라인은 주야 맞교대여서 신운식씨도 1주일 단위로 밤낮이 바뀐다. 주간일 땐 아침 8시 30분, 야간일 땐 저녁 8시 30분이 출근시간이다. 1주일 단위로 밤낮이 바뀌는 생활이 힘들지 않을까? “이젠 이력이 나서 괜찮아요. 또 야간 근무는 야간 근무대로 독특한 정취랄까 맛이 있어요. 아무래도 높은 분들이 적으니까 좀더 자유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직장에 불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이왕 하는 거라면 즐겁게 하는 게 좋죠. 저는 일을 즐기면서 하려고 해요. 얼마 전에 정시 근무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했는데 저는 이게 좋습니다. 돈도 제법 차이가 나거든요.”
신운식씨는 주간일 땐 7시 30분쯤, 야간일 땐 6시 20분쯤 집을 나선다. 도중에 합기도 도장에 들러 운동을 하고 출근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왠지 체질에 맞아” 2년전에 시작한 합기도가 이제는 초단이다. 운동 이외에 그의 일상에 가장 큰 활력이 되는 것은 동호회 활동이다. 친하게 지내는 회사 선후배 대여섯 명과 어울려 2, 3년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몇 달 전 아예 ‘농촌체험회’라는 이름으로 사내 동호회로 등록을 했다.
지금의 신운식씨를 봐서는 상상하기 힘든, 왕년의 ‘놀던’ 시절을 빼면 그는 매사가 너무 반듯하고 매끈하다. 그래서 동호회 활동을 함께 하는 사내 선배들과의 술자리에 끼어들어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짠돌이”란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노동운동이나 정치에 대해서도 그는 매우 실용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둘 다 속성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속을 들여다보면 정치나 노동운동이나 이런 저런 계파도 많고, 계파들끼리의 합종연횡도 많고. 저는 노조를 ‘내가 어려울 때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이념이나 이상만으로 움직이지는 않죠. 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아는 사람 때문에 잠시 어떤 정치인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허장성세에다 야바위꾼 같은 사람이 많더군요. 그래서 전 정치 이야기는 별로 안 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신운식씨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가족이죠.” 그는 인천직업훈련원 동기생인 박신영씨와 오랜 연애 끝에 96년 결혼했다. 실속파 아니랄까 봐 아이도 한꺼번에 둘을 낳았다. 올해 여섯 살인 영호, 정호 형제는 이란성 쌍둥이다.
아내와는 모든 면에서 생각이 비슷해서 무언가 계획을 세울 때도 늘 함께 세운다. 박신영씨는 남편을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결혼하면 연애할 때와는 다르게 변하는 사람이 많다던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매사에 성실하고,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하고. 그리고 굉장히 효자에요.” 효자라는 칭찬이 멋쩍었는지 신운식씨는 “저희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굉장히 잘 하셨어요.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배웠겠죠.” 덧붙인다. “일하느라 바빠서 아이들이랑 많이 못 놀아주는 것”이 남편에 대한 박신영씨의 유일한 불만이다.
작년에 아이들을 유치원에 입학시킬 때 신운식씨는 유치원 앞에서 밤을 새웠다. “요즘은 유치원에서부터 너무 공부를 많이 시키더라고요. 저는 아이 때는 맘껏 놀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유치원 방침이 제 생각과 맞았는데 선착순이더군요. 저는 나중에도 아이들한테 너무 ‘공부, 공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가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꼭 가르치고 싶은 게 있다면 “남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언제나 정직하게, 또 욕심내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근거해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고, 한 줌의 ‘거품’도 없이 실속 있게 살아온 신운식씨의 장래 계획은 어떨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잘 먹고 잘 살아야죠. 마흔 넘으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견문이 넓어지니까. 형편이 허락하면 나중엔 전원생활을 하고 싶기도 하고. 또.....제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여행 사이트가 있어요. 근데 그 사이트 운영하는 형님이 정말 존경스런 분이에요. 장애인들 돕는 봉사활동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일도 하고 싶고.”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신운식씨는 오늘도 경제와 재테크 관련 사이트를 관심 있게 드나든다. 신운식씨를 만나고 나서 한 가지를 확실하게 배웠다. “혹 ‘불량 학생’을 만나더라도 그의 앞으로의 인생을 예단하지 말라!”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잔업이 끝나는 8시에 광명시 소하리 공장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신운식씨는 조금 늦게 나왔다. 집이 있는 안양시 박달동으로 차를 몰면서 늦은 이유를 말해주길래, 올해 35살인 그의 나이를 감안해 “우와, 내 집 마련하셨나 보네요.” 지레짐작 축하인사를 건넸다가 뒷통수를 한 대 세게 맞았다. 30살이 되던 해인 99년에 지금 살고 있는 32평 아파트를 샀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서른에 집 장만하면 성공한 거라고.”
신운식씨는 대학입시 때 지원서를 두 장 냈다. 한 장은 아들이 꼭 대학가기를 바랐던 아버지를 위해 의례적으로, 한 장은 ‘두고 보세요. 나중에 대학 나온 사람보다 더 잘 살 테니.’ 하는 다부진 마음을 실어 인천직업훈련원(지금은 직업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대학에는 원서만 내놓고 시험도 치러 가지 않았다. ‘남들이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학력의 차이를 상쇄해 버릴 만큼 기반을 닦으면 된다.’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는 인천직업훈련원에서도 “전망이 밝아 보이는” 전자과를 택했고,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갔다. ‘전자 관련 기술이 있으면 군대에서도 관련 업무를 맡아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과 기대대로 그는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제대한 뒤 93년 12월에 기아자동차에 입사해 마침내 서른에 내 집을 장만하는 데 성공했다. 수재인 큰아들에 견주어 작은 아들이 번듯한 대학 못나온 것을 내내 아쉬워하던 아버지도 이제는 주변에 작은 아들 자랑을 많이 하고 다닌다. “대학 안 다닌 거, 저는 조금도 아쉽지 않아요.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가면 되죠. 필요하다면 저는 언제라도 합니다.”
신운식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간판이나 포장에 동요되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실속을 추구하는 그의 ‘깍쟁이’ 같은 이력을 ‘서울내기’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택시회사 사장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고 ‘나도 커서 택시회사를 운영해야지’하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는 걸 보면 그는 타고난 현실주의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실속파로서의 내공을 쌓은 결정적 시기는 고등학교 때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1등으로 입학했다가 꼴찌로 졸업했다. 이른바 ‘노는 애’가 되었던 것이다.술 먹고 담배 피고 ‘어깨’ 친구들과 술집을 드나들며 패싸움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절대로 넘지 않는 ‘깍쟁이’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친구들이 사고 친 거를 수습하러는 다녔죠. 그렇지만 내가 사고를 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대신에 그는 ‘노는’ 비용을 마련하려고 건축현장 일당 잡부에서 구로동 주변 이런 저런 공장의 임시 공원, 지하철 ‘푸시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다 해보았다.
그렇게 만난 세상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세상과는 다른, 살아서 펄펄 뛰는 진짜 세상이었다. 말하자면 신운식씨는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배운 셈인데, 그 가운데서도 남대문 새벽시장 상인들이 드나들던 당구장에서 일할 때 그분들과 부대끼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앉아서 떼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한 만큼 돈을 번다는 것, 하자고 맘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은 카니발과 리오 두 차종만 생산한다. 입사 11년차, 차체 2부 소속인 신운식씨는 여러 라인을 경험하고 지금은 리오 완성차 라인에서 최종 불량 수정 작업을 하고 있다. 일부 정시 근무 부서도 있지만 생산라인은 주야 맞교대여서 신운식씨도 1주일 단위로 밤낮이 바뀐다. 주간일 땐 아침 8시 30분, 야간일 땐 저녁 8시 30분이 출근시간이다. 1주일 단위로 밤낮이 바뀌는 생활이 힘들지 않을까? “이젠 이력이 나서 괜찮아요. 또 야간 근무는 야간 근무대로 독특한 정취랄까 맛이 있어요. 아무래도 높은 분들이 적으니까 좀더 자유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직장에 불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이왕 하는 거라면 즐겁게 하는 게 좋죠. 저는 일을 즐기면서 하려고 해요. 얼마 전에 정시 근무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했는데 저는 이게 좋습니다. 돈도 제법 차이가 나거든요.”
신운식씨는 주간일 땐 7시 30분쯤, 야간일 땐 6시 20분쯤 집을 나선다. 도중에 합기도 도장에 들러 운동을 하고 출근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왠지 체질에 맞아” 2년전에 시작한 합기도가 이제는 초단이다. 운동 이외에 그의 일상에 가장 큰 활력이 되는 것은 동호회 활동이다. 친하게 지내는 회사 선후배 대여섯 명과 어울려 2, 3년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몇 달 전 아예 ‘농촌체험회’라는 이름으로 사내 동호회로 등록을 했다.
지금의 신운식씨를 봐서는 상상하기 힘든, 왕년의 ‘놀던’ 시절을 빼면 그는 매사가 너무 반듯하고 매끈하다. 그래서 동호회 활동을 함께 하는 사내 선배들과의 술자리에 끼어들어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짠돌이”란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노동운동이나 정치에 대해서도 그는 매우 실용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둘 다 속성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속을 들여다보면 정치나 노동운동이나 이런 저런 계파도 많고, 계파들끼리의 합종연횡도 많고. 저는 노조를 ‘내가 어려울 때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이념이나 이상만으로 움직이지는 않죠. 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아는 사람 때문에 잠시 어떤 정치인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허장성세에다 야바위꾼 같은 사람이 많더군요. 그래서 전 정치 이야기는 별로 안 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신운식씨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가족이죠.” 그는 인천직업훈련원 동기생인 박신영씨와 오랜 연애 끝에 96년 결혼했다. 실속파 아니랄까 봐 아이도 한꺼번에 둘을 낳았다. 올해 여섯 살인 영호, 정호 형제는 이란성 쌍둥이다.
아내와는 모든 면에서 생각이 비슷해서 무언가 계획을 세울 때도 늘 함께 세운다. 박신영씨는 남편을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결혼하면 연애할 때와는 다르게 변하는 사람이 많다던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매사에 성실하고,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하고. 그리고 굉장히 효자에요.” 효자라는 칭찬이 멋쩍었는지 신운식씨는 “저희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굉장히 잘 하셨어요.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배웠겠죠.” 덧붙인다. “일하느라 바빠서 아이들이랑 많이 못 놀아주는 것”이 남편에 대한 박신영씨의 유일한 불만이다.
작년에 아이들을 유치원에 입학시킬 때 신운식씨는 유치원 앞에서 밤을 새웠다. “요즘은 유치원에서부터 너무 공부를 많이 시키더라고요. 저는 아이 때는 맘껏 놀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유치원 방침이 제 생각과 맞았는데 선착순이더군요. 저는 나중에도 아이들한테 너무 ‘공부, 공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가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꼭 가르치고 싶은 게 있다면 “남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언제나 정직하게, 또 욕심내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근거해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고, 한 줌의 ‘거품’도 없이 실속 있게 살아온 신운식씨의 장래 계획은 어떨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잘 먹고 잘 살아야죠. 마흔 넘으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견문이 넓어지니까. 형편이 허락하면 나중엔 전원생활을 하고 싶기도 하고. 또.....제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여행 사이트가 있어요. 근데 그 사이트 운영하는 형님이 정말 존경스런 분이에요. 장애인들 돕는 봉사활동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일도 하고 싶고.”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신운식씨는 오늘도 경제와 재테크 관련 사이트를 관심 있게 드나든다. 신운식씨를 만나고 나서 한 가지를 확실하게 배웠다. “혹 ‘불량 학생’을 만나더라도 그의 앞으로의 인생을 예단하지 말라!”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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