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미처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세상의 진실을 찾아내어 기사로 알려주는 신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희 독자(34)가 내일신문에 바라는 꿈이다. 이미희씨가 내일신문과 맺은 인연이 내일신문에 거는 꿈을 만들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던 이미희씨는 3학년 때, 석탑노동연구원에서 나온 ‘새벽’이라는 시사무크지를 통해 내일신문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대통령선거가 있던 1992년 당시 장명국 석탑노동연구원 원장은 그 잡지에 ‘당선 가능한 야당을 지지하자’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글 한편이 우리 현대사를 바로 보는 눈과 진보를 일궈나가는 사람들의 역사 등 정말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씨는 새벽잡지를 통해 받은 감동을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분임토의를 생활화하자’는 글을 읽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민주성과 자주성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아나갔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매일 오후 4시면 이씨가 남편과 함께 일하고 있는 자그마한 편집기획사에 내일신문이 배달된다.
“신문을 집어들면 정치 경제 사회면은 휘리릭 그냥 넘겨도 장명국 원장님 칼럼에는 눈이 팍 꽂히데요.”
그는 9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과정속에서 들인 사고습관대로 지금도 내일신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형성한다고 했다.
“장명국 원장님의 사설을 줄줄이 눈도장 찍어가며 보고 또 보고 급기야 외워버리기까지 …내일신문은 저에게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신문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역할을 계속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수원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당한 이씨는 내일신문 수원사업부에서 일하게 됐다. 기자일과 편집일을 함께 하는 정신없이 바쁜 시절이었지만 빛나는 시절로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 남편 차석준씨와의 인연도 내일신문에서 함께 일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결혼한 후 독립하여 인쇄관련 회사를 차려 내일신문에서 배운 그래픽디자인 기술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나름대로 잘 살고 있으니 이게 바로 밥일꿈의 실현이 아닌가요?”라고 웃었다.
두 아이를 둔 30대 중반의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미희씨가 내일신문에 또 하나 요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돈을 많이 벌라”는 색다른 주문이다.
그는 “신문사가 어떤 방도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잘 모르지만…”이라고 망설이면서도 “돈을 많이 벌어야 문화 교육 생활 여성 복지 등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공간이 더 많은 종합일간지가 될테니까요”고 설명했다.
이씨는 “본지만큼 무거운 광고전단지를 들어올리며 ‘웬신문에 간지가 이렇게 많냐’고 투덜거릴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오늘도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는 독자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이미희 독자(34)가 내일신문에 바라는 꿈이다. 이미희씨가 내일신문과 맺은 인연이 내일신문에 거는 꿈을 만들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던 이미희씨는 3학년 때, 석탑노동연구원에서 나온 ‘새벽’이라는 시사무크지를 통해 내일신문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대통령선거가 있던 1992년 당시 장명국 석탑노동연구원 원장은 그 잡지에 ‘당선 가능한 야당을 지지하자’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글 한편이 우리 현대사를 바로 보는 눈과 진보를 일궈나가는 사람들의 역사 등 정말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씨는 새벽잡지를 통해 받은 감동을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분임토의를 생활화하자’는 글을 읽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민주성과 자주성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아나갔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매일 오후 4시면 이씨가 남편과 함께 일하고 있는 자그마한 편집기획사에 내일신문이 배달된다.
“신문을 집어들면 정치 경제 사회면은 휘리릭 그냥 넘겨도 장명국 원장님 칼럼에는 눈이 팍 꽂히데요.”
그는 9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과정속에서 들인 사고습관대로 지금도 내일신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형성한다고 했다.
“장명국 원장님의 사설을 줄줄이 눈도장 찍어가며 보고 또 보고 급기야 외워버리기까지 …내일신문은 저에게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신문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역할을 계속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수원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당한 이씨는 내일신문 수원사업부에서 일하게 됐다. 기자일과 편집일을 함께 하는 정신없이 바쁜 시절이었지만 빛나는 시절로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 남편 차석준씨와의 인연도 내일신문에서 함께 일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결혼한 후 독립하여 인쇄관련 회사를 차려 내일신문에서 배운 그래픽디자인 기술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나름대로 잘 살고 있으니 이게 바로 밥일꿈의 실현이 아닌가요?”라고 웃었다.
두 아이를 둔 30대 중반의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미희씨가 내일신문에 또 하나 요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돈을 많이 벌라”는 색다른 주문이다.
그는 “신문사가 어떤 방도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잘 모르지만…”이라고 망설이면서도 “돈을 많이 벌어야 문화 교육 생활 여성 복지 등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공간이 더 많은 종합일간지가 될테니까요”고 설명했다.
이씨는 “본지만큼 무거운 광고전단지를 들어올리며 ‘웬신문에 간지가 이렇게 많냐’고 투덜거릴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오늘도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는 독자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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